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여행/해남여행) 달마산 미황사. 해남 땅끝 달마산 미황사 여행


해남여행을 하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곳 모두가 선경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만큼 해남을 찾는 여행객은 볼 곳이 많은 곳입니다. 

해남의 산은 대부분 기치창검이 치솟은 듯 삐쭉삐쭉한 바위로 이루어졌고 삼면이 바다로 둘려 어디를 가던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그 속에 잠든 듯 깨어있는 천년고찰은 고고한 해남의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남 땅끝 달마산 미황사 주소: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1

해남 땅끝 달마산 미황사 전화:061-533-3521




 


해남의 대표사찰은 두륜산의 대둔사와 달마산의 미황사를 첫손으로 꼽습니다. 

두 고찰 모두 두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천년고찰에 포함합니다. 

그중에 해남의 명산인 달마산의 미황사를 찾았습니다. 

달마산 하면 언뜻 달마대사를 떠올립니다. 

그 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물렀다는 산이 달마산입니다.

 


능선을 따라 솟은 바위가 만개의 부처님 모습과 닮았을 정도로 부처님의 기운이 가득한 산입니다. 

그 때문인지 달마산의 기운이 장난 아닐 정도로 드세어 항상 신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 설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미황사 창건설화는 1692년(숙종18)에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749년인 신라 경덕왕 때 달마산 아래 포구에 돌배가 닿았습니다. 

이를 본 의조화상이 마을 사람과 함께 포구에서 돌배를 맞았습니다. 

그 돌배는 많은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습니다.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탱화, 금환, 검은 돌을 싣고 금인이 돌배를 저어 왔습니다.

 


그런데 검은 돌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검은 소가 나왔습니다. 

그날 밤에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금인이 나와 ”나는 돌배를 저어 도착한 우전국 왕이다. 

부처님을 모실 곳을 찾아 여러 나라를 다니다 이곳에 닿았는데 달마산을 보니 만불이 나타남으로 여기에다 부처님을 모시려 하니 검은 소에 경전을 싣고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다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도록하오“하며 사라졌습니다.

 


스님은 꿈에서 깨어나 꿈도 이상하다며 소등에다 경전을 싣고 걷는데 갑자기 검은소가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걸음을 옮겼습니다. 

달마산 골짜기에 들어서니 또다시 검은소가 드러누워 이번에는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의조화상은 첫 번째 소가 누웠던 자리에다 통교사를 새우고 검은소가 눌러앉은 자리에는 미황사를 창건했습니다.





그 때문에 미황사(美黃寺)는 소와 인연이 깊은 사찰입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워서 따왔으며 황은 금인의 색상이 누런 금빛에서 따와 미황사가 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천년고찰인 달마산의 미황사는 1989년까지 빈 사찰로 남아 있었었습니다. 

그때 내가 먼저 자리를 잡아서야 했는데 아깝게 놓치고 말았습니다.



미황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보물 제947호인 대웅보전과 보물 제1183호인 응진당입니다.

대웅보전은 미황사의 중심건물답게 웅장합니다. 

또한, 만개의 부처님이라는 달마산의 기암괴석을 한 열두폭 돌병풍이 뒤를 받쳐주며 서향으로 앉아 이게 미황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미황사를 더욱 찾게 하는 거 같습니다.






미황사 대웅전의 중창에 관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1754년 소응천(蘇凝天)이 쓴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입니다. 

미황사 대웅전의 기록으로는 이게 유일할 정도로 남아 있는게 없다고 합니다. 

미황사 상량문에 3번의 미황사가 중창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에 불타 1598년에서 시작된 제1차 중창은 1601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기록 만으로는 현재 대웅전의 중창인지 확인 할 수 없으며 이후에도 2회의 중건이 더있었기 때문입니다. 

2차 중창은 1658년에 시작되어 1660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2차 중창은 1차 중창과 비교해 보면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때 중창된 대웅전이 현재의 대웅전과 관계된 게 아닌가 추정만 하고 있습니다.









3차 중창은 1751년에서 175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대웅전 이외에도 나한전(응진전) 등이 함께 중창되었습니다. 

이때 쾌행이 상편수로 전체를 총괄하였다 합니다. 

3차 중창이 현존하는 대웅전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건물로 보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2차 중건을 하면서 대웅전을 새롭게 지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 고쳐 지은 것인지는 확인 할수 없다고합니다.





1821년『영암미황사대법당삼존개금급단청중기』에 보면 삼존불 개금과 단청이 이때 다시 이루어졌으며 현재 대웅전의 외관은 단청이 탈색된 상태지만 내부의 단청은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1980년 6월에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 제79호에 지정되었으며 1982년 대웅전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1988년 4월에 보물 제947호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미황사 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 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불전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미황사 대웅전은 자연석을 막돌허튼층쌓기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따로 기단을 세우지 않고 바로 축대를 기단으로 삼았는데 이 방식은 다른 불전에서는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 합니다.

 




대웅전의 초석은 모두 막돌초석의 형식을 띠지만 막돌 그대로 사용한 것과 막돌 위에 원형의 쇠시리로 기둥이 앉을 자리인 주좌를 새긴 것과 막돌에다 원형으로 연꽃을 새기고 그위에 원형의 한단 쇠시리로 기둥이 앉을 자리를 만든 세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복련, 연봉형, 고사리형 문양, 게, 거북 등 바다짐승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후기 전라도 해안지방 사찰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민간신앙적인 요소를 불교가 수용한 것 같습니다. 대웅전의 기둥은 팽주가 12개, 내부가 2개로 총 14개이며 모두 배흘림기둥을 사용했습니다.







대웅전에서 눈여겨 볼 곳은 앞면의 창호입니다. 

처음에는 시골 부엌문과 같은 양식인 문지방에 고정하여 구멍을 뚫고 문짝에 촉을 두어 끼워 회전하여 안으로 여닫는 방식인 둔테목 구조였으나 1982년 해체보수 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창으로 바꾸었습니다. 

앞면의 문은 문살을 소슬빗꽃살의 살대로 한 사분합을 설치하고 양쪽 툇간에는 빗꽃살의 살대로 한 삼분합을 설치했습니다.





앞면의 문살은 툇간의 문살보다 장식성을 가미했다고는 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여 대웅전의 건물과 잘 어울려 품위를 잃지 않아 보였습니다. 

양쪽 측면의 출입문은 한 개씩이며 띠살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대웅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전체에 깔았습니다. 

응진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입니다.







석가모니와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미황사의 부불전으로 대웅전 오른쪽의 계단 위에 있습니다.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에는 나한전이라 했으나 지금 현판에는 응진당이 걸려있습니다. 

응진당 또한, 정유재란으로 불탔다가 이듬해인 1598년 중창을 시작하여 1601년 마무리되었으며 대웅전과 함께 2차, 3차 중창하였습니다








응진당의 천장은 대웅전과 같은 형식인데 공포는 이보다 앞선 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1993년에 보물 제118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 2011 해남 미황사 대웅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참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해남읍내를 가지 않고 미황사 아래에서 점심으로 연잎밥을 먹기로 계획하고 미황사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연잎밥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ㅋㅋ 황당 그자체였습니다.

 무엇이 되느냐하니까 단팥죽과 팥빙수만  된다는 이야기 ㅎㅎ



차마고도라고 불리는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를 걸으려고 왔는데 ㅎ 단밭죽 한그릇만 먹고 어찌 갈지 그저 암담했습니다. 

우찌하지도 못하겠고 할수 없이 단밭죽에 연빵인지 빵하고 점심으로 대체하고 달마고도 둘레길을 떠났습니다. 

미황사에서 연잎밥을 먹으려는 분은 필히 확인을 하고 출발하는게 좋습니다. 

아니면 저처럼 밥도 쫄쫄 굶고 댕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점심으로 먹었던 단밭죽 한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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