(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경주하면 신라 시대 때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여 현재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어 불교의 성지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이 백률사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는 북방전래를 따르고 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에 중국의 승려인 순도가 전진에서 불경과 불상을 들여오면서부터입니다. 백제는 384년인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리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백률사 주소: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1

백률사 전화:054-772-8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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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라는 당시 국경이 산악지대로 험준한 백두대간이 막고 있어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라 유민들 사이에는 불교가 조금씩 전래하였으며 신라에다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한 분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스님 묵호자(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서라벌로 들어와 불교 포교를 힘썼지만 실패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백률사 송죽당



이곳이 신라불교의 초전지라면 신라불교의 최초 발상지는 구미시 해평면의 태조산 도리사입니다. 아도화상은 냉산(태조산)에다 처음 토굴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으며 이는 416년으로 신라불교가 공인받는 527년으로 보면 100년이 넘는 터울이 있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이미 신라에도 일반백성은 조금씩 불교가 성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신라가 불교에 공인을 받게 된 계기는 물론 527년 이차돈의 순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6세기 초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력이 강한 귀족에 의해 번번이 대립하였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이차돈이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찾아와 “신라에 불교가 융숭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기꺼이 제 한 목숨을 받치겠습니다”. 라며 제안을 합니다.





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호





법흥왕이 은밀하게 이차돈의 순교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그길로 천경림에다 절을 지으려고 합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는 곳은 신라 귀족으로서는 매우 신성시하며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다 이차돈이 절을 짓겠다 하니 귀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차돈이 이것을 노렸을 것 같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세력인 귀족은 법흥왕에게 이 일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차돈을 잡아들이게 하고 그의 목을 쳐라했습니다.


 




이차돈은 잡혀 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불교를 위해 죽으니 만약 부처님께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당당히 순교하였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흰 젓이 한길이 넘게 치솟았고 갑자기 천지가 진동했으며 하늘이 캄캄하고 꽃 비가 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귀족세력들도 어쩔 수 없이 법흥왕이 바라던 데로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였고 “왕이 곧 부처다”며 부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불국토로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백률사 마애삼층석탑


백률사는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던 자리에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에 절을 세웠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자초사라하였습니다. 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세운 순교비가 1914년 백률사 인근 숲속에서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이차돈 순교비의 조성 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라 헌덕왕 9년인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 공양당이라하며 화강암의 육각형 기둥입니다. 복련의 연꽃을 새긴 좌대 위에 세워졌으며 육각기둥 끝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면에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석당의 비문은 당시 최고의 신필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김생의 글씨라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유추하면 백률사가 자초사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률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경주 부윤 윤승순에 의해 중수되었습니다. 대웅전은 단층의 목조 기와 건물로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좌우 협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건물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건물의 기단부인 축대는 일부지만 신라 시대 양식이 남아 있습니다. 백률사는 예전에 없던 송죽당이 최근에 들어섰으며 신라불교의 성지답지 않은 어찌 보면 아주 초라한 작은 암자 규모입니다.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률사가 딱 그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작은 터에 여러 전각을 세우지 못해서 그런지 중심법당인 대웅전에는 모두 3개의 문이 있습니다. 가운데는 대웅전, 오른쪽은 응진전입니다. 대웅전과 응진전을 한 건물에 둔 경우는 아주 드문 일로 보입니다. 물론 법당 중앙에는 본존불과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시며 대웅전의 사격을 갖추었고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로 16나한상을 함께 모셨습니다. 






왼쪽에는 신라에 불교를 공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순교를 자처한 이차돈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 앞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3.2m 높이에 상륜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삼층석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사찰과 다르게 석탑을 세울 장소가 없어 자연석 바위에다 탑 모양을 새겼던 것으로 보이며 소금강산 정상 30m 북사면에는 마애삼존좌상이 식별이 불가할 정도로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 대웅전에서 이차돈 순교비와 함께 경주국립박물관에 옮겨 전시 중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불(국보 제28호)과 이차돈 순교비를 따로 만나고 싶습니다.


이차돈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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