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서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찾아가는 길도 만만찮았습니다. 험난한 산과 깊은 계곡을 타고 넘으면서 몸은 파김치가 되었고 기진맥진하여 이들은 어느 동굴을 찾아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곯아떨어졌고 원효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더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이 손에 잡혔습니다.
목이 말라 급한 김에 벌꺽벌꺽 순식간에 다 비워버렸고 다시금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에 꿀맛이었던 물그릇을 찾았다가 그게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밤새 달콤하게 잠을 잤던 동굴은 무덤 속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게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 사상을 깨달았습니다.
원효는 당나라에 가보았자 별 통수가 없다고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만 보내고 자신은 신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민중 속을 파고들며 노래로서 불법을 전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노래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 김춘추만이 “자신에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아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라는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김춘추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요석궁에 머물러 있던 딸이 있어 이 둘을 맺어줄 계책을 세우고는 신하를 불러 원효를 궁궐로 모셔오라고 합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는 궁궐로 향하다가 요석궁 앞의 개울에 발을 헛디뎌 빠지면서 넘어져 그만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오늘 밤은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고 내일 만나자는 어명을 내렸고 원효는 옷을 말리려고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옷만 말리라 했는데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석공주는 10개월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분이 신라 10현 중 한 분인 설총입니다. 이로써 원효대사는 파계승을 자처하며 자신을 소성거사라 불렀습니다.
설총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경북 경산시 원효대사의 고향마을과 가까운 곳에 설총과 요석공주의 전설이 있는 반룡사가 현재 남아있습니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고향에서 설총을 낳았고 설총과 함께 반룡사에 머물면서 설총을 키웠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을 때는 왕비와 함께 항상 구룡산에 걸린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고 지금도 그 고개를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라고 부릅니다.
설총은 성장하면서 총명했나 봅니다. 아버지 원효대사의 노랫말처럼 현자를 낳아 나라를 받치는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말입니다.
설총은 이두법을 집대성했는데 이는 한자인 음과 훈인 소리를 새겨 우리말식으로 적어 사용했던 문자로서 유교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해서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습니다. 이두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사기의 설총 열전 편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에게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해줄 것을 우화로 엮어서 이야기해줍니다. 이게 한국 최초의 창작 설화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후대에 와서 화왕계로 불렸습니다.
신문왕은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 글로 써서 왕 된 이들의 경계로 삼기 바란다“며 후세의 임금에게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문왕은 설총을 관직에 발탁시켰습니다.
설총의 묘는 지름이 15m, 높이가 7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아랫부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022년(고려 현종 13년) 홍유후의 시호를 추증받았고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1623년(조선 선조 1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단일사찰로 규모보다 이리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을 찾기 힘들 정도로 봉정사는 숨겨진 보배로운 사찰입니다.
봉정사 입구에서 내려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놓은 길을 걸었습니다.
천연 고찰을 만난다는 설렘을 진정도 시키면서 산사의 진한 풀 내음과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음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16년에도 봉정사 여행을 했지만 2년 만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다 설렜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오르막이라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돌려야 했습니다.
막바지에 봉정사 오르는 돌계단을 두고 푸름을 잃지 않은 굵은 소나무가 무더위에 그늘을 만드는 양 길가에 드러누워 관광객을 맞이했습니다.
봉정사에는 따로 천왕문이 없으나 이 소나무가 천왕문 역할을 하는 듯 당당합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봉정사 출입문인 누각형태의 만세루가 있습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게 세월의 더께를 느껴질 정도로 오래되어 보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1680년(숙종6년)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창건 후에는 덕휘루(德煇樓)라 불렀다 하나 언제부터 만세루가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세루의 특징은 봉정사의 출입문 역할을 하며 산비탈을 깎아서 봉정사 절터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터를 다졌습니다.
만세루는 축대 가운데에다 걸친 형태로 그 아래에 출입계단을 내어 봉정사를 드나들도록 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웅전에서 만세루를 보면 지면과 연결된 단층건물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2층 누각형태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크기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모양을 한 홑처마 맞배지붕건물입니다.
마루가 깔린 만세루는 정자나 강당 역할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닥은 우물 정자 모양을 한 우물 마룻바닥에 평난간을 돌렸습니다.
특히 만세루에서 눈여겨 볼 점은 누각을 받치는 기둥입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형태인 기둥은 휘어진 게 찾는 사람의 마음을 경직되지 않게 편안함을 주며 언뜻 보면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겨집니다.
만세루는 장식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운판과 북,, 목어를 설치하였고 덕휘루 현판과 기문도 걸려 있습니다.
유형문화재 제325호.
만세루를 지나면 봉정사 경내입니다.
먼저 앞쪽에 사찰의 중심건물인 국보 제311호 대웅전이 있습니다.
나라의 보물이 한점도 아니고 두 점이 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봉정사 대웅전은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두고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나온 기록을 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중창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극락전 상량문과 천등산 봉정사기(1728), 양법당중수기(1809)인 묵서와 1999년 해체 수리하면서 봉정사 탁자 조성기, 법당중창기(1435), 정면 어칸 기둥 묵서(1436), 대웅전개연중수기(1601)등의 기문을 찾아내어 대웅전의 변천 과정을 알게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확인된 자료에서 1809년까지 9~10회 정도 대웅전을 보수했으며 그중 1361년인 공민왕 10년의 불단 묵서와 1428년 세종 10년에 불화기록, 1431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내어 최소한 봉정사 대웅전은 1425년인 세종 7년 전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봉정사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크기로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모양의 팔작기와지붕입니다.
봉정사대웅전은 기존의 대웅전과 다르게 대웅전 앞에 조선시대 누마루 양식인 툇마루를 달아내었습니다.
이는 고려와 조선 초기의 건물 양식을 접목한 형태로 눈여겨 볼만합니다.
안동 봉정사에서는 대웅전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이며 1971년 극락전을 수리하다 1625년 인조 3년에 작성한 상량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상량문에는 672년인 신라 문무왕 12년에 능인 대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원효대사의 창건설로 알려졌었으며 1363년인 공민왕 12년에 극락전의 지붕을 수리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훨씬 이전부터 극락전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천등산은 대망산이라 불렀으며 능인대사가 대방산 토굴에서 수도에 전념하였고 그 과정에서 스님의 불력을 시험하려고 천녀는 능인에게 파계하여 속세에 내려가서 함께 살자고 유혹하였으나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불제자의 도리라며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학봉 김성일 하면 황윤길과 함께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조선침략의도를 정탐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분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학봉선생을 경상도 관찰사 초유사로 임명하여 전란을 막도록 했습니다.
먼저 학봉김성일선생 종택을 보기 앞서 학봉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학봉김성일선생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황윤길과 조선통신사로 참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의도를 파악하려고 동행합니다.
조선통신사의 업무가 끝나고 김성일과 황윤길은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황윤길은 조만간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며 전쟁설을 보고하지만, 김학봉은 그와 반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꿈도 꾸지 않는다며 전쟁불가 설을 서로 상반 댄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황윤길의 보고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고 조정은 김성일에게 파직과 함께 참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류성룡은 김성일에게 왜 그런 보고를 하였느냐고 묻자 김성일은 그때야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왜란의 가능성을 부정한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 나기도 전에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게 더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여 그런 보고서를 올리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나아가 지금 전쟁으로 시국이 혼란한데 김성일만이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선조는 경상도관찰사초유사로 임명하였고 학봉선생은 경상도로 내려와 의병장 김성일과 정인홍 등을 도와 왜군을 막는데 힘썼습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장군이 죽자 학봉선생은 진주성을 수성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왜적은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곡창지역인 호남평야로 진격하려고 진주성을 침공한다는 계획을 미리 알고는 의병과 힘을 모아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왜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승리로 호남평야는 지켜낼 수 있었고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학봉선생은 1593년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습니다.
의성김씨학봉종택은 들어서는 삼문 입구에 ‘학봉선생구택’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앞면 5칸에 옆면 1칸인 대문채를 지나면 진초록의 잔디가 깔린 마당에 들어섭니다.
넓은 정원에는 유실수와 소나무와 다양한 문양석이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마당을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했다면 본격적인 학봉구택을 둘러보겠습니다.
학봉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으며 류성룡과 함께 성리학의 학통인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추앙 받는 분입니다
학봉종택은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저지대로 조금만 비가와도 물이 들이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762년(영주38년)에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옮겼습니다.
1964년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안채만 옮겼으며 사랑채는 그곳에 남겨두고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학봉종택의 사랑채는 한일자 건물이며 안채로 들어서는 출입문은 열려 있고 왼쪽의 닫힌 문은 부엌문입니다.
안채에는 현재에도 김성일 후손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사생활을 침해할까 싶어 출입을 삼가는 게 좋을 듯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안채는 오른쪽에 3칸의 대청을 두었고 왼쪽에 2칸의 안방으로 꾸몄습니다. 그 끝에 부엌이 붙은 전형적인 경상북도 양반가옥의 ‘ㅁ’자형 구조입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으로 2칸은 온돌방이며 2칸은 마루입니다.
4칸의 사랑채 앞면에 길게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돌렸습니다.
1963년 옮겨오면서 새로 지었으며 칸마다 각각의 현판이 달렸습니다.
사랑채 옆에는 운장각(雲章閣) 건물이 있습니다. 운장각 안에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가 문화재인 보물이 수두룩해서 그런지 출입문이 잠겨 있습니다.
‘운장’은 "탁피운한(倬彼雲漢) 위장우천(爲章于天)”에서 한자씩 따왔는데 “저 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맑게 빛난다”라는 뜻입니다.
이 앞에도 안동여행을 하면서 학봉종택을 방문했으며 이번에도 학봉종택을 찾았으나 운장각은 개방되지 않고 굳게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오늘은 안동에 관계되는 분인지 단체관광객이 찾아 왔으며 그분들과 인사를 하려고 학봉김성일선생 종손되시는 분이 하얀 계량한복을 입고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체 관람객은 가시고 잠시 있다가 우리보고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으시기에 부산서 왔습니다. 하고서 "저기 운장각은 평소 개방을 하지 않는가 봅니다" 하며 여쭈었습니다.
종손분이 "예" 하시면서 "큰 카메라를 들어 신 거 보니까 어디 사진 찍으러 다니시는 분입니까" 하시며 운장각을 한번 보여 주겠다고 흔쾌히 가자고 했습니다.
내심 많이 기뻤습니다.
기쁜 마음에 운장각으로 따라갔습니다.
번호 키가 달려 있으며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수많은 책과 병풍이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금고도 열어주시면서 내부를 공개했습니다.
그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학봉김성일 선생의 경연일기, 해사록과 선생의 친필 유고와 사기, 고려사절요 등 조선 초기에 간행된 전적 56종 261점과 교지, 편지 등 고문서 17종 242점 등 총 73종 50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봉선생의 유물인 안경, 벼루, 말안장, 신발 등 400여 년이 넘었다는 선생의 유품을 보면서 후손들의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휴대전화로 사진 몇 장을 담았습니다.
이번 안동 학봉김성일 선생 종택여행을 하면서 저에게는 큰 수확이라면 운장각에 보관된 선생의 유품과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만났던 거였습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그 옆에 또 다른 건물은 풍뇌헌입니다.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앞면 4칸에 좌우 각 1칸은 온돌방을 깔고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