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경주 월정교와 춘양교지. 반월성에 걸린 경주 월정교 


경주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현재 10여 년 가까이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며 2018년 봄이면 월정교를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월정교의 다리와 건물은 모두 완공되었지만, 월정교 주변의 유적지 부대시설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공사 중이지만 멀리서 외부를 보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 엄청난 규모의 월정교를 마음껏 보고 왔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2016/11/15 - [여행] - (경주여행)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월정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인 760년(경덕왕 19년)에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아 경덕왕 때 건설된 다리임을 알 수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250년 전입니다. 오랜 세월을 겪다 보니 지금은 다리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리를 지탱했던 배 모양의 교각만 남천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고 월정교의 길이가 60.57m였으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가 나왔다 합니다. 그 유물로 추정하기를 교각 위에 누각과 지붕이 연결된 누교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경주 월정교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복원된 월정교




월정교 복원공사는 2008년 4월 시작하여 내년에 봄에 모든 공사가 끝나는 10년의 장기 복원공사입니다. 복원되는 월정교의 규모를 보면 길이가 66.15m에 너비가 9m, 높이는 8.25m입니다. 다리는 돌기둥이며 그 위의 다리 상판은 나무를 깔고 두리기둥에다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다리 양쪽 끝에는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건물의 최고 높이는 15.67m인 중층 건물에다 주심포 양식의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를 하면서 원효가 태종무열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향하던 중 남천에 놓인 유교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데 요석공주와 로맨스를 만들게 했던 다리의 유적을 발굴했다 합니다. 당시의 다리가 맞는다면 삼국시대 유적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월성 걸린 월정교






반월성






월정교와 700m 위쪽에 남아있는 춘양교지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 있는 누각 다리의 유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제 원효가 건넜던 유교가 가장 오래된 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춘양교는 조선 시대에 월정교와 짝을 이루어 일정교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며 효불효교와 칠성교 등 민간신앙과 결합해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월정교와 함께 두 다리는 왕궁으로 드나들던 다리입니다. 춘양교도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그 규모가 밝혀졌습니다. 길이는 월정교보다 조금 짧은 55m이며 다리 상판은 최소한 13m, 교각높이는 5m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교각은 월청교와 같은 방식인 남천의 유속을 고려하여 배 모양으로 쌓았으며 다리의 규모와 석재의 재질, 색깔까지도 월정교와 거의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합니다. 이 두 다리 터는 고대 신라의 교량 축조방법과 토목기술, 신라 왕경의 규모와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 합니다. 춘양교지는 경주 박물관 뒷쪽에 있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는 사적 제457호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최부자집 경주최씨고택 여행. 경주에서 가장 뜨는 여행지 경주최씨고택.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아주 돈 많은 부자를 이야기할 때는 경주 최부잣집이란 말을 종종 듣고 자랐습니다. 제 고향이 경주이기도 하지만 400년 12대 동안 만석군 집안에 9진사를 배출해서 그 명성이 더욱 유명했나 봅니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경주 최부자집을 이제 5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찾아보았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 주소:경상북도경주시 교동 69

 

경주 최 부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의 지명은 주변에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 신문왕 2년인 68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로 그 시대는 달라도 교육기관으로서 계속 명맥이 이어와 현재에도 경주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경주 최씨 고택의 건립연대는 1700년쯤이며 처음 집을 지을 당시에 인근 향교인 유림의 반대에 부딪혀 향교의 뜻을 적극 수용해 향교보다 두 단 낮게 건물의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졸하며 아담한게 단아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원래 경주최씨는 최진립 장군의 사당이 있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조선 중기 무렵 이곳 교동에 옮겨와 정착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원형을 잘 보여주며 초창기에는 99칸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 발생한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불타 주춧돌만 남았는데 2006년에 큰 사랑채를 복원했으며 작은 사랑채는 아직 복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에는 항상 문객들로 들끓었으며 흉년에는 굶주린 백성에게 곳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과 함께 더욱 유명한 게 경주 교동법주입니다. 교동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에 지정되었으며 경주 최부자 집에만 내려오는 가양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최초로 빚었던 술로 교동법주는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최적기는 9월에서 그다음 해 4월까지이며 밑술에는 밀 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을 넣어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야 교동법주가 된다고 합니다. 완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하며 미황색에 교동 술만의 그윽한 향기와 맛을 가진 우리 전통주입니다. 현재 최국선의 10세손인 최경이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동법주 건물 옆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며 경주최씨 종가로 월성의 남천 변에 자리한 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사랑채는 다시 복원했으며 ‘一’의 대문채와 안채는 ‘ㅁ’자 모양입니다.

 

2006년 복원한 큰사랑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수수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높이 또한 낮아 그저 평범한 모습입니다. 현재에는 복원한 큰 사랑채이지만 화재이전의 구한말에는 의병장이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선생, 스웨덴의 구스타프 당시 왕세자와 의친왕 이강 공 등이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주춧돌만 남은 작은사랑채 터

 

 

 

 

작은 사랑채는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집을 지을 당시 반월성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받침돌 옮겨와 지었다 합니다. 또 한 곳은 곳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재 곳간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창고로 700~800석의 쌀을 보관했던 경주최씨 고택의 부를 상징했던 곳입니다.

 

 

 

 

여성들이 거주했던 안채는 8채였다지만 현재는 3채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의 12대 만석꾼이자 독립유공자 최준선생을 아시는지요?? 영남대학교 하면 가장 많이 회자하는 분으로 독립운동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문화교육사업에 만석의 전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최준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벌리다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백산 안희재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는 경주에 흩어져 있는 신라문화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고 영남대학교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해 나라를 이끌 동량을 키워내는데 일조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과 그 공적을 인정해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는 코스로 경주 최부집인 경주 최씨고택입니다. 주위로 경주향교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께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요석궁 전설 등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해는 527년인 법흥왕 때입니다. 신라는 당시 귀족세력의 권력이 강해 왕이라 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였으며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고 박이차돈은 그런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제안을 합니다. ‘신라에 불교가 융성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제한 목숨 바치겠다’는 박이차돈은 끝내 순교로서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그리고 통일신라 경덕왕(742~765)이 재위하면서 불교문화는 최고 절정을 이루며 많은 불교 건축물이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이때 창건되었습니다. 어느 날 경덕왕은 박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창건된 백률사를 찾았습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향하던 중 소금강산 기슭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파보게 했습니다. 땅속에는 정사면체의 큰 돌이 있었으며 돌의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경덕왕은 절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속에서 부처를 파냈다’하여 굴불사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면 석불은 현재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제가 여행하면서 본 사면 석불은 공덕산 사불암과 남산의 칠불암, 그리고 굴불사 사면 석불로 그만큼 존재 자체로도 귀한 문화재입니다. 사면 석불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부처님이 자리해 있습니다. 굴불사 사면 석불의 전면인 서쪽은 아미타 불상과 좌우로 협시보살이, 북쪽은 마애 미륵보살상과 십일면육비 관음보살상이, 남쪽은 석가삼존불이, 동쪽은 약사여래불을 모셨습니다.


 

 

 

먼저 서쪽면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전면부이며 그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사면 석불의 바위 자체에다 몸통을 삼았으며 따로 돌을 올려 불두를 만들었습니다. 협시보살을 보면 왼쪽은 관음보살입니다.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듯 그 모습이 수려하며 오른손은 잘려나간 상태입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머리 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신체와 함께 파손 상태가 심한 모습입니다. 대세지보살의 머리는 훼손되어 알 수 없지만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협시 보살인 관음보살은 신체보다 머리 부분이 더 큰 게 비율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이는 멀리서 기도하는 사람의 시각에 맞춘 것으로 이목구비가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면 더욱 친근감과 부처님을 숭배하는 마음이 크게 생긴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는 경주 남산의 여러 석불에서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북쪽면은 한쪽에 마애 미륵보살을 조각했는데 그 모습은 꼭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는 듯 천진난만해 보입니다. 이 보살도 하체보다는 상체가 크며 기도자의 원근을 감안한 것은 아닌지,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바위면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선각으로 남아 있는 관음보살상입니다.


 

 

 

 

 

 

특이한 것은 얼굴이 11개이며 팔은 6개로 십일면육비 관음보살로 우리나라에 십일면관음보살은 있지만 팔이 6개인 불상은 굴불사 사면 석불이 유일하다 합니다.


 

 

 

 

 

 

 

 

 

동쪽면의 약사불은 서쪽의 아미타불과 대비되며 오른손은 훼손되었고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사부대중의 질병을 약으로 치유한다는 부처님입니다. 선각으로 표현된 광배하며 신체보다는 얼굴의 윤각이 더욱 뚜렷합니다. 가부좌를 튼 부처님의 모습이 근엄하며 '모든 질병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는 듯 보입니다.


 

 

 

 

 

 

 

 

 

남쪽면은 석가 삼존불로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이 있었다지만 일제강점기 때 왜인이 바위를 통째로 뜯어가 지금은 빈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보면서 짐작해보면 왜인의 마음을 뺏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보살상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왼쪽의 문수보살도 대체적으로 원형이 남아 잘록한 허리 하며 신체의 볼륨이 살아 있는 듯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은 머리 부분이 뜯겨 나간 상태지만 신체를 표현한 조각가의 솜씨가 다른 불상에 비해 더욱 돋보이며 섬세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쪽면의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라면 남쪽면의 석가 삼존불은 현세 부처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굴불사 사면 석불을 조각한 분도 현세의 부처님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물 제121호


 

 

 

 

 

 

 

 

 

 

 

 

제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경주에 계시는 페친 강정근님의 댓글입니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사불산 굴불산 굴불사 만불산조에 나온 내용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조각기법이 7~8세기 때 조성된 것으로보이며   경덕왕 때인 8세기 중반과는 석불의 조각기법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홍수등 일연의 자연재해에 묻혔던것이 경덕왕때에  다시 발견된 것으로 추측된다하여 말미에 첨부합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경주하면 신라 시대 때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여 현재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어 불교의 성지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이 백률사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는 북방전래를 따르고 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에 중국의 승려인 순도가 전진에서 불경과 불상을 들여오면서부터입니다. 백제는 384년인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리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백률사 주소: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1

백률사 전화:054-772-8634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그러나 신라는 당시 국경이 산악지대로 험준한 백두대간이 막고 있어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라 유민들 사이에는 불교가 조금씩 전래하였으며 신라에다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한 분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스님 묵호자(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서라벌로 들어와 불교 포교를 힘썼지만 실패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백률사 송죽당



이곳이 신라불교의 초전지라면 신라불교의 최초 발상지는 구미시 해평면의 태조산 도리사입니다. 아도화상은 냉산(태조산)에다 처음 토굴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으며 이는 416년으로 신라불교가 공인받는 527년으로 보면 100년이 넘는 터울이 있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이미 신라에도 일반백성은 조금씩 불교가 성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신라가 불교에 공인을 받게 된 계기는 물론 527년 이차돈의 순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6세기 초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력이 강한 귀족에 의해 번번이 대립하였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이차돈이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찾아와 “신라에 불교가 융숭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기꺼이 제 한 목숨을 받치겠습니다”. 라며 제안을 합니다.





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호





법흥왕이 은밀하게 이차돈의 순교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그길로 천경림에다 절을 지으려고 합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는 곳은 신라 귀족으로서는 매우 신성시하며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다 이차돈이 절을 짓겠다 하니 귀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차돈이 이것을 노렸을 것 같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세력인 귀족은 법흥왕에게 이 일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차돈을 잡아들이게 하고 그의 목을 쳐라했습니다.


 




이차돈은 잡혀 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불교를 위해 죽으니 만약 부처님께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당당히 순교하였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흰 젓이 한길이 넘게 치솟았고 갑자기 천지가 진동했으며 하늘이 캄캄하고 꽃 비가 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귀족세력들도 어쩔 수 없이 법흥왕이 바라던 데로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였고 “왕이 곧 부처다”며 부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불국토로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백률사 마애삼층석탑


백률사는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던 자리에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에 절을 세웠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자초사라하였습니다. 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세운 순교비가 1914년 백률사 인근 숲속에서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이차돈 순교비의 조성 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라 헌덕왕 9년인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 공양당이라하며 화강암의 육각형 기둥입니다. 복련의 연꽃을 새긴 좌대 위에 세워졌으며 육각기둥 끝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면에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석당의 비문은 당시 최고의 신필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김생의 글씨라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유추하면 백률사가 자초사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률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경주 부윤 윤승순에 의해 중수되었습니다. 대웅전은 단층의 목조 기와 건물로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좌우 협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건물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건물의 기단부인 축대는 일부지만 신라 시대 양식이 남아 있습니다. 백률사는 예전에 없던 송죽당이 최근에 들어섰으며 신라불교의 성지답지 않은 어찌 보면 아주 초라한 작은 암자 규모입니다.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률사가 딱 그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작은 터에 여러 전각을 세우지 못해서 그런지 중심법당인 대웅전에는 모두 3개의 문이 있습니다. 가운데는 대웅전, 오른쪽은 응진전입니다. 대웅전과 응진전을 한 건물에 둔 경우는 아주 드문 일로 보입니다. 물론 법당 중앙에는 본존불과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시며 대웅전의 사격을 갖추었고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로 16나한상을 함께 모셨습니다. 






왼쪽에는 신라에 불교를 공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순교를 자처한 이차돈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 앞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3.2m 높이에 상륜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삼층석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사찰과 다르게 석탑을 세울 장소가 없어 자연석 바위에다 탑 모양을 새겼던 것으로 보이며 소금강산 정상 30m 북사면에는 마애삼존좌상이 식별이 불가할 정도로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 대웅전에서 이차돈 순교비와 함께 경주국립박물관에 옮겨 전시 중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불(국보 제28호)과 이차돈 순교비를 따로 만나고 싶습니다.


이차돈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제공)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신라 시대에는 가장 신성시했던 산이 경주 낭산입니다.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다 장사를 지내라며 유언을 남깁니다. 도리천은 불국토에서 28개의 하늘나라 중에서 첫 번째가 사천왕이 지키는 나라로 사왕천이라 합니다. 두 번째가 사왕천 위쪽에 있는 나라인데 이를 도리천이라 합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낭산이 곧 도리천이라 합니다.






중생사 주소:경북 경주시 배반동 640-1

중생사 전화:054-772-4836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이 때문인지 신라인들은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지상의 극락세계인 낭산을 신성시하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10여 년 뒤에 선덕여왕릉 밑에 절이하나 들어섰는데 그게 사천왕사였습니다. 그리고 낭산 기슭에는 황복사와 중생사터가 남아 있으며 도리천으로 불렸던 낭산이라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사찰의 규모를 부재로 짐작 할 수 있지만 현재 모두 폐사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경주여행에서 다시 찾았던 중생사의 옛 영화는 부재로 남았으며 초라한 절집은 강아지 두 마리만 왕왕 짓으며 우리를 반겼습니다. 한쪽으로 길게 늘어선 중생사에서 출토된 연꽃 대좌와 석탑의 부재 등 석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욱 깊게 남습니다.





그러나 중생사는 도리천이라 일컫는 낭산 기슭의 사찰답게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이 보물 제665호에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뒹굴던 거대한 관음보살 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옮겨 전시 중이라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위면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흔적만남아 있는 마애보살삼존좌상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아주 높은 것 같습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매우 드문 사례로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운데 모신 본존불은 머리에다 두건을 썼으며, 양어깨를 감싼 듯한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한,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한 광배를 돌렸으며 손 모양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본존불 왼쪽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쪽에 칼을 집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위로 올린 유희좌를 취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신장상은 양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악귀를 내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게 꼭 절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과 닮았습니다.

 





 


현재 중생사 모습. 왼쪽 전각에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경주여행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누렇게 변해 그야말로 황금들판을 이루었습니다. 여행객들의 입으로 경주는 봄과 가을 여행이 최고라는 말이 허투가 아님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느꼈습니다. 이번 경주여행은 능지탑지입니다.






경주 능지탑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


경주 능지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21-1






능지탑지하면 벌써 여행을 하신분도 있지만, 저도 이곳을 두 번째 여행합니다. 한번은 이른 초봄에 찾았는데 그때는 삭막했던 겨울의 잔해가 남아 있어서 지금과는 느낌이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경주 능지탑지는 옛 신라인이 매우 신성시한 산으로 여겼던 낭산의 구릉지에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건축물로 2층으로 복원한 게 탑 같기도 하고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능지탑을 능시탑, 연화문을 새긴 바위를 테두리에 돌려 연화탑으로도 불립니다. 현재 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었던 문무대왕의 죽음을 이곳에서 화장하고 동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다 해중릉을 모셨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입니다.




 

 


능지탑지의 발굴조사에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소조 불상 조각과 내부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누군가의 화장터임을 보여주는데 주위에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 유적을 보면서 문무왕의 화장터로 보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열흘 후 창고 문밖 뜰에서 인도불교의식에 따라 검소하게 화장하라”며 유조를 남겼다는 대목이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 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고 문밖 뜰’이란 지점이 현재 능지탑지가 세워진 곳이라 합니다.


 










 

 


한때 문무왕의 화장터를 원성왕릉인 괘릉으로 주장했던 적도 있었지만 새로운 조사과정에서 능지탑이 문무왕의 화장터임을 밝혀내었습니다. 복원된 능지탑지를 보면 2층입니다. 현재 주위에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서 원래 능지탑은 5층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마 복원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능지탑은 사각 형태이며 연화문을 새긴 석재가 기단과 탑신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사방의 기단에다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는데 그중 뱀과 용 호랑이상은 분실되어 빈 곳의 바위를 설치했습니다.

 





문무대왕하면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성왕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당나라와 손잡고 먼저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그다음에 고구려도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는 애초에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했던 약조를 깨고 신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려하자 문무왕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괴멸시키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물리고 이 땅에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667년 드디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문무왕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을 염원하며 삼국통일과 당나라와의 전쟁에 사용했던 모든 무기를 땅에다 묻고 무장사를 지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문무왕은 항상 긴장의 연속에서 살았다 갑자기 풀려났기 때문인지 그다음 해에 56세로 붕어했습니다. 죽으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신라를 왜구로부터 지키고자 서라벌의 입구인 동해구에 감은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여 문무왕의 유조를 받들었습니다. 이견대와 만파식적 등 문무왕의 전설은 능지탑과 함께 신비함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경주 여행을 하면서 이런 역사와 전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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