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영해면 괴시리 목은 이색 생가터 무가정지와 목은 이색 기념관 여행


영덕군 영해에 있는 괴시마을은 조선 시대 양반 마을로 목은 선생의 외조모인 영양남씨가 1630년부터 집성촌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옛 전통을 이으며 살고 있습니다. 괴시마을의 가장 안쪽에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터인 무가정과 목은 이색 기념관이 있습니다.





목은이색기념관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41

목은이색기념관 전화:054-730-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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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며 시호는 문정입니다. 아버지인 가정 이 곡 선생과 어머니 함창김씨 사이에 1328년에 태어났습니다. 가정이곡선생은 함창 김씨 간재 김택 선생의 여식과 혼인을 해 이색 선생을 외가인 괴시리에서 낳았습니다.

 






부친 또한 고려말의 대학자였으며 목은 선생 또한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20세에 부친이 머물렀던 원나라에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하여 26세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갔습니다.


목은이색선생기념관



괴시마을의 유래 또한 선생이 중국에 머물 때 명현 구양현 박사 마을과 비슷하여 호지라 불렸던 마을을 괴시로 바꾸어 부르고부터이며 현재 선생의 생가터에는 새롭게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생가터를 알리는 빗돌만 깨어져 이곳이 무가정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색선생은 처음 숙옹부승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가 40세에 판개성부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였으며 47세에는 왕명에 영덕 출신인 나옹선사 비문을 지었습니다.

 





























58세에 벽상삼중대광검교시중에, 64세에는 벽상공신삼중대광 한산부원군 영예문 춘추관사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선생의 나이 65세 때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선생은 고려의 절의를 끝까지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목은 이색선생 생가지 무가정지



선생은 69세에 여주의 남한강 청심루 아래 연자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고려가 망하였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살고자했던 야은선생, 포은선생과 함께 고려말의 삼은으로 칭송하고있습니다




 





(진안여행/진안가볼만한곳)진안 마이산 금당사 괘불탱. 가뭄에 비를 내리게 했던 신비의 금당사 괘불탱 


진안 마이산에는 큰 가람인 금당사가 있습니다. 금당사는 814년 신라 경덕왕 13년에 혜강대사께서 세웠는데 절에는 나무부처 셋과 괘불이 있었다 합니다. 지금도 금당사의 괘불 각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그려진 괘불탱이 모셔져 있으며 괘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진안 마이산 금당사 주소: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39-1

진안 마이산 금당사 전화:063-432-4441



옛날 금당사에서 스님이 수도 정진하며 지냈습니다. 스님의 삶은 신선의 경지에 다다를 정도로 높은 도를 깨우쳤다 하여 인근 고을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해 늦은 봄 진안 고을에는 근래에 보기 드문 가뭄이 닥쳤습니다. 우물이 말라 먼지가 풀풀 날렸으며 논바닥은 쩍쩍 갈라져 농사를 짓지 못할까 싶어 마을 사람들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금당사에 도력이 높은 스님에게 애원해 보자 하였고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모두 스님에게 달려갔습니다. 스님은 정좌하며 말하기를 “기우제를 올려봅시다”하며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밤이 되자 스님은 호랑이를 불러 타고 어디론가 홀연히 가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우제준비를 끝내고 사흘을 기다리자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절 뒷마당을 가리키며 이곳에 백자 깊이만큼 구덩이를 파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웬 구덩이 하며 의아해하던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구덩이를 파내려 같습니다. 어느덧 구덩이는 백자 깊이만큼 파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마을 사람을 모아놓고 파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스님의 손에는 부처님이 그려진 괘불이 들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그려진 괘불을 절에 걸고 기우제를 올렸습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들면서 많은 비가 내렸으며 가뭄은 해갈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항상 심한 가뭄이 들면 부처님이 그려진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그때마다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는 고마운 괘불이 금당사의 괘불입니다. 금당사 괘불 각에는 현재 엄청 키가 큰 괘불이 걸려 있습니다. 괘불은 보통 절 마당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걸어두는 그림을 말하며 금당사 괘불은 가로가 4.7m, 세로가 8.7m로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상 둘레에는 좌우로 각각 10구씩 작은 보살상을 배치하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화려한 기법으로 표현한 관세음보살상을 보면서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괘불에서 관음보살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들고 있던 연꽃을 저에게 주실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세밀하게 작업 되었으며 둥근 얼굴에, 표정과 자세는 근엄과 당당함을 나타내어 괘불의 위상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당장 비가 올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 괘불은 1692년 조선 숙종 18년에 명원·허헌·치헌·위청이 함께 조성했으며 17세기 후반 불화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보기 드문 수작으로 1997년 8월에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울산여행/울산가볼만한곳)울주 반구대암각화. 봄에 좋은 여행지 국보 제285호 반구대암각화


울산에서 두 개의 국보는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입니다. 두 곳 다 대곡천의 암벽에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포스팅할 반구대암각화는 울산시민의 식수원인 사연호를 두른 암벽에 새겨져 있어 항상 수량유입이 많은 여름철에는 침수하여 암각화 보존 문제가 떠나지 않는 곳입니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주소: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1


2017/04/12 - [여행] - (울산여행)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청동기시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을 만나다.

2017/03/30 - [여행] - (울산여행)영남알프스 작천정계곡. 하얀 암반과 함께 운치있는 작천정계곡과 누각

2016/11/25 - [맛집] - (울산맛집/언양맛집)원조언양옛날곰탕. 겨울철 보양식인 나주곰탕식 소머리곰탕이 맛있는 원조언양옛날곰탕.




특히 거북이가 엎드린 모습을 한 반구대와는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분이 있습니다. 고려말 충신이자 삼은 중 한 분인 포은 정몽주 선생입니다. 포은선생은 선죽교, 이성계, 이방원 등 조선의 건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절의와 일사이군의 상징적인 분입니다.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명나라는 배격하고 원나라와 친한 ‘친원배명’의 외교 정책을 반대하여 1년 정도 이곳에서 귀양살이했습니다. 또한, 반구대 바위에 올라 .‘중양절감회‘란 시를 남겼으며 정몽주와의 인연으로 반구대를 포은대라고도 하는 이유입니다.


반구대풍경


현재 이곳에는 포은선생을 기리는 반고서원과 집청정, 대곡천 건너 반고서원유허비가 남아있어 포은선생의 유적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집청정은 17세기 중반에 경주최씨 운암 최신기공이 세웠습니다. 정몽주 선생이 반구대의 풍치에 반해 시를 남긴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건립한 정자로 지금은 효행을 가르치는 예절방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연로개수기

그와 함께 이웃한 반고서원도 1712년 숙종 38년에 건립하여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지역유림에 의해 1885년 ’포은대영모비‘ 1890년 ’포은대실록비‘. 1901년 ’반고서원유허비실기'의 비석을 세우고 사인 댐에 의해 수몰되었던 반고서원은 1965년 현 위치에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로 향하다 보면 옛길을 뜻하는 연로 개수기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 훼손된 글자가 많아 전체 내용을 해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순치 12년의 연호가 있어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인 1655년 숙종 조에도 이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포은선생도 유배 시절에 이 길을 거닐었을 것 같습니다.




연로는 벼루를 만드는 돌이 있는 길로 ’벼루길‘을 뜻하는 게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계곡에 걸린 덱길을 지나면 하늘을 찌를 듯 키가 큰 짙은 녹색의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었습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맞기며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사각사각 댓잎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희미했던 정신이 갑자기 상쾌해지며 맑아졌습니다. 이래서 예전 선비는 절의를 상징하는 사군자에 대나무를 넣고 더욱 가까이 했나 봅니다대곡천 언저리의 암반에 공룡발자국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내려갔습니다.



울주 대곡리 공룡발자국화석











울주 대곡리 공룡발자국화석으로 약 1억 년 전인 전기 백악기의 공룡발자국 화석입니다. 곧 반구대 암각화를 만나는 전망대입니다. 계곡 건너편에 있어 제법 먼 거리이며 그냥은 확인할 수 없고 전망대에 고정된 망원경으로 보고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귀담아 들어야만 확인 가능합니다.






반구대암각화



높이가 대략 3m, 넓이는 6.5m 크기에 빽빽하게 300여 점의 그림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고래, 물개, 바다거북, 사슴, 멧돼지, 개 등을 새겨놓았습니다. 지금도 고래하면 울산방어진을 먼저 떠올리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문양을 보면서 울산이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연호 때문에 여름 장마철에는 물에 잠겨 있다가 11월이 지나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우리 문화재의 보호를 위해서 빠른 대책이 시급합니다. 울산 반구대암각화는 국보 제285호입니다. 암각화의 사진은 스마트폰을 줌으로 당기고 망원경의 눈을 붙이는 곳에 스마트폰을 밀착시켜 담았습니다. 불친님들도 혹 반구대암각화로 가면 따라 해보세요.





 반구대 암각화 문양



2015년 3월 28일 반구대 암가화 대곡천 봄풍경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우째 이런마을이 공동묘지에 들어선 비석문화마을 여행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 서구 아미동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아니 벌써 나왔을지도 모를 공동묘지 마을인 비석 마을이 있습니다. 공동묘지 옆의 마을이겠지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공동묘지의 봉분을 대충 뭉개고 그 위에다 집을 짓고 지금까지도 사는 마을입니다.





부산시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주소: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2가 227-7


 

묘지의 주인을 말해주는 비석과 상석은 건물의 지반을 받치는 축대나 계단이 되었으며 또한 개중에는 가스통을 받치는 받침대가 되었습니다. 왜 이곳에 공동묘지가 들어섰고 또한, 공동묘지에다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모두 일본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일본인이 조성했던 공동묘지입니다. 그리고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무덤은 가져갈 수 없으니 지금의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영락공원에서 화장하여 뿌리거나 귀향 편에 가져갔습니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하늘 전망대

 

 구름도 쉬어간다는 하늘 전망대 전경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터지면서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궁둥이라도 붙일 틈이라도 보이면 우선 비바람이라도 피할 욕심에 판데기로 움막을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동묘지라고 꺼렸던 이곳도 몰려드는 피난민에 하나둘 무덤 사이에다 움막을 짓고 바닥을 고르기 위해 비석과 상석을 깔며 생활했습니다.

 

 

차츰차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룰 정도로 그 규모는 커졌으며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비석 마을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세월 속에 비석 마을의 존재는 이곳 사람들 이외에는 모두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으로 아미동 비석문화 마을이 알려졌고 지금은 근대 애환을 가진 역사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아미동 비석문화 마을은 한국의 산토리니, 마추픽추로 알려진 감천문화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을 둘러봤다면 아미동 비석 마을도 여행해보세요. 당시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집들 사이로 미로같이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었으며, 폭이 50cm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좁은 골목은 몸을 옆으로 돌려야만 겨우 빠져나가집니다.

 

일본인 무덤의 비석과 상석으로 만든 축대 

 

 

항상 어둡고 칙칙한 달동네의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비석 마을에 이제는 수시로 벽화를 교체하는 작업을 해 밝고 아름다운 마을로 탈바꿈했습니다. 비석 마을이 높은 곳에 있어 ‘구름도 쉬어간다‘는 하늘 전망대에는 ’싸이‘와 여러 캐릭터를 세워 사진 촬영장소로 최고의 인기 코스입니다.

 

 

 

 

멀리 북항과 부산항대교 등 시원한 조망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비석 마을 하늘 전망대도 만나고 부산 서구의 근대 문화 관광지 중 한곳인 비석 마을 여행을 꼭 추천합니다. 삶과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닌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로 부산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석 마을을 보면 생각도 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인 “우째, 이런 일이‘ 하며 깜짝 놀랄 여행지입니다.

 

일본인 무덤위에 들어선 집 

 

 

 

 

 

 


(부산서구여행/부산서구가볼만한곳)아미문화학습관 최민식갤러리. 가슴 먹먹한 부산 사람들의 모습 최민식갤러리에서 만나보세요.



부산광역시 서구에 속칭 달동네라 부르는 아미동 비석 마을 언저리에 아미문화학습관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가 있습니다. 1957년부터 한평생을 오직 흑백사진으로만 작품을 찍었던 분입니다. 한국동란의 아픈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950년 부산의 모습, 더 나아가 우리 부산 사람들의 참 인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았던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님의 사진전시실. 최민식 선생님을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라 부릅니다. 그분의 작품 속에서 Human(인간)이란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며 사진 한 장 한 장에 우리 부모님의 모습인 억척같은 삶과 일상을 만나게 됩니다. 왜, 우리 부모님이 처절하게 살았는지 최민식 님의 사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으며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아보세요.






2016/12/03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이태석신부 생가. 울지마 톤즈 이태석신부 생가 여행.

2016/12/11 - [산행] - (부산여행)부산서구 천마산 산행. 부산 최고 조망 산행지 중 한곳 남부민동 천마산 원점산행

2016/11/01 - [여행] - (부산여행)옛 부산미문화원 건물이 부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시 수탈현장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부산지점 건물이 부산근대역사관.

2017/02/08 - [여행] - (부산여행)감천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에서 사진찍기 인증 포인트 바로 여기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아미문화학습관 주소:부산광역시 서구 천마산로 410호

최민식갤러리(아미문화학습관) 전화:051-240-4495~6

최민식갤러리 운영시간:평일 오전10시~오후7시(단 주말은 오후 5시까지)

갤러리 월요일 휴무

대중교통편: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이나 자갈치역하차. 토성역에소는 부산대학병원 응급병동 앞 정류장, 자갈치역에서는 서구청 앞 마을버스 1,2,3를 이용 아미골 공영주차장 하차.

 































(울산여행/울산가볼만한곳)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청동기시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을 만나다. 


울산광역시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가 단 두 점 있습니다. 그 국보는 모두 울주군에 있으며 이는 선사시대 암각화입니다. 암각화 하면 바위 면에 그림이나 글씨 등 기하학적으로 표현해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우주군에는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암각화입니다. 이번 포스트는 국보 제147호인 천전리 각석입니다.





천전리각석 주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2



일단 천전리 마을에 있어 ‘천전리 각석’이라 부르며 1970년 12월에 처음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1973년 5월에 학계의 지대한 관심속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에 등재되었습니다.





천전리 각석의 넓이는 9.5m이며 높이는 2.5m의 길이가 긴 사각바위로 앞으로 15도 정도 넘어질 듯 기울어져 있으며 경사진 바위에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천전리 각석 앞으로는 대곡천이 흐릅니다. 주위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했던 여러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천변의 바위는 중생대 백악기의 암석이며 퇴적암이 굳어진 사암이라 물살과 충격에 쉽게 씻겨나가거나 깨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은 돌을 뾰쪽하게 하여 바위에 홈을 낸다든지 두드려서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와 추상적인 형태의 그림 등 기하학적인 무늬를 천전리 각석에 표현했습니다.

 




천전리 각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하학적인 그림은 물론이고 동물과 어류 문양, 인물, 그림과 글씨도 나타나며 기마행렬도 등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신라 시대까지의 생활상이 나타나는 우리에게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고마운 자료들입니다.



아쉬운 점은 천전리 각석은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현재 접근을 막는 안전시설물만 세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기하학무늬인 둥근 무늬, 우렁 무늬, 마름모꼴 무늬, 굽은 무늬, 가지 무늬 이외에도 사슴, 호랑이, 파충류, 물고기, 서 있는 사람과 얼굴상 등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대로 표현한 형태로 이는 청동기시대의 동경이나 동검 같은 유물에 나타낸 문양과 고인돌의 덮게 돌에 새겨놓은 암각화와 유사해 청동기시대 암각화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여러 암각화는 농경문화를 이룸으로써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형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천전리 각석에는 신라 시대 때의 기록이 남은 특이한 경우인데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사용해 새긴 가는 선, 사람의 옷차림, 용 그림, 돛을 단 배. 말들이 행렬하는 모습 등과 신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525년인 을사년에 대곡천에 놀러 와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를 을사명이라 하며 그 내용을 보면

“을사년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는 골짜기였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쓰고서 이하에는 서석곡이라 이름하고 글자를 지었다. 함께 논 벗은 매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영랑님이다.“



또한, 539년인 기미년에 사부지 갈문왕의 부인인 지몰시혜가 남편인 사부지 갈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진흥왕을 데리고 남편의 흔적을 찾아왔다는 내용도 각석에 남아 있습니다. 기미명의 내용은 “지난 을사년 6월18일 새벽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과 매인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 8사년이 지나갔다. 매왕을생각하니 매왕은 죽은 사람이다. 정사년(537)에는 왕(사부지)이 죽었다.그 왕비인 지몰시혜비가 (사부지)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셔기미년 7월3일 (갈문)왕과 매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이때 함께 셋이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자인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이곳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암각화는 현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천전리 각석이 있는 대곡천 건너편 암반에는 약 1억 년 전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초식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 등의 중대형 공룡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200여 개 발견되었으며 현재 둥근 홈이 팬 게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최부자집 경주최씨고택 여행. 경주에서 가장 뜨는 여행지 경주최씨고택.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아주 돈 많은 부자를 이야기할 때는 경주 최부잣집이란 말을 종종 듣고 자랐습니다. 제 고향이 경주이기도 하지만 400년 12대 동안 만석군 집안에 9진사를 배출해서 그 명성이 더욱 유명했나 봅니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경주 최부자집을 이제 5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찾아보았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 주소:경상북도경주시 교동 69

 

경주 최 부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의 지명은 주변에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 신문왕 2년인 68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로 그 시대는 달라도 교육기관으로서 계속 명맥이 이어와 현재에도 경주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경주 최씨 고택의 건립연대는 1700년쯤이며 처음 집을 지을 당시에 인근 향교인 유림의 반대에 부딪혀 향교의 뜻을 적극 수용해 향교보다 두 단 낮게 건물의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졸하며 아담한게 단아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원래 경주최씨는 최진립 장군의 사당이 있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조선 중기 무렵 이곳 교동에 옮겨와 정착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원형을 잘 보여주며 초창기에는 99칸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 발생한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불타 주춧돌만 남았는데 2006년에 큰 사랑채를 복원했으며 작은 사랑채는 아직 복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에는 항상 문객들로 들끓었으며 흉년에는 굶주린 백성에게 곳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과 함께 더욱 유명한 게 경주 교동법주입니다. 교동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에 지정되었으며 경주 최부자 집에만 내려오는 가양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최초로 빚었던 술로 교동법주는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최적기는 9월에서 그다음 해 4월까지이며 밑술에는 밀 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을 넣어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야 교동법주가 된다고 합니다. 완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하며 미황색에 교동 술만의 그윽한 향기와 맛을 가진 우리 전통주입니다. 현재 최국선의 10세손인 최경이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동법주 건물 옆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며 경주최씨 종가로 월성의 남천 변에 자리한 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사랑채는 다시 복원했으며 ‘一’의 대문채와 안채는 ‘ㅁ’자 모양입니다.

 

2006년 복원한 큰사랑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수수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높이 또한 낮아 그저 평범한 모습입니다. 현재에는 복원한 큰 사랑채이지만 화재이전의 구한말에는 의병장이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선생, 스웨덴의 구스타프 당시 왕세자와 의친왕 이강 공 등이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주춧돌만 남은 작은사랑채 터

 

 

 

 

작은 사랑채는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집을 지을 당시 반월성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받침돌 옮겨와 지었다 합니다. 또 한 곳은 곳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재 곳간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창고로 700~800석의 쌀을 보관했던 경주최씨 고택의 부를 상징했던 곳입니다.

 

 

 

 

여성들이 거주했던 안채는 8채였다지만 현재는 3채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의 12대 만석꾼이자 독립유공자 최준선생을 아시는지요?? 영남대학교 하면 가장 많이 회자하는 분으로 독립운동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문화교육사업에 만석의 전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최준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벌리다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백산 안희재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는 경주에 흩어져 있는 신라문화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고 영남대학교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해 나라를 이끌 동량을 키워내는데 일조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과 그 공적을 인정해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는 코스로 경주 최부집인 경주 최씨고택입니다. 주위로 경주향교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께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요석궁 전설 등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울산여행/울산가볼만한곳)영남알프스 작천정계곡. 하얀 암반과 함께 운치있는 작천정계곡과 누각


울산시 울주군 상동면에는 작천정계곡이 있습니다. 영남알프스의 준봉인 간월산과 신불산에서 흘리내린 계곡물이 바위와 땅을 헤집고 빚어놓은 곳이 작천정계곡입니다. 작천정계곡이라하고 더러는 작괘천으로도 불리며 오래전부터 이곳에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산천을 노래하며 시상을 나누었습니다.





작천정계곡 주소: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작천정계곡 전화:052-229-3856


2016/11/25 - [맛집] - (울산맛집/언양맛집)원조언양옛날곰탕. 겨울철 보양식인 나주곰탕식 소머리곰탕이 맛있는 원조언양옛날곰탕.



 

고려말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물 맑고 공기 좋고 경치까지 좋은 이곳에 유배와 책을 읽으며 지냈다 합니다. 현재 이곳 바위에는 포은선생을 추모해 ‘모은대’의 글귀를 새겨놓았습니다.

 

 

 

 

 

 

작천정의 암반은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같이 하얀색의 암반이 온통 계곡을 뒤덮었는데 몇 해 전 수해로 작천정 상부에 잡석이 쏟아져 내려 작천정계곡의 아름다움을 많이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복원하지 않아 작천정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 매우 안타깝습니다.

 

 

 

 

 

 

현재에도 많은 자갈로 인해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작천정의 암반과 계류는 여름 휴가철 도심을 탈출하는 저에게는 아주 좋은 물 놀이터입니다. 차디찬 계곡물이 흐르면서 억겁의 세월 동안 암반을 패어 바위는 길게 아름다운 홈을 만들어 마치 승천하는 용을 닮은 듯 꾸불꾸불합니다.

 

 

그 아래에 움푹움푹 패인 홈은 흡사 둥근 호박모형을 하고 이 모양이 술잔을 닮았다 하여 작괘천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파여진 홈이 여자의 중요 부분을 닮았다 하며 오묘한 자연의 신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산경명수인 곳에 정자가 없을 수 있는지 이곳에도 작천정의 정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2층 누각은 2005년 건립하였습니다. 1894년인 고종 31년에 언양 현감인 정긍조가 작천정의 아름다움을 보고 1895년 봄에 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시회도중 이곳에 정각 짓기를 주청하였고 1899년 새롭게 부임한 최시명 현감에 의해 1900년 가을에 작천정 계곡의정각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에 완공했습니다.

 

 

지금의 정각은 당시 모습은 아니지만 하얀암반에 그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정말 잘 어울립니다.

  

 

 

 

 

 

 

 

 

 

 

 

 

 

 

(구례여행/구례가볼만한곳)구례 산수유시목지. 우리나라 산수유나무 원조인 산동면 산수유시목.


산수유 하면 유명한 곳이 구례 산동면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산수유꽃축제로 전국에서 관광객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님들이 몰려들어 사진 포인트에는 진사님들로 장사진을 연출합니다.





구례 산수유시목지 주소: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199-4


 

매년 반복하는 연례행사지만 노란 산수유꽃과 함께 지리산은 정말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내내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올해에도 매년 열리는 산수유 축제날보다 한주 빠르게 산동면의 산수유시목지를 찾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수유시목이 있는 계척마을 뒷산인 견두산 산행을 하고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현천마을로 향하던 길에 우리나라 최초 산수유나무라는 타이틀이 붙은 산수유나무를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조금 일렀는지 성급한 산수유꽃망울만 일부 피었고 이제 팝콘 터트리듯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 했습니다.

 

 

집에 산수유나무가 한그루 있으면 한 아이는 대학까지는 물론이고 시집·장가까지 책임질 정도로 산수유나무는 집안의 대들보이자 귀한 존재로 지금도 산수유 마을로 유명한 구례군 산동면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똑똑한 놈 하나만 있으면 된다 했는데 옛날 말 하나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산수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산수유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합니다. 그럼 우리나라에 산수유가 언제 건너왔으며 계척마을의 산수유시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에 중국산동성의 처녀가 지금의 구례군 산동면으로 시집오면서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가져와 심었다 합니다. 그게 우리나라 산수유나무의 시목이며 전국의 산수유나무도 모두 계척마을의 산수유나무 후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구례군의 산동면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달전마을에는 할아버지 산수유나무가 있으며 계척마을의 산수유 시목은 할머니 나무라 하여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산수유나무에 비해 밑둥치가 엄청 굵은게 정말 오래된 듯 보입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감천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에서 사진찍기 인증 포인트 바로 여기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감천문화마을 하면 다 아십니다. 요즘은 삼천만의 관광지라 해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주말이고 평일이고 할 것 없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부산의 새로운 관광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은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 천마산과 옥녀봉 사이의 반달고개에 자리 잡았습니다.






감천문화마을 주소: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 10-63

감천문화마을 안내센터 전화:051-204-1444

 


 

 

 

지금이야 감천2동으로 불리지만 옛 지명은 감내라 하여 물이 아주 달고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곳에 태극도 마을이 들어서게 된 유래를 보면 6·25 한국전쟁으로 충청도 등 전국의 태극도 신도들이 부산 중구 보수동에서 피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모두 이곳에 집단 이주하여 산비탈을 깎아내고 1천여 가구의 주택과 자급자족을 위한 밭뙈기를 만들어 거주한 데서 태극도 마을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을을 형성하면서 무작빼기로 집을 지었던 게 아니라 구획정리를 먼저 하면서 집터와 경작지 소방도로 등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마을 가운데에다 태극도 본부를 두고 좌우로 총 9개 구역으로 나누고 산비탈을 계단으로 깎아낸 뒤 집을 지었으며 모두 똑같은 형태의 공동 주택이었습니다. 똑같은 집들이 일렬로 늘어선 게 기차가 연결된 것 같아 요즘 보면 꼭 작은 집 모양인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았다 합니다.


 

 

 

지금도 당시 형태의 주택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주택에서 눈여겨볼 점은 아랫집이 윗집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시의 전기사정과 밀접합니다. 모든 주택은 햇볕인 자연채광을 막지 않으려는 조처입니다. 지금처럼 전기를 펑펑 사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 최대한 자연채광을 이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화선 역할을 하도록 폭이 6m인 수직계단을 3개소 만들었는데 이는 모든 집이 판자로 짓다 보니 혹시 모를 화재에 의한 방지책이며 지금도 그당시 오르내리던 계단은 다소 좁아졌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처음 지어졌던 판잣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80년대에 와서는 패널과 슬래브지붕으로 탈바꿈하면서 감천문화마을도 세태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당시 골목 형태와 건물의 구조 등이 그대로 남은 곳도 있어 감천동의 감내마을이 문화마을로 불리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래전에 감천동의 감내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 어르신으로부터 태극도 마을의 여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한창 호황일 때 이곳에서 생활하던 주민들도 모두 공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합니다.


 

 

 

지금은 부산 서구청 앞과 사하구 괴정 로터리에서 감천문화마을까지 마을버스가 수시로 다니지만 그때에는 도로가 뚫려있지 않아 반달고개~까치고개를 지나 대티고개에서 사상공단으로 출퇴근했으며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합니다.


 

 

 

현재 감천문화마을에는 태극도 신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 떠나고 몇 남지 않으며 거의 모두 다 경기가 호황이었던 시절에 호구지책으로 무작정 고향을 떠나 상경하여 숙식해결을 위해 들어왔던 분들이 이제 대부분이라 합니다.


 

 

 

 

 

 

저는 이런 골목길을 좋아해서 감천문화마을 이전부터 여러 번 찾았습니다. 평화롭기만 하던 산골 마을이 어느 순간 감천문화마을로 바뀌면서 관광객이 하나둘 찾아오고 급기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부산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으며 한국관광 100선에도 2회 연속 올랐다 합니다.


 

 

 

1년에 서너 번은 감천문화마을을 꼭꼭 찾게 되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자꾸만 들어서고 기존의 집들은 헐려지고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감천문화마을과 현재의 감천문화마을을 보면서 벌써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의 실제 주민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데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너무 심하게 상업화에 치우쳐져 감천문화마을의 모습이 없어지는게 아닌지, 또한, 생기는 건물은 모두 먹자판 전문 상가로 변질되어 옛날 태극도 마을의 모습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감천문화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진 포인트는 역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로 나인주 작가의 작품입니다. 작가는 “별을 떠나 지구로 온 어린 왕자는 사막여우를 만나 긴 여행을 하다가 공간을 뛰어넘어 감천문화마을로 왔는데 여행 중 잠시 난간에 걸터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곳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는 연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으며 감천문화마을의 가장 중요한 사진찍기 인증 포인트입니다. 그 때문인지 항상 이곳에는 수십 명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에서는 매년 작품이 업데이트되는데 이번에도 지난번에 왔을 때 보지 못했던 작품이 여러 편 있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자꾸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장여행/기장가볼만한곳)기장 오랑대 출사. 다섯친구의 우정을 기린다는 기장군 연화리 오랑대 출사 여행


초보 사진사 일출 출사 두 번째 도전기입니다. 내 고장인 부산은 삼면이 바다로 감싸고 있어 사실 일출 포인트가 모두 일 정도로 전부 일출 사진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초보 사진사의 좁은 식견으로 생각하는 일출 촬영지는 기장의 오랑대와 용궁사, 그리고 드림성당, 송정해수욕장, 해운대해수욕장, 이기대 송도해수욕장, 다대포 등등 정말 많아서 다 열거를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기장 오랑대 주소: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해광사 뒤 오랑대공원

기장 오랑대 전화:051-749-5705



 

 

 

초보가 보는 일출 포인트와 전문 진사님이 보는 출사지는 다를 것 같은데 초보인 제 시안이 매우 좁아 주요 촬영 포인트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두 번째 일출 출사지로 찾았던 곳은 기장군 연화리 오랑대입니다. 오랑대는 돌출된 암초에 용왕전인지 해신당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바다의 신을 모시는 것 많은 틀림없는 독특한 건물이 바다와 암초와 그리고 일출과 파도가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많은 진사님을 끌어 모으는 출사지입니다.


 

 

 

그리고 항상 파도가 출렁거려 암초 위에 세워진 용왕전을 덮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장면도 만날 수 있는 전율 넘치는 출사지로 인터넷에 여러 사진이 올라와 있어 출사를 나갔습니다. 오랑대는 출사 이외에도 여러 번 찾았습니다. 일출 출사를 위해서는 이번에 처음 찾았는데 사위는 어슴푸레한데도 벌써 많은 진사님이 저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자리 잡으려고 들어갔는데 파도와 함께한 일출이 보기가 정말 좋아 보였기에 바닷가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간 렌즈가 70~200이라 용신당 건물만 큼지막하게 나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멀찌막하게 주차장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 통수가 없었습니다.


 

 

 

 

 

 

대충 자리를 잡고 일출을 기다렸는데 강정항 출사와 마찬가지로 오랑대도 구름층이 해수면을 뒤덮은 게 초보인 저로서는 오늘 일출사진도 꽝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초보의 한계라 해야 하나요. 흔히 해가 중천에 떴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오늘 오랑대 일출은 구름 속을 뚫으면서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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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오랑대 주위를 구경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여러장 담았습니다. 오랑대의 유래를 보면 옛날에 기장에 유배를 왔던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 선비를 위로하러 다섯 친구가 선비를 찾았는데 이곳의 절경에 흠뻑 취해 음주·가무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읊으며 즐겼다 하여 다섯 낭(郎)도의 끈끈한 우정을 기려 오랑대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오랑대는 꼭 사진을 찍는 출사지가 아니라 부산의 해안 둘레길인 갈맷길이 이곳을 지나갑니다. 오랑대와 용궁사를 잇는 해안 둘레길도 걸어보고 용왕전과 동해의 아름다운 해안인 최고의 절경지로 여행 삼아 한 번쯤 찾아보는 것도 정말 좋습니다.


 

 

 

기장군 연화리 오랑대 사진으로 구경하기 


 

 

 

 

 

 

 

 

 

 

 

 

 

 

 

 

 

 

 

 

 

 

 

 

 

 

 

 

 

 

 

 

 

 

 

 

 

 

 

 

 

 

 

 

 

 

 

 

 

 

 

 

 

 

 

 

 

 

 

 

 

 

 

 

 

 

 

 

 

 

 

 

 

 

 

 

 

 

 

 

 

 

 

 

 

 

 

 

 

 

 

 

 

 

 

 

 

 

 

 

 









 

(야생화/복수초)복수초. 2017년 겨울 추위를 녹이는 황금색 복수초가 꽃을 폈습니다.


지난주에 집 뒤에서 우연히 매화를 만나고 해서 혹 주말에 찾았던 나의 복수초 군락지. 우리나라 육지에서 자연산 야생화로 가장 빨리 핀다는 부산 모처의 복수초 군락지를 “설마, 폈을까?” 의심을 하며 집에서 뒹굴뒹굴 하다 허탕 쳐도 억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번 찾아갔습니다.







복수초 군락지를 오르는 길은 아직도 칼바람이 모질게 불었습니다. 요 며칠 동안 계속 부산도 엄동설한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수온주를 영하로 끌어내리는 강추위입니다. 군락지에 도착하니 어디서 두드려 맞았는지 초록색은 사라지고 피멍이 들어 짙은 색으로 바뀐 마삭줄만 횅한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봐도 복수초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폈다면 황금색의 복수초 꽃잎이 금방 눈에 띌 텐데 두 눈을 씻고 봐도 복수초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 갈까?” 하며 아쉽지만 한 번만 더 찬찬히 눈으로 둘러봤는데 덤불에 몸을 바짝 엎드린 복수초가 특유의 황금색 꽃잎을 드러내 “나 여기 있다”하는 듯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복수초가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사람이 다닌 길만 밟으며 접근했습니다. 그 근방으로 3~4개의 복수초가 피었으며 벌써 성질 급한 놈은 꽃잎이 떨어진 것도 보였습니다. 아직은 겨울잠을 자고 있을 복수초를 생각하며 사진 몇 장을 담고 조심하면서 철수했습니다.








복수초는 겨울철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서 그런지 우리에게 복과 행운을 주는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복수초의 복(福)자가 복복자 인가 봅니다. 우리도 황금을 좋아하지만, 중국사람은 특히 누런 황금색을 좋아해서 복수초를 더욱 좋아한다고 합니다. 중국사람답게 크게 잎을 벌린 게 꼭 술잔과 같다 하여 금잔화라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복수초는 얼음을 녹이며 핀다 하여 얼음새꽃이라고도 하며 야생화를 전문으로 담는 진사는 설중복수초를 찍기 위해 눈 내린 설원을 헤매며 다니기도 합니다. 그때면 어김없이 황금색의 복수초는 눈을 녹이며 설원에 피어있습니다. 이래서 복수초는 더욱 고귀한가 봅니다. 올해에도 복수초를 만나고 왔습니다. 설원의 복수초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하고 귀한 꽃입니다. 2017년 정유년에도 모두 행운과 복된 나날 되세요.



































(영덕여행)삼사해상공원 오션뷰호텔. 영덕에서 일출 조망하기 좋은 삼사해상공원 오션뷰호텔 숙박


영덕 여행에서 대가족이나 단체여행객이 묵고 할 수 있는 곳이 없나 하여 숙박지 검색을 했습니다. 모든 게 펜션만 검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이한 곳이 있었습니다. 영덕 삼사해상공원의 오션뷰호텔인데 306호실이 호텔이면서도 펜션과 똑같은 시설이 된 독립식 주거 형태였습니다.







영덕 삼사해상공원 오션뷰호텔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134-18


영덕 삼사해상공원 오션뷰호텔 예약전화:054-732-0700



2017/01/02 - [여행] - (영덕여행)영덕해맞이공원. 해돋이 명소 영덕 해맞이공원 여행.


2016/12/22 - [여행] - 영덕해맞이공원 창포말등대





응접실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조망이 참 좋습니다.




 


방 2개와 화장실 2개. 소파가 있는 응접실, 식기와 식탁 시설을 갖춘 주방까지 모든 게 펜션과 같으며 우리 일행 7명이 사용하기에 정말 넉넉했습니다. 2인용 침대 2개와 여분의 이불까지 비치되었고 7명으로 예약했다며 1인의 이불을 추가 요청해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큰화장실




큰방


삼사해상공원은 모두 다 아시는 것처럼 영덕에 들어서면 입구에 자리 잡아 동해 7번 국도를 따라 여행하는 분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덕 일출 포인트 중 해맞이공원과 함께 베스트 장소로 꼽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삼사해상공원은 볼거리도 많아 우리가 영덕여행지의 숙박지로 선택했던 이유입니다.




큰방에 딸링 화장실







작은방



 


삼사해상공원의 오션뷰호텔 주위에 숙박시설 등 다른 인프라구축이 잘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 등을 갖추어 정말 편리했습니다. 또한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로서 인근의 강구항과 지척으로 연결되어 강구항에서의 여행도 참 편리했습니다.

 



작은방에서 밖을 본 모습




복도 모습


306호실 앞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





영덕대게로 유명한 강구항에서 영덕대게로 저녁을 먹고 차로 5분 내에 돌아오는 거리이며 아침에 붉게 타오를 듯이 수면을 박차며 오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올 한해의 행운을 왕창 빌어 보았습니다. 


 



 


호텔현관







 

 

 




 


삼사해상공원 이모저모




베란다에서 본 바깥풍경.



다음날 아침 밖에서 만난 일출




삼사해상공원의 이모저모



경북대종 종각 

 

 

 바다의 빛 조형물

 


(청도여행/청도가볼만한곳)삼족대. 동창천변 그림같은 풍광과 어울리는 삼족당 김대유공의 삼족대 여행.  


청도군 매전면을 가로질러 문복산에서 발원한 동창천이 흘러갑니다 동창천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낙향하여 많은 정자를 세워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는데 그중에 한곳이 갓등산을 등지고 벼랑 끝에 둥지를 튼 삼족대입니다.






청도 삼족대 주소: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삼족대는 1519년 조선 중종 14년에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이 낙향하면서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했습니다. 삼족대는 삼족당 김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그는 남명 조식, 정암 조광조, 정여창 등 많은 문인과 교류했습니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천우. 부친은 직제학 김준손이며 김일손의 조카입니다. 1498년 연산군 4년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제자였던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벌어진 사초 사건이 무오사화입니다.


 

 

 

이로 인해 일손이 화를 당하자 김대유는 아버지와 함께 이일로 연유되었다하여 호남에서 유배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여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다음 해인 1507년 중종 2년에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가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겸 춘추서기관, 정언과 칠언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해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면서 관직과 과거합격이 삭탈 당하는 수모를 겪자 청도로 낙향하여 삼족대를 세웠습니다.


 

 

 

1545년 인종 원년에 현량과가 다시 복과 하자 재서용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상경 도중 발병하여 다시금 청도로 되돌아와 죽었습니다.


 

 

 

김대유 선생의 삼족당은 나이 70이 넘었으니 수(壽)가 족하며 환란에 사미시에 합격도하고 관직에도 올라 고을 살이도했으니 영화도 족하며 조석으로 술과 고기가 끊어지지 않아 이 또한 족하다 하여 세 가지가 모두 흡족하다며 삼족당이라 하였습니다.


 

 

 

 

 

 

삼족대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 건물입니다. 정자는 흙담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 일각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뒷문을 달아 선생과 똑 닮은 듯한 갓등산을 산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일자형의 건물은 방 두 칸에 부엌을 내었고 마루는 ‘ㄱ'자인 우물마루입니다. 1519년 기묘사화로 낙향하여 건립하였으며 후대를 거치면서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삼족대는 조선 후기에 다시 중수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영덕해맞이공원. 해돋이 명소 영덕 해맞이공원 여행.


영덕 해맞이공원의 창포말등대 구경을 했다면 내친김에 해맞이공원 여행을 권해봅니다. 특히 해맞이공원은 봄에는 꽃동산을 이룰 정도로 화려합니다. 몇 해 전 벚꽃이 필 무렵 찾았던 저는 그 당시 해맞이 공원 전체가 불꽃이 타오르듯 꽃잎이 날렸던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덕 해맞이공원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산 5-5

영덕 해맞이공원 전화: 054-730-7052

물론 대형 주차장과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2016/12/22 - [여행] - 영덕해맞이공원 창포말등대



 

 



지금이야 화려한 꽃도 모두 겨울동화 속에 잠자지만 동해와 끝없이 이어지는 산 물결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해맞이공원은 1997년 발생한 산불로 조성되었습니다. 죽은 땅으로 변했던 산에다 생명의 기원을 불어넣는 대대적인 국토 공원화 사업을 벌여 오늘날의 해맞이공원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영덕해맞이공원은 우리 토종 벚나무와 2만3천여 포기의 야생화가 철 따라 산길을 수놓는 다 고합니다. 그와 함께 영덕의 64km 해안을 마주하면 막혔던 속까지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게 합니다. 해맞이공원은 떠오르는 해돋이의 풍광도 장관이지만 마주하는 달빛도 장관입니다.











영덕의 달빛에 반했던 고산 윤선도는 동해 바닷가에서 휘영청 뜬 달을 마주하고 옛 동산을 그리워할 줄 몰랐다며 자신의 마음을 노래했을 정도로 해맞이공원은 해돋이인 일출과 보름달을 감상하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유배길인지 모르지만 고산 윤선도 같은 고명한 선비쯤 된다면 맑은 술과 함께 둥근달을 바라보면서 고향의 달을 생각하며 너무나 그리워 시구를 절로 읊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 건강을 위한 체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 한편에 공군에서 사용했던 여러 대의 전투기와 수송기가 퇴역하여 전시 중입니다. 한때는 대한민국의 하늘을 수호하였고 지금은 영덕해맞이공원의 메인 전시장을 지키는 비행기는 단연 최고의 인기 코스입니다. 어린이와 함께하면 더욱 좋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썩~썩~하며 드립니다. 무엇인가 음침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이는 영덕해맞이공원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로 꼭 사형장에서 망나니가 칼을 휘두를 때 내는 썩~하는 소리 같았는데 그런 섬뜩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묘했습니다.


 









ㅋㅋ 죄지은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시민인데 말입니다. 영덕해맞이공원에서 풍력발전기와 함께 썸뜩한 기분도 느끼고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를 보며 힐링의 기쁨을 만끽해보세요?








전국 2016년 12월 31일 해넘이 시간과 2017년 1월1일 해돋이 시간표(일몰 해넘이와 일출 해돋이 시간표)


 

 

 

2016년 병신년 해돋이를 보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1년 전이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밤을 넘기면 2016년 12월 31일 일력으로 마지막 한 장이 남았습니다. 이 한 장을 뜯으면 올해도 아듀!! 하며 또다시 한해가 시작되는 2017년 정유년 1월 1일 새해가 됩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맞이 해돋이 축제 행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의 복을 기원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꼬끼오?? 하며 닭띠해인 정유년을 축하하며 열립니다. 그래서 올해도 준비했습니다. 2016년 12월 31일 해넘이와 2017년 1월 1일 일출인 전국 해돋이 시간표를 정리했습니다. 2016년 12월 31일 가장 늦게 해가 지는 곳이 궁금하다고요? 그래도 묵은 장맛이 맛있다고 마지막까지 묵은해를 잡고 있는 곳이 신안 가거도입니다. 해넘이인 일몰 시간은 17시 40분으로 올해 한반도에서 가장 늦은 해넘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육지에서는 어디일까요? 진도대교가 놓였다고 육지로 가정한다면 전남 낙조 1번지 진도 세방낙조에서 17시 35분에 꼴깍하며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해넘이를 보았다면 해돋이입니다. 2017년 1월 1일 일출인 해돋이를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역시 동쪽 끝 우리 땅 독도입니다. 아침 7시 26분에 가장 빠른 해돋이를 만나고 육지에서 가장 빠른 곳은 오전 7시 31분에 울산 간절곶과 방어진에서 아침 해를 만날 수 있습니다. 1월 1일 해돋이는 동해안 쪽은 맑은 날씨이며 내륙과 서해안에는 구름이 조금 낀 대체로 맑은 날씨로 해돋이 구경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넘이 해돋이 시간표 정리 참고하여 즐거운 여행 계획하세요.




 

 

2016년 병신년 12월 31일 전국 일몰 해넘이 시간

 

 

 

인천 백령도 해넘이시간 17:32

인천 대청도 해넘이시간 17:32

인천 소청도 해넘이시간 17:32

인천 연평도 해넘이시간 17:29

식모도 민머루 해넘이시간 17:26

강화도 동막 해넘이시간 17:26

인천을 왕리 해넘이시간 17:26

인천 월미도 해넘이시간 17:25

무의도 하나개 해넘이시간 17:26

영흥도 장경리 해넘이시간 17:27

화성 전곡항 해넘이시간 17:26

 

 

 

화성 제부도 해넘이시간 17:26

화성 궁평 해넘이시간 17:26

당진 난지도 해넘이시간 17:27

당진 왜목마을 해넘이시간 17:27

서산 간월암 해넘이시간 17:29

보령 대천 해넘이시간 17:29

태안 만리포 해넘이시간 17:29

안면도 꽃지 해넘이시간 17:29

보령무 창포 해넘이시간 17:29

서천 춘장대 해넘이시간 17:29

부안 격포 해넘이시간 17:31

부안 곰소항 해넘이시간 17:30

영광 가마미 해넘이시간 17:32

무안 도리포 해넘이시간 17:33

진도 세방낙조 해넘이시간 17:35

완도 보길도 해넘이시간 17:35

 

 

 

 

신안 흑산항 해넘이시간 17:37

신안 홍도 해넘이시간 17:38

신안 가거도 해넘이시간 17:40 

해남 땅끝마을 해넘이시간17:34

제주 차귀도 해넘이시간 17:38

제주 협재 해넘이시간 17:38

성산 일출봉 해넘이시간 17:35

서귀포 마라도 해넘이시간 17:38

서귀포 강정 해넘이시간 17:37

서귀포 표선 해넘이시간17:35

서귀포 이어도 해넘이시간 17:38

독도 해넘이시간 17:05

울릉도 해넘이시간 17:08

부산 태종대 해넘이시간 17:22

부산 다대포 해넘이시간 17:22

울산 간절곶 해넘이시간 17:20

울산 대왕암공원해넘이시간  17:19

울산 방어진 해넘이시간 17:19

울산 주전몽돌 해넘이시간 17:19

경주감포 수중릉 해넘이시간 17:19

포항 호미곶 해넘이시간 17:17

 

 

 

 

포항 구룡포 해넘이시간 17:18

포항 칠포 해넘이시간 17:19

포항 화진 해넘이시간 17:18

영덕 장사해수욕장 해넘이시간 17:18

영덕 고래불해수욕장 해넘이시간 17:17

울진 망양정 해넘이시간 17:16

울진 죽변 해넘이시간 17:15

삼척 맹방 해넘이시간 17:15

동해 추암 해넘이시간 17:15

동해 망상 해넘이시간 17:15

강릉 정동진 해넘이시간 17:15

강릉 경포대 해넘이시간 17:15

강릉 주문진 해넘이시간 17:15

양양 하조대 해넘이시간 17:15

 

 

 

 

양양 낙산 해넘이시간 17:15

속초항 해넘이시간 17:15

강원도고성 백도 해넘이시간 17:15

강원도고성 송지해넘이시간 17:35

강원도고성 화진포 해넘이시간 17:15

거제 학동몽돌 해넘이시간 17:24

고흥 외나로도 해넘이시간 17:30

 

 

 

서울 해넘이시간 17:24

세종 해넘이시간 17:25

대전 해넘이시간 17:25

대구 해넘이시간 17:22

부산 해넘이시간 17:22

광주 해넘이시간 17:30

인천 해넘이시간 17:25

울산 해넘이시간 17:20 

 

2017년 정유년 1월1일 전국 일출 해돋이 시간

 

 

 

 인천백령도 해돋이 시간 07:57

인천대청도 해돋이 시간 07:57

인천소청도 해돋이 시간 07:56

인천연평도 해돋이 시간 17:52

석모두 민머루 해돋이 시간  07:50

강화도 동막 해돋이 시간  07:49

인천 을왕리 해돋이 시간 07:49

인천 월미도 해돋이 시간 07:48

무의도 하나개 해돋이 시간 07:49

영흥도 장경리 해돋이 시간 07:48

화성 전곡항 해돋이 시간 07:47

화성 제부도 해돋이 시간 07:47

화성 궁평 해돋이 시간 07:47

당진 난지도 해돋이 시간 07:48 

 

 

당진 왜목마을 해돋이 시간 07:47

서산 간월암 해돋이 시간 07:47

보령 대천 해돋이 시간 07:45

태안 만리포 해돋이 시간 07:48

안면도 꽃지 해돋이 시간 07:46

보령 무창포 해돋이 시간 07:45

서천 춘장대 해돋이 시간 07:45

부안 격포 해돋이 시간 07:44

부안 곰소항 해돋이 시간 07:43

 

 

 

 

영광가마미 해돋이 시간 07:43

무안 도리포 해돋이 시간 07:43

진도 세방낙조 해돋이 시간 07:42

완도 보길도 해돋이 시간 07:40

신안 흑산항 해돋이 시간 07:45

신안 홍도 해돋이 시간 07:46

신안 가거도 해돋이 시간 07:45

해남 땅끝마을 해돋이 시간 07:40

제주 차귀도 해돋이 시간 07:39

제주 협재 해돋이 시간 07:39

제주 성산일출봉 해돋이 시간 07:36

서귀포 마라도해돋이 시간  07:38

서귀포 강정 해돋이 시간 07:38

서귀포 표선 해돋이 시간 07:36

서귀포 이어도 해돋이 시간  07:38

 

 

 

 

독도 해돋이 시간 07:26

울릉도 해돋이 시간 07:31

부산 태종대 해돋이 시간 07:32 

부산  다대포 해돋이 시간 07:32

울산 간절곶 해돋이 시간  07:31

울산 대왕암공원 해돋이 시간 07:32

울산 방어진 해돋이 시간 07:31

울산 주전몽돌 해돋이 시간 07:32

경주감포 수중릉 해돋이 시간 07:32

포항 호미곶 해돋이 시간 07:32

포항 구룡포 해돋이 시간 07:32

포항 칠포 해돋이 시간 07:33

포항 화진 해돋이 시간 07:34

영덕 장사 해돋이 시간 07:34

영덕 고래불 해돋이 시간 07:35

 

 

 

 

 

울진 망양정 해돋이 시간 07:36

울진 죽변 해돋이 시간 07:36

삼척 맹방 해돋이 시간 07:37

동해 추암 해돋이 시간 07:38

동해 망상 해돋이 시간  07:38

강릉정동진 해돋이 시간 07:39

강릉 경포대 해돋이 시간 07:40

강릉 주문진 해돋이 시간 07:41

양양 하조대 해돋이 시간 07:41

양양 낙산 해돋이 시간 07:42

속초항 해돋이 시간 07:42

강원도고성 백도 해돋이 시간  07:43

강원도고성 송지호 해돋이 시간 07:43

강원도고성 화진포해돋이 시간  07:43

거제 학동몽돌해돋이 시간  07:33

고흥 외나로도 해돋이 시간 07:36

 

 

 

서울 해돋이 시간 07:47

세종 해돋이 시간 07:43

대전 해돋이 시간 07:42

부산 해돋이 시간 07:32

광주 해돋이 시간 07:41

인천 해돋이 시간 07:48

울산 해돋이 시간 07:36

 

 

 

 

 

가지산 해돋이 시간 07:34

내연산 해돋이 시간 07:34

두타산 해돋이 시간 07:38

보현산 해돋이 시간 07:35

설악해돋이 시간 07:43

소백산 해돋이 시간 07:39

오대산 해돋이 시간 07:41

응봉산해돋이 시간  07:37

주왕산 해돋이 시간 07:35

청량산 해돋이 시간 07:37

토함산해돋이 시간  07:32

팔공산 해돋이 시간 07:36 

 

참고:한국천문연구원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동래향교. 부산 동래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동래향교.


아주 오랜만에 동래향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8년 전쯤에 와보고 처음 오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동래향교와 현재의 향교 모습은 그리 변한 곳이 없어 보였습니다. 동래향교는 1392년인 조선 태조 1년에 처음 생긴 교육기관입니다. 당시에는 동래읍성 안쪽의 망월산 아래 현재 동래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합니다. 






동래향교 주소: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35

동래향교 전화:051-552-4160



2016/12/26 - [맛집] - (부산맛집/동래맛집)동래시장, 인정시장맛집 재진이네 아구찜. 맛있는 음식은 입이 먼저 알아요? 대구뽈구이가 맛있는 재진이네 아구찜

2016/11/15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부 동헌. 새롭게 복원한 동래부 관아 건물 동래부 동헌을 여행하다.

2016/11/05 - [여행] -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복천박물관. 가야시대 복천동 고분군 유물전시관인 복천박물관 여행 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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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 [여행] - (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복천동고분군

2016/10/12 - [여행] - (부산여행)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그러다 1812년인 순조 12년에 동래부사였던 홍성만이 지금의 장소인 명륜초등학교 옆으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을 배향하는 기능과 교육을 담당하는 국립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중등교육기관이 이에 해당합니다.











현재 동래향교도 교육을 담당했던 명륜당과 성현을 모시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륜당과 대성전을 담을 쌓아 영역을 나누었으며 내삼문을 달아 서로 통하게 했습니다. 대부분 향교는 앞쪽에는 학생들의 수업공간이며 뒤쪽에는 제향 공간인 전학후묘의 양식을 취하지만 동래향교는 명륜당 오른쪽으로 대성전이 약간 비켜나게 배치하여 일반향교와는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반화루





명륜당과 대성전은 앞면 5칸에 옆면은 2칸이며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그리고 부속건물인 동재와 서재는 앞면 3칸에 옆면 1칸인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수업하는 공간이라면 좌우 동·서재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입니다.











동래향교의 중심건물인 명륜당과 마주한 건물은 2층 누각 반화루입니다.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주심포 양식에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여 중후한 분위기와 향교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반화루의 의미는 동래향교의 교육이념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학생의 수업공간인 명륜당








 그 뜻을 보면 “성인을 따라 덕을 쌓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 ”이며 이는 나라의 동량을 기르는데 동래향교는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앞의 좌우 건물인 동무와 서무는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가르는 내삼문





건물은 동·서재 양식과 비슷하며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경국대전에는 동래향교의 학사관리에 학전 7결을 지급하였으며 종 6품의 교수 1명과 70명의 학생이 수업을 했다 합니다. 반화루 한쪽에는 동래 관헌에 부임한 부사들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를 흥학비라 부릅니다.


















제사공간이 대성전








동래부사들의 공덕비. 흥학비라 합니다.



(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영덕해맞이공원 창포말등대. 대게등대 영덕 창포말등대 여행


동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해안을 끼고 많은 공원이 조성해 있습니다. 특히 영덕군은 더욱 많은데 이는 바닷가를 끼고 길게 이어진 덕분으로 여러 개의 해안 공원이 몰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해안공원은 일출명소로서 명성이 자자하며 특히 영덕군 해맞이 공원은 단연 돋보이는 일출명소입니다.






영덕 해맞이공원 창포말등대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산 5-5









이곳에 해맞이공원이 들어섰던 계기는 조금은 특별합니다. 1997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해지역의 산불로 인해 이곳 해안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도깨비불같이 중구난방으로 날아다니든 불티로 인해 온 동해안이 불바다였을 때 창포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소나무 등 수십 년이 넘은 울울창창한 나무는 아름다움을 뽐내며 자랑하던 동해안의 절경이 한순간에 시커먼 숯덩이로 변하면서 졸지에 흉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1998년부터 국토공원화사업과 공공근로사업 등을 강구면과 축산면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해안 자연공원을 2003년에 완공하였고 오늘날의 창포리 해맞이 공원이 완공되었습니다.









창포리 해맞이공원에는 특이한 등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영덕의 주 특산물은 대게인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등대를 대게 등대로 형상화하여 만들어 이곳 해맞이공원의 이색등대로 최고 인기여행 코스가 되었습니다.















영덕여행에서 강구항의 영덕대게 먹방과 창포말등대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앙코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다며 영덕여행에서는 반드시 대게도 먹고 인근에 있는 창포말 등대 여행을 영덕사람이라면 꼭 추천합니다. 필자 또한 영덕 해맞이공원의 창포말 등대를 여러 번 찾았습니다.







이곳은 동해안을 도보로 걷는 해파랑길이 창포말등대를 거쳐 가며 영덕에서 추천하는 블루로드 1코스 마지막 지점이자 해파랑길 최고의 둘레길인 블루로드 2코스의 출발점이기도합니다. 2코스 둘레길은 축산항의 죽도산까지 아름다움 길은 이어집니다.


 






그 덕분에 이곳을 야간에도 찾아왔었는데 그때는 창포말 등대에 조명까지 들어와 바다와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한순간의 작은 실수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던 산림을 이리 아름답게 복원한 대표적인 곳인 해맞이공원의 창포말 등대이며 영덕여행에서 첫 번째 여행지로 꼭 추천합니다.















(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회상나루관광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였던 옛 횟골나루, 회상나루관광지로 복원



상주읍에서 중동면을 건너는 낙동강에는 나루가 대략 11개소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며 소통했던 나루는 지금은 낙동강을 건설된 다리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도 최근까지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상주 회상나루 관광지 주소: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759



2016/12/06 - [여행] - (상주여행)상주자전거박물관. 자전거의 원조인 클래식 자전거를 상주자전거박물관에서 만나다.





문학관


역골나루가 그러하고 횟골나루(회상나루), 강창나루, 대비나루 등 그 마을의 이름을 딴 나루터는 고향 할머니 같은 순박함과 친근함이 묻어나는듯하여 더욱 좋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강을 건너는 나루터 문화가 하나둘 사라져 지금은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은 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학전망대


그러다 이번에 상주 경천대와 비봉산의 ‘낙동강이야기길’을 걸으면서 옛 회상나루를 복원하여 회상나루관광지 조성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은 반가웠고 한편은 너무 화려함인 휘황찬란하고 겉치레에 치중하는 것을 보면서 보는 사람을 매우 안타깝게 했습니다.


 





옛것의 복원은 없는 것을 만들다 보니 새삼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만 옛 모습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회상 나루의 복원은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문외한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회상 나루는 횟골마을을 연결해서 횟골나루라 불렀습니다.



회상나루주차장


회곡진, 회동진, 회촌진으로도 불렸으며, 상산지에는 회상나루를 ‘역재중동회곡점전안통로(亦在中東淮谷店前安東通路)’라 하였으며 회곡진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상주시 도남동과 중동면 회상리를 연결하는 나루로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나루를 통해 중동면이나 풍양면에서 상주로 사람이나 물산이 움직였으며 상주에서 안동과 의성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회상 나루는 목재나 농산물의 운송 등 나루터는 번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합니다.


 







자연스럽게 나루에는 왕래하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객주촌이 생겼으며 최근인 1980년대까지 나루터에는 주막이 남아 있었던 것을 보면 한편의 영화 같은 애잔한 느낌입니다. 특히 저녁이면 붉게 물든 노을이 낙동강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객주촌




횟골나루의 도선은 뒷방구로 불렸던 바위 밑에서 목선으로 운영되었다가 뒤에는 점차 쇠퇴하여 목선은 사라지고 양쪽 강변에다 쇠줄을 연결한 철선이 사람을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마저도 이제는 경천교란 현대식 다리에 밀려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은 옛 나루의 흔적을 보여주는 옛 회상(횟골)나루터 표지석만 덩그런이 세워져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재 회상나루 관광지의 주요시설물을 보면 숙박시설인 객주촌과 여행객의 허기를 풀어 줄 주막촌, 티브이 드라마 상도 촬영세트장도 새롭게 꾸미며 회상나루 문학관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상도드라마세트장




회상나루관광시설물이 모두 완공된다면 상주에서 또 하나의 힐링을 겸한 휴식과 즐길 수 있는 문화 휴양지가 될 것 같아 큰 기대를 해봅니다.










 

 

 

 

 

 

 

 

 

 

 

 



(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김종직 생가 추원재와 김종직의 묘, 호랑이 무덤 여행.


밀양여행을 하면서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 여행을 했습니다. 추원재는 김종직의 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산인 김숙자가 결혼하고 당시 풍습인 처가 입향하여 거처를 정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짐종직 선생이 태어났고 성장하였으며 정계에 진출하였다가 낙향하여 돌아가신 곳입니다.





점필재 김종직 생가 추원재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추원재 건물은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 건물로 일(一)자 형태입니다. 정중앙에 추원재 현판이 걸렸으며 ‘도학의 의리 정신을 전하였음’을 뜻하는 전심당의 당호는 마루 왼쪽에 걸려 있습니다. 이는 정의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실천하는 도학사상으로 김종직을 따르는 제자가 많았습니다.





그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과 그의 정신을 계승한 조광조 등 걸출한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성리학의 종조로서 사림파의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받는 김종직의 생가에 어찌 보면 많은 유학자가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건물은 잦은 전란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허물어져 훼손이 심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를 따르는 사림파와 후손에 의해 181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습니다.





김종직은 죽고 난 후에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그 이유를 보면 세조가 그의 조카였던 단종을 권좌에서 몰아낸 계유정난을 비꼬았던 '조의제문'인 사초를 김인문이 성종실록에 실었습니다. 그게 알려지면서 사람파에 대한 연산군의 피의 숙청을 무오년에 일어났다 하여 이를 무오사화라합니다.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정권이 양분되었는데 점필재 김종직이 이끄는 사림파와 한명회가 이끄는 훈구파였습니다.






이들 훈구파와 사림파는 서로 정권을 나누어 가지며 자신들의 정파에 유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서도 두 정권은 서로 양립했습니다. 김종직의 사림파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새 임금을 옹위하는 왕위찬탈은 정도가 아니라고 반대하였고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당하다며 찬성하였습니다.





세조의 눈에는 당연히 자신을 지지하는 훈구파는 아주 예뻐 보인 반면에 그와 척을 둔 사림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한명회와 신숙주의 훈구파를 중심으로 정권은 움직여졌으며 사림파는 우선 내리는 소낙비는 피해 보자는 심정으로 모두 정치권에서 동떨어져 성리학인 유학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예종의 뒤를 이어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 인재 등용은 사림파에서도 이루어졌으며 또다시 훈구파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에 성종실록을 집필하자 사림파의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조의제문’의 사초를 성종실록에다 실었으며 그 내용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왕위 찬탈을 한 세조를 비꼬는 글이었습니다.


 



이에 훈구파의 이극돈과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하기를 김종직이 세조를 욕했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몰래 성종실록에 실었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은 광분하였고 김일손을 위시한 사림파를 모두 잡아들이게 하고 처형했으며 사림파의 태두인 김종직은 관을 파헤쳐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 형을 내렸습니다. 이를 무오사화라합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형으로 그의 수많은 문집이 태워지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추원재




그리고 1506년 일어난 중종반정에 김종직은 다시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등지에서 배향하고 시호는 문충공입니다. 현재 김종직의 남아있는 저서로는 ‘점필재집’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으며 ‘일선지’ ‘이준록’ ‘동국여지승람’ 등을 편저했습니다.


 



























추원재 오른쪽에는 김종직의 묘가 있으며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오자 인근의 호랑이가 나타나 날마다 슬퍼하며 무덤을 지키다 죽었는데 뒷날 발견하고 김종직의 묘 옆에 묻었다합니다. 추원재와 함께 둘러보면 좋습니다. 김종직의 묘와 호랑이 무덤은 차후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김종직의 묘




호랑이 무덤


 

 

 




(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자전거박물관. 자전거의 원조인 클래식 자전거를 상주자전거박물관에서 만나다.


상주에는 왜 자전거 도시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상주 자전거 박물관을 찾았으며 2층의 상주 자전거박물관 전시실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상설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이색자전거인 올드 자전거가 관람객의 눈길을 끌면서 전시중이었습니다. 


상주 자전거 박물관에는 현재 200여 년 된 자전거와 다양한 기능성을 갖춘 자전거 등 각양각색의 독특한 모양을 한 자전거를 만날 수 있는데 특별히 개인적으로 눈길을 끈 것은 입장하자마자 만나는 클래식 자전거입니다. 

티브이나 사진에서 초창기의 자전거라며 가끔 볼 수 있었던 앞바퀴가 엄청나게 크고 뒷바퀴는 상대적으로 작은 모양을 한 자전거 하며 그리고 자전거 다섯 대의 프레임으로 만든 5층 높이의 자전거가 천장에 닿을 기세로 웅장합니다. 이는 상주 자전거 축제 때에 자전거 퍼레이드에 등장하여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합니다. 


자전거의 골격인 프레임이 나무로 된 자전거를 상주 자전거박물관에서 처음 보면서 이런 종류의 자전거도 있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발드 마이스터는 너도밤나무의 일종인 나무로 프레임으로 만들었다는데 이는 비취목 100겹을 눌러 붙였으며 자전거의 구성인 헤드셋과 체인, 휠, 타이어와 안장 등 모두가 최첨단 소재를 적용하여 만들었다 합니다. 놀라지 마시길, 그 가격이 무려 그랜져를 능가 한다고 하여 저로서도 깜짝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티타늄 자전거가 1,000만원 넘는 것은 봤는데 말입니다. ㅎ ㅎ



자전거의 역사인 클래식을 만날 수 있는 상주 자전거 박물관 여행은 무료 관람이며 요즘 건강을 위해 많은 자전거 동호회원이 늘어 자전거에 관심이 많은데 전국 최초의 자전거 박물관에서 클래식 자전거에 관한 많은 호기심을 풀 수 있었습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 주소:경상북도 상주시 용마로 415(도남동 산3-4)

상주 자전거박물관 전화:054-534-4973


상주 자전거박물관 휴관일:매주 월요일과 1월1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시 그다음날 휴관.

상주 자전거박물관 운영시간:9시~오후 6시(입장마감 오후 5시30분)





클래식 자전거 1870년 하이 힐 자전거(오디너리)

발명자:영국의  제임스 스탈리와 윌리엄 할먼

뒷바퀴보다  훨신 큰 앞 바퀴에 구동 장치가 달려 페달을 밟아 동력을 생산했던 구조로 중심잡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랜져보다 비싼 가격의 발드 마이스터






5층 자전거








1839년 맥밀런 자전거

발명자:스코랜드의 대장장이였던 커크 패트릭 맥밀런

좌우 두개의 페달을 밟아 연결봉과 크랭크를 통해 뒷바퀴를 돌리는 형식의 자전거

 







1818년 드라이지네 

발명자:독일 프러시안군 장교였던 바른 칼 프리드리히 크리시티안  루트비히 드라이스 폰 사베르브룬

프레임에 좌우로돌릴수 있는 핸들을 장착하였고 앞 바퀴를 마음대로 움직이며 방향 조정이 가능했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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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원조, 자전거의 아버지 1790년 셀레리페르


발명자: 프랑스 귀족인 콩트 메데 드 시브락 

나무축으로 두개의 바퀴를 연결해 만든 자전거의 원조

두발로 땅을 짚다가 내리막을 만나면 아주 신나게 내려 갔을 듯합니다. ㅋ ㅋ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이태석신부 생가. 울지마 톤즈 이태석신부 생가 여행.


오늘도 종일 집에 있다가 길을 나섰습니다. 그때 시간이 오후 3시 30분이 넘었던 것 같습니다. 부산 서구 남부민동의 등대 시장에서 고 이태석 신부의 생가를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2년 만의 방문이며 종교는 다르지만 먼저 마음으로 잠시 참배를 하고 천마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태석신부 생가 주소: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611-350



 



오늘 포스팅은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의 수단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님 생가입니다. 저처럼 집이 송도 아랫길 쪽에 있다면 등대 시장에서 슬금슬금 걸어 올라가면 됩니다. 아니면 남포동에서 송도 윗길 행 버스를 타고 부산관광고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끝…….


 



여기는 샛띠고개라고도 부릅니다. 샛띠는 억새풀과 띠풀을 말하는데 아마 그 풀이 많았으며 조선 시대에는 이곳의 천마산 일대에 군마를 키웠다는 목마장이 있었습니다. 말을 키웠다면 말먹이인 풀이 많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충무동로터리 인근의 초장동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이 고개가 송도 아랫길이 매립되기 전까지 암남동으로 다니는 유일한 고개였다 합니다. 이곳에서 이태석 신부 생가는 지척이며 앞에 보이는 송도성당 밑에 생가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정표와 안내판 설치를 워낙 잘해서 생가를 별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대장암 선고를 받고 2010년 숨을 거둘 때까지 수단 톤즈 마을을 지키며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태석 신부를 수단의 슈바이처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어린 시절은 삯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님의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은 그만큼 궁핍한 생활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뛰어놀았던 송도성당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다시 신학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2001년 사제서품을 받고 그는 내전으로 피폐한 삶을 살았던 아프리카 최고 빈곤의 나라 남수단 톤즈 마을에 부임하여 선교를 겸한 의료와 교육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단의 당시 상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는데 콜레라와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 창궐하고 환자를 볼 의사는 고사하고 약도 제대로 없어 많은 사람은 죽어 나갔습니다. 남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였으며 성직자로 봉사의 삶을 살다가 2008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여 받은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0년 1월 14일 48세를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삶이지만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아주 큰 삶을 살고 가신 분입니다. 현재 남부민동에는 이태석 신부님의 생가를 복원하여 그분의 큰 뜻을 기억하는 소박하고 작은 추모관이 있습니다. 부산 서구 여행 중에 꼭 찾아볼 것을 권합니다.


































여기는 샛띠고개 짜투리 땅에다 만든 쉼터 모습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금정산 범어사 원효암, 범어사 원효암에서 원효와 의상을 만나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께서 창건했다면 금정산의 원효암은 이름 그대로 원효대사께서 창건했습니다. 이 두 분은 동년에 서로 호형호제하며 신라불교를 이끌어왔으며 원효가 있어야 의상이 있고 의상이 있어야 원효가 빛이 발하는 바늘과 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범어사 원효암 주소:부산광역시 금정구 명륜동 546

범어사 원효암 전화:051-508-4008



 

 

이곳 금정산에서는 두 분이 서로 사이좋게 절을 세웠으며 또한, 두 스님이 참선했던 범어삼기의 원효석대와 금정팔경의 의상망해도 이웃하고 있어 원효와 의상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효석대와 의상망해의 의상대는 100m의 거리를 두고 솟은 바위 전망대로 의상대는 일반인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원효석대는 기치 창검의 바위를 기단삼아  그위에다 원효의 좌선바위가 놓여 일반인은 위험해서 함부로 접근조차 하기 힘듭니다.



 

 

 

필자는 여러 번 원효암을 찾았지만, 최근에는 발길이 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원효암을 여행하면서 당시 세월의 무게가 내려 앉은 고졸한 전각은 오간데 없고 모두 새로 들어선 삐까번쩍한 건물을 보면서 느낀 점은 원효암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조용한 산사의 고느적한 예스러움이 사라진게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해발 500m 높이의 원효암은 범어사에서 대략 2~30분은 발품을 팔아야만 만나고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할 때 아마 원효대사도 미륵암과 함께 창건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다만 원효가 머물면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옵니다.



 

 

 


원효암 입구를 들어서면 키 큰 편백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울창창합니다. 그 속에 조선 시대에 세워진 종형의 부도군이 있습니다. 부도군이라 해봤자 모두 3기로 스님의 부도인  승탑입니다. 이 승탑은 모두 조선 말기에 세워졌으며 그와 마주한 곳에 원효암 동편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이며 경내에 있는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2호인 원효암 서편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건립된것으로 추정합니다. 큰 지대석 위에 현재 3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으며 탑의 형식에서 가늠해보면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가 올려졌을 것이나 지금은 기단부와 상륜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각층의 탑신부에 올려진 지붕돌인 옥개석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파손의 정도가 심한데 이는 무너졌던 석탑의 부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했으며 옥신석에는 귀기둥을, 옥개석의 중급 받침은 4단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탑신의 옥신석은 비례나 재질을 고려해 보면 뒤에 보충된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효암 삼층석탑의 전체적인 수법을 보면 10세기경의 석탑으로 추정하며 본래 위치에 재건하였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원효암 대웅전의 위치와 창건 시기 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석탑입니다.


 

 

 

 

 

 

 

 

 

원효암 서편 삼층석탑은 동편 삼층석탑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경내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동탑과 마찬가지로 이중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지대석과 하층 기단을 구성하는 하대중석과 상륜부가 남아있지 않으며 하대갑석 위에 상층기단과 3층의 탑신부만 현재 남아 있습니다.


 

 

 

 

 

 

 

 

 

하대갑석의 두 판은 판석으로, 뒷면의 상대중석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돌로 구성되는데 이는 다른 석탑의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각각의 옥개석은 3단의 층급 받침에 옥신석에는 귀기둥을 조각했습니다. 그리고 서편 삼층 옆에는 또 다른 부도가 있습니다. 주석하고 있는 스님께 승탑의 주인을 물었더니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원효석대



 

 

 

 

 

의상대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금정산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 주변의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금정산성 북문 여행.


금정산성은 산성의 길이가 대략 18.8km이며 성벽의 높이는 1.4m~2.6m로 우리나라 산성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금정산성의 위치는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의 전 능선을 아우르는 규모입니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금정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군사적 요충지에다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세워졌습니다. 이는 바다 건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으며 이 산성이 언제부터 처음 쌓아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다와 가깝고 왜구의 침략이 잦아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쌓은 산성이며 또한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보니 신라 시대 때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습니다.






금정산성 북문 주소: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13







그리고 문헌상의 금정산성은 1703년인 숙종 29년에 쌓은 산성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경험한 후 항상 왜구를 견제한 것은 사실이며 이에 조정은 1667년 현종 8년에 통제사 이지형을 조정에 불러드려 왜구의 침략을 대비한 방어계책에 금정산성을 언급한 것으로 보면 두 전란에도 금정산성은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02년 금정산성을 쌓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고쳐 쌓았는지 새로 축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상감사 조태동에 의해 성을 쌓아 그 이듬해 완공하였습니다.


 



그 후에 성의 규모가 너무 크고 넓어 1707년인 숙종 33년에 산성을 남·북 두 구역으로 가르는 중성을 쌓고 장대와 군기고 등을 설치했습니다. 금정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책임졌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등 여러 직책을 가진 군병과 상비군 및 주변 사찰의 승려가 평상시에 근무했으며 그리고 혹시 모를 전란과 유급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등의 소속군사와 3개 읍 소재 사찰의 승려를 차출하여 편재를 갖추어 방어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허망하게도 국권침탈에 의한 일제강점기에 산성 내의 관아 건물은 모두 몰수당하는 등 성곽은 파괴되어졌습니다.


 



산성의 보수는 사적 제215호로 지정하면서 1972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성곽과 성문, 망루 등을 현재까지 정비 보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금정산성에는 동서남북 사대문이 모두 복원되어 있으며 이번 금정산성 여행에서 주변지형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북문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금정산성 북문은 4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1703년 숙종 29년에 금정산성을 축조하면서 그때 함께 북문을 설치했다 합니다. 또한, 1828년인 순조 24년에 금정산성 북문에 지금과 같은 문루를 세우고 수비군을 배치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때는 성문을 세우기 위해 엄청나게 큰 돌을 쌓은 성벽에 성문만 있고 문루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금정산성 북문은 허물어져 석축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86년 지금의 모습으로 문루를 복원하였고 그 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금정산성 북문의 건축 양식은 앞·뒷면이 모두 평거식이며 홑처마 우진각 지붕에 1층은 성문인 출입문 위에 만든 문루입니다. 문루는 앞면 1칸에 옆면 1칸 규모이며 이를 받치는 성문의 규모는 폭이 250cm이며 양쪽 벽면의 길이는 약 350cm로 큰 화강암으로 벽체와 기둥을 쌓았습니다.


  






성문 위에는 몸을 숨기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인 성가퀴를 설치하였는데 금정산성 북문은 필자가 볼 때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을 잇는 산성이며 문루와 성벽의 규모를 보면 정말 잘 어울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연일 많은 산행객으로 붐비는 금정산 북문 여행 꼭 추천해 봅니다.






(서울여행/서울가볼만한곳)양화진공원과 양화진외국인선교묘원. 양화진공원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다. 


한강의 여러 나루 중 하나인 양화진은 조선 시대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지로 1754년 영조 30년에 군 진을 설치하였습니다. 양화진 나루는 한강의 여러 나루와 다르게 어영청 소속으로 군사 100명과 배 10척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조선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대가 양화진까지 들어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의 천주교인을 처형했습니다.






양화진 성지 공원주소: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39-21



 















이곳은 양화진(楊花鎭)의 옛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조선 시대로 이어오면서 이곳 일대는 국방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1754년(영조 30)에는 한강 수로의 경비로 수도를 방어하는 군 진을 설치하여 상비군이 주둔하였습니다. 현재는 양화진 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대석을 설치하여 군 진 옛터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잠두산으로 불렸던 이곳이 절두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많은 서양선교사가 본격적으로 들어와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1890년 미국인 의료선교사 헤론이 숨지자 미 공사관은 조영 통상수호조약에 따라 조선조정에다 묘지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내주었습니다.


 





















이후부터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들어섰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복음화와 근대화에 진력했던 선교사와 그 가족묘가 조성되었습니다. 이웃한 절두산 성지는 1866년 프랑스 군대가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천주교도들이 도움을 주었다 하여 대원군은 더욱 천주교도에게 박해를 가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천주교도의 수급을 베어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졌던 곳입니다. 많은 천주교인의 순교가 있었던 성지입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해는 527년인 법흥왕 때입니다. 신라는 당시 귀족세력의 권력이 강해 왕이라 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였으며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고 박이차돈은 그런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제안을 합니다. ‘신라에 불교가 융성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제한 목숨 바치겠다’는 박이차돈은 끝내 순교로서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그리고 통일신라 경덕왕(742~765)이 재위하면서 불교문화는 최고 절정을 이루며 많은 불교 건축물이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이때 창건되었습니다. 어느 날 경덕왕은 박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창건된 백률사를 찾았습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향하던 중 소금강산 기슭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파보게 했습니다. 땅속에는 정사면체의 큰 돌이 있었으며 돌의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경덕왕은 절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속에서 부처를 파냈다’하여 굴불사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면 석불은 현재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제가 여행하면서 본 사면 석불은 공덕산 사불암과 남산의 칠불암, 그리고 굴불사 사면 석불로 그만큼 존재 자체로도 귀한 문화재입니다. 사면 석불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부처님이 자리해 있습니다. 굴불사 사면 석불의 전면인 서쪽은 아미타 불상과 좌우로 협시보살이, 북쪽은 마애 미륵보살상과 십일면육비 관음보살상이, 남쪽은 석가삼존불이, 동쪽은 약사여래불을 모셨습니다.


 

 

 

먼저 서쪽면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전면부이며 그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사면 석불의 바위 자체에다 몸통을 삼았으며 따로 돌을 올려 불두를 만들었습니다. 협시보살을 보면 왼쪽은 관음보살입니다.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듯 그 모습이 수려하며 오른손은 잘려나간 상태입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머리 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신체와 함께 파손 상태가 심한 모습입니다. 대세지보살의 머리는 훼손되어 알 수 없지만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협시 보살인 관음보살은 신체보다 머리 부분이 더 큰 게 비율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이는 멀리서 기도하는 사람의 시각에 맞춘 것으로 이목구비가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면 더욱 친근감과 부처님을 숭배하는 마음이 크게 생긴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는 경주 남산의 여러 석불에서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북쪽면은 한쪽에 마애 미륵보살을 조각했는데 그 모습은 꼭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는 듯 천진난만해 보입니다. 이 보살도 하체보다는 상체가 크며 기도자의 원근을 감안한 것은 아닌지,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바위면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선각으로 남아 있는 관음보살상입니다.


 

 

 

 

 

 

특이한 것은 얼굴이 11개이며 팔은 6개로 십일면육비 관음보살로 우리나라에 십일면관음보살은 있지만 팔이 6개인 불상은 굴불사 사면 석불이 유일하다 합니다.


 

 

 

 

 

 

 

 

 

동쪽면의 약사불은 서쪽의 아미타불과 대비되며 오른손은 훼손되었고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사부대중의 질병을 약으로 치유한다는 부처님입니다. 선각으로 표현된 광배하며 신체보다는 얼굴의 윤각이 더욱 뚜렷합니다. 가부좌를 튼 부처님의 모습이 근엄하며 '모든 질병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는 듯 보입니다.


 

 

 

 

 

 

 

 

 

남쪽면은 석가 삼존불로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이 있었다지만 일제강점기 때 왜인이 바위를 통째로 뜯어가 지금은 빈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보면서 짐작해보면 왜인의 마음을 뺏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보살상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왼쪽의 문수보살도 대체적으로 원형이 남아 잘록한 허리 하며 신체의 볼륨이 살아 있는 듯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은 머리 부분이 뜯겨 나간 상태지만 신체를 표현한 조각가의 솜씨가 다른 불상에 비해 더욱 돋보이며 섬세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쪽면의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라면 남쪽면의 석가 삼존불은 현세 부처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굴불사 사면 석불을 조각한 분도 현세의 부처님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물 제121호


 

 

 

 

 

 

 

 

 

 

 

 

제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경주에 계시는 페친 강정근님의 댓글입니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사불산 굴불산 굴불사 만불산조에 나온 내용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조각기법이 7~8세기 때 조성된 것으로보이며   경덕왕 때인 8세기 중반과는 석불의 조각기법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홍수등 일연의 자연재해에 묻혔던것이 경덕왕때에  다시 발견된 것으로 추측된다하여 말미에 첨부합니다.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부 동헌. 새롭게 복원한 동래부 관아 건물 동래부 동헌을 여행하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시대 후기 동래부 관아 건물인 동래부 동헌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동헌은 일명 아헌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살림집을 내아라고 하며 동헌은 외아라고 불립니다. 동래부 동헌은 조선 시대 동래도호부의 부사가 공무를 보던 곳으로 이청, 무청, 향청 등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동래부 동헌은 1636년 인조 14년에 부사 정량필이 창건하였습니다.





동래부동헌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




 

동래부 동헌의 외삼문 독진대아문


1711년 숙종 37년에 부사 이정신에 의해 충신당이라 이름 지어 아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동래부 동헌은 일제강점기에 동래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우여곡절인지 모르지만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합니다.



동래독진대아문 포스팅 보기:

2016/10/21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을 만나다. 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에 동익랑과 서익랑과 동래동호부 동헌의 출입문으로 망미루로 불렸던 동래도호아문과 외삼문인 독진대아문 등이 부속건물로 있었습니다. 동헌의 건물을 보면 동익랑은 동헌의 안살림을 담당했던 다모방으로 사용되었고 서익랑은 공물을 보관하는 내유포고, 형벌기구를 보관하는 형장고와 사령이 기거하는 흡창방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동래부 동헌 충신당(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정비계획을 한다고 동헌을 철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서익랑 건물은 철거되었고 동래도호아문인 망미루와 독진대하문은 1930년경에 각각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내에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헌의 중심건물인 충신당만 본래 위치를 고수하며 남아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동래부 동헌의 원래 위치에 복원하면서 전체적인 규모는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충신당과 동익랑 건물은 서로 많이 떨어졌으나 좁은 부지에 새롭게 복원하다 보니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느껴집니다. 충신당은 앞면 7칸에 옆면 4칸 규모로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처음에는 좌·우에 방이 있었으며 가운데에 대청을 두어 수령은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래군청과 보건소 등 관청 건물로 사용하다 보니 벽면과 천장, 마루 등을 용도에 맞게 개조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지희루 동래 읍성 동문의 현판 





서쪽벽은 원래 모습 그대로이며 문설주와 중방등이 남아 있습니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정면과 서측면만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전면에 놓여 있는 디딤돌과 계단은 이 건물의 바닥이 마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우루 동래읍성 남문 현판






은일루 동래읍성 암문에 있던 현판



심성루 동래읍성 서문의 현판





동래부 동헌의 충신당은 부산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단일건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유일한 건물입니다. 또한, 동래부 동헌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 평가하고입니다.


 

찬주헌






 










 




망미루 포스팅 보기: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망미루(동래도호아문)


동래부 동헌의 출입문이었던 망미루는 바깥쪽으로 동래도호아문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안쪽에는 망미루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동래도호아문은 1742년 영조 18년에 동래부사였던 김석일에 의해 동헌 앞에 세워진 문루입니다. 1895년 고종 32년에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되어 포정사로 불렸습니다. 동헌을 들어서는 입구의 망미루 누각 위에는 동래읍성의 사대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 합니다. 동래도호아문인 망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으로 누각 밑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한 꽤 높은 크기의 건물이었습니다.





건물을 바치는 기둥의 아랫부분은 모두 장초석의 돌기둥을 세워 더욱 튼튼하게 보이도록 하였으며 동래도호아문의 권위와 외관을 갖추었습니다. 2층 누각 바닥은 귀틀마루에다 사방을 개방하였으며 그 끝에는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는 건물의 천장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방어와 감시용으로 세워진 건물로 보입니다.


 




고마청으로 마굿간








동래독진대아문은 1636년 인조 14년에 부사 정양필에 의해 동래부 동헌 충신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700년 숙종 26년에 동래부사 김덕기와 1870년인 고종 7년에 부사 정현덕에 의해 중수와 중건되었다 합니다. 이 문은 1655년 효종 6년에 동래부의 군사권을 담당했던 경상좌병영이 있는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습니다.














또한, 양쪽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과 교린연향선위사라는 주련(柱聯)이 걸려있으며 이 뜻을 보면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의 영이며 대일 외교시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입니다. 부산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대문이며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솟을삼문인 홑처마 기와 건물입니다. 대문의 천장 아래 홍살이 있는 것을 보면 동래부 동헌의 외대문으로 보입니다.


 





 

 

 

독경당은 동래부사가 독서하며 휴식했던 공간.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전형적 관아 출입문이며 부산 지역의 대표적 건물인 망미루와 동래부동헌의 외대문인 동래독진대아문은 1920년대까지 원래의 자리인 동래시장 입구와 농협인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시가지 정비계획을 추진한다고 헐릴 위기에 처하자 동래읍성 주민들에 의해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내에 각각 이건했다가 2014년 우리 문화재의 보호와 원형복원 차원에서 다시 원래 위치로 옮겨 복원했습니다.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복천박물관. 가야시대 복천동 고분군 유물전시관인 복천박물관 여행


이번에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복천동 고분군과 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을 전시한 복천박물관을 여행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은 가야시대 고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삼국시대 하면 신라·백제·고구려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가야의 존재는 있었습니다.






☞2016/10/21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을 만나다. 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

2016/10/19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2016/10/17 - [여행] -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내주축성비. 동래읍성 수축을 기록한 내주축성비

2016/10/13 - [여행] - (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복천동고분군

2016/10/12 - [여행] - (부산여행)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수로왕이 43년에 나라를 세운 가야는 500여 년 동안 유지되다가 562년 멸망했습니다. 그만큼 긴 세월 동안 우리 한반도에 삼국과 함께 존재했는데 그러나 역사적인 평가는 삼국보다 아주 미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라·백제·고구려가 삼국으로서 뿌리를 내리기 전에 낙동강을 기반으로 소부족이 각각 자신의 부족을 다스리며 연맹체를 결성했는데 이들 12개의 소국을 변한이라 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낙동강 하구인 김해지역을 근거지로 한 구야국으로 가야의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가야의 건국신화를 보면 김해 구지봉의 6개 황금알에서 여섯 아이가 나왔으며 각각의 나라를 다스렸는데 가락국, 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입니다. 이들 6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에 끼어 많은 부침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김해지방의 가락국인즉슨 금관가야의 유물들입니다. 금관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경남지역 17곳에서 철이 나왔는데 김해지역에만 13곳이나 몰려 있으며 생산된 철로 농기구와 무기 등의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부산 온천동 유적지에서 발굴

 

당시 김해는 물자 또한 풍부했으며 바다와 낙동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그리고 낙동강과 바다에 배를 띄워 일본과의 중계무역 등을 하면서 물품 운반 등을 내세우며 여섯 가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복천박물관 전시유물을 보면 유독 철제품이 많이 보입니다.


 

 

칼끝장식: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0호

 


이는 김해지역의 많은 철 생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야인의 무덤에서 화살촉, 칼, 창, 철판을 가죽과 함께 기워 맞춘 기마병의 마늘 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말에게 입힌 갑옷, 말 머리에 씌운 투구 등도 함께 나와 당시 발전한 가야 철제 무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복천박물관에서는 이 모든 철제품을 한눈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세기 말경에 철 무기로 무장하고 왜군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락국은 폐배하고 결국은 가야는 몰락의 길로 들어 작은 국가로 운영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도약하지만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가야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럼 금관가야 유물을 전시 중인 복천박물관을 관람하겠습니다.


 

고구려

 

사적 제273호인 복천동 고분군을 보면서 고대 부산지역도 가야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천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로 1996년 10월 5일에 복천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복천 고분군에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고분군은 덧널무덤(목관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앞트기식돌방무덤(황구식석실묘), 독널무덤(옹관묘) 등 총 200여 기의 무덤이 나왔으며 이곳에서 가야토기와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가지방울, 금동관, 목걸이 등 12,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가야

 

복천박물관에서는 이들 유물을 분류하여 두 개의 대형 전시실에서 진열 중이며 복천박물관 야외전시실에서는 무덤의 내부와 당시 발굴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전시 중입니다. 이곳 복천동 고분군의 유물을 보면서 유물과 무덤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가야 왕국의 신비를 풀어 줄 열쇠입니다.


 

신라

 


또한, 고대 가야와 일본과의 교류 등을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과 그외 부산의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을 만나면서 고대 부산의 역사, 문화와 더 나아가 가야사를 실체를 밝히는 역사교육장으로서 복천박물관은 온 가족이 참관하면 정말 좋습니다. 물론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복천박물관 사진으로 보기 ◆

 

 

 

 

복천동 고분군 전경

 

 

 

 

 

특별전으로 일본고대 문화로의 초대전 (사진촬영 금지로 사진 없음)

 

 

 일본고대 문화로의 초대전 포토존 사진

 

 

 

복천동고분군의 재현모습

 

 

 

 

복천동 38호분

 

 

복천동 21·22 고분군 모습

 

 

 

 

 

 

 

 

 

 

 

 

 

 

 

 

 

 

 

말머리 가리개"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 출토

 

 

 

 

 

 

 

 

 

 

투구와 목 가리개

 

 

 

 

 

투구

 

 

갑옷

 

투구·목가리개·갑옷. 4세기 복천동 고분군 38호

 

 

가지방울

 

 

 

 

 

 

 

 

 

 

 

 

오리모양토기 4세기 부산복천동 고분군 86호

 

 

특이한 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복천박물관 관람안내


복천박물관 관람시간:평일 09:00~18:00, 매주 토요일:09:00~21:00, 매주 마지막 주 수요일:09:00~21:00

복천 박물관 입장시간:평일:09:00~17:00, 매주 토요일(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09:00~20:00

복천박물관 휴관일: 1월1일, 매주 월요일

복천박물관 주소: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3

★복천박물관 전화:051-554~4263~4

복천박물관 입장료 무료

복천박물관 교통편:

●버스:동래방면 동래시장 또는 동래전화국 하차~걸어서 15분 쯤 소요.

지하철:도시철도 1호선,동래전철역 하차 4번 출구, 마을버스 6번이용

명륜역하차,2번 출구 마을버스 이용하여 코끼리 유치원 앞 하차 걸어서 3분 

 


(복천박물관 홈피캡쳐)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옛 부산미문화원 건물이 부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시 수탈현장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부산지점 건물이 부산근대역사관이 되었습니다.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으며 부산에 들어온 미군들 숙소가 되었다가 1949년 미국 해외공보처인 미문화원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82년 3월 18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최인순, 김현장, 김은숙, 문부식 등 부산 모대학교 대학생들이 반미운동을 외치미 이곳 문화원을 불 질렀습니다. 당시 이들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며 담당 판사는 이회장 전 한나라당 총재였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에 부산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요구로 미문화원은 철수하였고 건물은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 반환되었다가 6월에 부산시에서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자 조선침략의 상징적 건물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다시는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고자 근대역사전시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전시내용을 보면 외세의 침탈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현대역사와 개항기 부산,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근현대 한미관계 및 부산의 근대거리로 짜였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49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당시로써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에다. 외형은 서구건축양식을 도입하여 혁신적인 건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탈리아풍의 외관은 더욱 돋보이며 현재 부산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의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보기 힘든 건축 형태 중 하나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부산 근대역사관


 

 

 

 

 

 

 

 

 

 

 

 

 

 

 

 

 

 

 

 

 

 

 

 

 

 

 

 

 

 

 

 

 

 

 

 

 

 

 

 

 

 

 

 

 

 

 

 

 

 

 

 

 

 

 

 

 

 

 

 

 

 

 

 

 

 

 

 

 

 

 

 

 

 

 

 

 

 

 

 

 

 

 

 

 

 

 

 

 

 

 

 

 

 

 

 

 

 

 

 

 

 

 

 

 

 

 

 

 

 

 

 

 

 

 

 

 

 

 

 

 

 

 

 

 

 

 

 

 

 

 

 

 

 

 

 

 

 

 

 

 

 

 

 

 

 

 

 

 

 

 

 

 

 

 

 

 

 

 

 

 

 

 

 

 

 

 

 

 

 

 

 

 

 

 

 

 

 

3층에 전시 중인 부산의 근대거리는 일제강점기의 대청동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대청동은 일본인들의 거류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조선은행 등 금융기관, 양조장, 가구점, 병원, 일본식 과자점 및 세탁소, 미곡판매소와 출판사 등 많은 회사와 상업시설이 대청동에 모두 몰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점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였으며 각종 근대 시설들도 모두 일본인을 위한 것으로 현재까지도 대청동과 중앙동은 그때의 영향인지 출판과 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 정보 및 관람안내

 

부산근대역사관 관람시간: 09:00~18:00

부산근대역사관 입장시간: 09:00~17:00

부산근대역사관 휴관일:1월 1일,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일 공휴일일 경우 다음날 휴관.

매월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 지정 관람시간 연장 09:00~20:00(2시간 연장)

부산근대역사관 입장료:무료

부산근대역사관 주소:(우48949)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부산광역시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 전화:051-253-3845~6 팩스:051-253-332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경주하면 신라 시대 때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여 현재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어 불교의 성지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이 백률사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는 북방전래를 따르고 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에 중국의 승려인 순도가 전진에서 불경과 불상을 들여오면서부터입니다. 백제는 384년인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리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백률사 주소: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1

백률사 전화:054-772-8634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그러나 신라는 당시 국경이 산악지대로 험준한 백두대간이 막고 있어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라 유민들 사이에는 불교가 조금씩 전래하였으며 신라에다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한 분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스님 묵호자(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서라벌로 들어와 불교 포교를 힘썼지만 실패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백률사 송죽당



이곳이 신라불교의 초전지라면 신라불교의 최초 발상지는 구미시 해평면의 태조산 도리사입니다. 아도화상은 냉산(태조산)에다 처음 토굴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으며 이는 416년으로 신라불교가 공인받는 527년으로 보면 100년이 넘는 터울이 있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이미 신라에도 일반백성은 조금씩 불교가 성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신라가 불교에 공인을 받게 된 계기는 물론 527년 이차돈의 순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6세기 초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력이 강한 귀족에 의해 번번이 대립하였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이차돈이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찾아와 “신라에 불교가 융숭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기꺼이 제 한 목숨을 받치겠습니다”. 라며 제안을 합니다.





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호





법흥왕이 은밀하게 이차돈의 순교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그길로 천경림에다 절을 지으려고 합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는 곳은 신라 귀족으로서는 매우 신성시하며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다 이차돈이 절을 짓겠다 하니 귀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차돈이 이것을 노렸을 것 같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세력인 귀족은 법흥왕에게 이 일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차돈을 잡아들이게 하고 그의 목을 쳐라했습니다.


 




이차돈은 잡혀 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불교를 위해 죽으니 만약 부처님께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당당히 순교하였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흰 젓이 한길이 넘게 치솟았고 갑자기 천지가 진동했으며 하늘이 캄캄하고 꽃 비가 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귀족세력들도 어쩔 수 없이 법흥왕이 바라던 데로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였고 “왕이 곧 부처다”며 부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불국토로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백률사 마애삼층석탑


백률사는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던 자리에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에 절을 세웠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자초사라하였습니다. 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세운 순교비가 1914년 백률사 인근 숲속에서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이차돈 순교비의 조성 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라 헌덕왕 9년인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 공양당이라하며 화강암의 육각형 기둥입니다. 복련의 연꽃을 새긴 좌대 위에 세워졌으며 육각기둥 끝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면에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석당의 비문은 당시 최고의 신필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김생의 글씨라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유추하면 백률사가 자초사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률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경주 부윤 윤승순에 의해 중수되었습니다. 대웅전은 단층의 목조 기와 건물로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좌우 협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건물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건물의 기단부인 축대는 일부지만 신라 시대 양식이 남아 있습니다. 백률사는 예전에 없던 송죽당이 최근에 들어섰으며 신라불교의 성지답지 않은 어찌 보면 아주 초라한 작은 암자 규모입니다.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률사가 딱 그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작은 터에 여러 전각을 세우지 못해서 그런지 중심법당인 대웅전에는 모두 3개의 문이 있습니다. 가운데는 대웅전, 오른쪽은 응진전입니다. 대웅전과 응진전을 한 건물에 둔 경우는 아주 드문 일로 보입니다. 물론 법당 중앙에는 본존불과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시며 대웅전의 사격을 갖추었고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로 16나한상을 함께 모셨습니다. 






왼쪽에는 신라에 불교를 공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순교를 자처한 이차돈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 앞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3.2m 높이에 상륜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삼층석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사찰과 다르게 석탑을 세울 장소가 없어 자연석 바위에다 탑 모양을 새겼던 것으로 보이며 소금강산 정상 30m 북사면에는 마애삼존좌상이 식별이 불가할 정도로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 대웅전에서 이차돈 순교비와 함께 경주국립박물관에 옮겨 전시 중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불(국보 제28호)과 이차돈 순교비를 따로 만나고 싶습니다.


이차돈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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