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김종직 생가 추원재와 김종직의 묘, 호랑이 무덤 여행.


밀양여행을 하면서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 여행을 했습니다. 추원재는 김종직의 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산인 김숙자가 결혼하고 당시 풍습인 처가 입향하여 거처를 정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짐종직 선생이 태어났고 성장하였으며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낙향하여 돌아가신 곳입니다.





점필재 김종직 생가 추원재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추원재 건물은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 건물로 일(一)자 형태입니다. 정중앙에 추원재 현판이 걸렸으며 ‘도학의 의리 정신을 전하였음’을 뜻하는 전심당의 당호는 마루 왼쪽에 걸려 있습니다. 이는 정의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실천하는 도학사상으로 김종직을 따르는 제자가 많았습니다.





그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과 그의 정신을 계승한 조광조 등 걸출한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성리학의 종조로서 사림파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받는 김종직의 생가에 어찌 보면 많은 유학자가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건물은 잦은 전란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허물어져 훼손이 심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를 따르는 사림파와 후손에 의해 181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습니다.





김종직은 죽고 난 후에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그 이유를 보면 세조가 그의 조카였던 단종을 권좌에서 몰아낸 계유정난을 비꼬았던 '조의제문'인 사초를 김인문이 성종실록에 실었습니다. 그게 알려지면서 사람파에 대한 연산군의 피의 숙청을 무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이를 무오사화라합니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정권이 양분되었는데 점필재 김종직이 이끄는 사림파와 한명회가 이끄는 훈구파였습니다.






이들 훈구파와 사림파는 서로 정권을 나누어 가지며 자신들의 정파에 유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서도 두 정권은 서로 양립했습니다. 김종직의 사림파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새 임금을 옹위하는 왕위찬탈은 정도가 아니라고 반대하였고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당하다며 찬성하였습니다.





세조의 눈에는 당연히 자신을 지지하는 훈구파는 아주 예뻐 보인 반면에 그와 척을 둔 사림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한명회와 신숙주의 훈구파를 중심으로 정권은 움직여졌으며 사림파는 우선 내리는 소낙비는 피해 보자는 심정으로 모두 정치권에서 동떨어져 성리학인 유학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인재 등용은 사림파에서도 이루어졌으며 또다시 훈구파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에 성종실록을 집필하자 사림파의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조의제문’의 사초를 성종실록에다 실었으며 그 내용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왕위 찬탈을 한 세조를 비꼬는 글이었습니다.


 



이에 훈구파의 이극돈과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하기를 김종직이 세조를 욕했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몰래 성종실록에 실었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은 광분하였고 김일손을 위시한 사림파를 모두 잡아들이게 하고 처형했으며 사림파의 태두인 김종직은 관을 파헤쳐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 형을 내렸습니다. 이를 무오사화라합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형으로 그의 수많은 문집이 태워지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추원재




그리고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에 김종직은 다시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등지에서 배향하고 시호는 문충공입니다. 현재 김종직의 남아있는 저서로는 ‘점필재집’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으며 ‘일선지’ ‘이준록’ ‘동국여지승람’ 등을 편저했습니다.


 



























추원재 오른쪽에는 김종직의 묘가 있으며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오자 인근의 호랑이가 나타나 날마다 슬퍼하며 무덤을 지키다 죽었는데 뒷날 발견하고 김종직의 묘 옆에 묻었다합니다. 추원재와 함께 둘러보면 좋습니다. 김종직의 묘와 호랑이 무덤은 차후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종직의 묘




호랑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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