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배동 삼릉. 신라왕릉 경주 배동 삼릉과 삼릉숲 여행


경주의 배동을 삼릉이라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세 왕릉이 있는 소나무 숲을 어릴 적부터 배리숲·삼릉숲이라 불렀습니다. 

삼릉은 이름 그대로 3개의 능이 있음을 뜻합니다. 

일렬로 3개의 능이 서 있고 오른쪽에 55대 경애왕릉이 있습니다. 

이번 경주 남산을 돌면서 마지막에 삼릉을 보고 왔습니다.




경주 배동 삼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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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은 신라시대의 경주 박씨 왕릉입니다. 

신라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세왕을 모신 능입니다. 

세 왕릉은 원형의 봉분에 흙을 덮은 형태입니다. 

현재 삼릉의 주인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능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모두 비정한 상태입니다. 

먼저 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을 보겠습니다.



아달라왕의 부왕은 7대 일성왕릉입니다. 

일성왕릉 또한 인근인 경주 서남산 탑동의 해목령 아래 산기슭에 있습니다. 

아달라왕은 재위 시절 156년에 계립령(하늘재)과 2년 후에는 소백산의 죽령 길을 열었는데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백제의 침입으로 우리 백성을 잡아가자 아달라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백제는 포로로 잡아간 백성을 돌려주면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달라왕이 다스릴 때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은 포항 호미곶의 선바위에 가면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부는 아달라왕 4년인 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오랑이 해안가 바위에 올라가 해초를 열심히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우고는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연오랑을 보고는 이는 하늘이 내려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세오녀는 연오랑이 오지 않자 바다로 나갔고 바위에서 연오랑의 신발을 발견하고는 바위에 올랐습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바위는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연오랑이가 있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해안 바위에서 세오녀를 발견한 일본 주민은 놀라서 연오랑에게 아뢰었고 이들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신라에서 사라지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사라지는 암흑천지가 되었고 해를 관찰하던 일관은 이는 우리나라에 있던 해(연오랑)와 달(세오녀)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 보고했습니다.

 


아달라왕은 일본에 가서 어서 이들 부부를 데려오라고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연오랑은 “하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었는데 어찌 돌아가겠나” 하면서 돌아갈 수 없다며 그 대신 왕비인 세오녀가 짠 비단 한 필을 내어주면서 이 비단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된다고 돌려보내었습니다.

 


사신은 아달라왕에게 비단을 내어놓고 보고하였고 아달라왕이 비단을 놓고 친히 제를 올리자 예전처럼 하늘에는 해와 달이 떴다고 합니다. 

아달라왕은 신하에게 이 비단을 잘 보관할 것을 명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비단을 보관했던 창고는 귀비고라 하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 오늘날 포항시의 동해면이며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하였다 합니다.

 


지금도 흥해부터 호랑이 꼬리처럼 툭 튀어나온 호미곶 일대를 영일만이라 하며 영일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전설입니다. 

삼릉에서 제일 위의 능을 말합니다. 

신덕왕(재위 912~917)의 성은 박씨 이름은 경휘, 본명은 수종이며 헌강왕의 사위입니다. 

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낸 예겸으로 선성대왕에 추봉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겸은 의부이며 친부는 흥렴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입니다. 

두 아들은 승영과 위응이며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에 오릅니다.



당시에는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의 궁예가 쳐들어와도 방어할 힘이 없을 정도로 신라의 국력은 쇠락할 때로 쇠락했습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시신은 화장하였고 유골은 수습하여 잠현의 남쪽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가운데 능이 신덕왕입니다.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 두 번이나 도굴당했습니다. 

그 후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로 확인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무덤 내부일부벽면에 황색·백색·붉은색·군청색·감청색의 색칠을 확인했으나 벽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54대 경명왕(?~924)은 이름은 승용이며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입니다.








이때에는 경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왕건과 견훤에게 빼앗겼으며 이들이 서로 신라의 서라벌을 차지하려는 패권을 벌리는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어수선한 경주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설화가 내려옵니다. 

사천왕사 벽화에 그려진 개가 울었으며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그 벽화의 개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또한, 황룡사구층목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성안에 쫙 퍼졌다 합니다. 

이게 신라의 멸망을 암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경명왕이 죽자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 지냈다 합니다.

1971년 4월 대한민국 사적 제219호에 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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