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향교, 경주 교동의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향교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도 경주향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그럼 경주향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향교가 있는 자리는 아주 오래전인 신라 시대부터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경주여행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여행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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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국학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세워졌습니다. 국학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입니다. 그게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향교가 시대를 뛰어넘으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경주향교는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인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인 최응현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경주향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주향교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대성전에 모셨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정상아래 두덕암으로 옮겼으며, 두덕암은 현재 도덕암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인 선조 33년에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정을 먼저 중건하고 두덕암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4년에는 윤성이 대성전을 들어서는 동문과 서문을 세웠으며 1614년 광해군 4년에 이안눌이 강학공간은 명륜당과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를 중건함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1668년과 1979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평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의 형태입니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즉 강당영역을 앞에다 두고 문묘영역은 강당 뒤쪽에다 배치했다면, 경주향교는 이와 반대인 문묘를 앞에다 놓고 강당을 그 뒤쪽에다 배치한 형식입니다.









전묘후학이 조선시대 향교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양식은 생각보다 주위 향교에서는 만나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경주향교의 양식을 전묘후학을 따른 것은 옛 도읍지에 있는 향교의 공통점이라 합니다. 왕과 그 가족인 왕족이 먼저 공자와 성현의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전묘후학의 양식이 이해가 갔습니다.





경주향교에서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 입니다.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대성전은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양식을 말하며 대성전의 내력이 현재 정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물의 공포와 창호, 내부의 가구 등 옛날 방식의 기법이 남아 있으며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확인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나왔으며 공자의 위패와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주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 출신인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음력 2월8일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경주향교 여행에서는 문묘 공간을 바깥에서 까치 발로 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습니다. 어느 향교든지 모든 문묘공간은 문을 닫아두는데 이번 경주향교 대성전은 그날 행사가 있어 문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분께 양해를 구하자 원래 대성전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들어가세요 하여 대성전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성전을 보고 나오면서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돌우물은 경주향교를 들어서는 쪽문 앞에 있어 가장 먼저 보지만 향교를 만나고 나오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국학이 건립될 당시부터 있었던 우물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돌우물은 땅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낮은 형태이며 테두리를 다듬은 널따란 돌 2개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과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경주 교동 최씨 고택도 함께 만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경주 최부잣집으로 통하는 최씨 고택과 경주향교, 월정교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보았던 곳이 경주 교동 마을 입구에 있는 경주 사마소(慶州 司馬所)입니다. 사마소하면 텔레비전 사극드라마에 한 번쯤 등장하는 양념입니다. 사마소는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토론을 벌이던 장소를 말합니다.



경주 교동 사마소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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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수령에게 자문하던 유향소가 당시 권력인 훈구파가 장악했는데 이와 맞서서 사마소는 젊은 유생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훈구파의 행태를 보면서 팔팔한 젊은 기상으로 뭉쳐져 아주 좋은 뜻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연구와 정치토론을 하면서 고향마을 교화에 힘써기도 하고 관청의 행정도 도와주는 등 처음에는 아주 좋은 뜻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권력이 따라붙고 세력화가 되니까, 초창기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관청의 업무를 도와 주던 게 권력으로 개입하고 수령에게 태클까지 거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변질하여 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등 그 행동이 도를 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폐단이 자꾸만 일어나자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은 사마소 폐지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시국의 시류에 휩쓸리는 정치꾼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경주 사마소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741년 영조 17년에 복원해서 풍영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사마소를 찾았을 때는 풍영정과 병촉헌 사마소 현판이 없었는데 이번에 세 현판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때는 아마 수리 중이었나 봅니다. 사마소 현판은 1762년 부윤 홍양한이 글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촉헌은 1832년 생원 최기영이 썼다고 하는데 사마소, 풍영정, 병촉헌의 현판 글씨의 필체가 묵직하고 모두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사마소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출입문이 꽉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까치발로 담장 너머에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사마소는 경주향교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월정교 인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에 옮겨 왔다고 합니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



그리고 사마소 바깥의 담장 아래에는 영광대가 새겨진 사각 돌기둥과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안내판을 보니 사마소에 세워져 있었던거라 합니다. 1860년에 선비들이 남천에 흩어져 있는 월정교의 석재를 모아 대를 쌓고 영광대(影光臺)라 했다고 합니다.



영광대의 뜻풀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으며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잘못하지 않게 타일러 주의를 시키는 글귀가 담겨 있다”는 의미라 합니다. 영광대를 보면서 성현의 책을 읽고 마음을 닦는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최부자집 경주최씨고택 여행. 경주에서 가장 뜨는 여행지 경주최씨고택.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아주 돈 많은 부자를 이야기할 때는 경주 최부잣집이란 말을 종종 듣고 자랐습니다. 제 고향이 경주이기도 하지만 400년 12대 동안 만석군 집안에 9진사를 배출해서 그 명성이 더욱 유명했나 봅니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경주 최부자집을 이제 5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찾아보았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 주소:경상북도경주시 교동 69

 

경주 최 부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의 지명은 주변에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 신문왕 2년인 68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로 그 시대는 달라도 교육기관으로서 계속 명맥이 이어와 현재에도 경주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경주 최씨 고택의 건립연대는 1700년쯤이며 처음 집을 지을 당시에 인근 향교인 유림의 반대에 부딪혀 향교의 뜻을 적극 수용해 향교보다 두 단 낮게 건물의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졸하며 아담한게 단아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원래 경주최씨는 최진립 장군의 사당이 있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조선 중기 무렵 이곳 교동에 옮겨와 정착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원형을 잘 보여주며 초창기에는 99칸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 발생한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불타 주춧돌만 남았는데 2006년에 큰 사랑채를 복원했으며 작은 사랑채는 아직 복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에는 항상 문객들로 들끓었으며 흉년에는 굶주린 백성에게 곳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과 함께 더욱 유명한 게 경주 교동법주입니다. 교동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에 지정되었으며 경주 최부자 집에만 내려오는 가양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최초로 빚었던 술로 교동법주는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최적기는 9월에서 그다음 해 4월까지이며 밑술에는 밀 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을 넣어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야 교동법주가 된다고 합니다. 완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하며 미황색에 교동 술만의 그윽한 향기와 맛을 가진 우리 전통주입니다. 현재 최국선의 10세손인 최경이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동법주 건물 옆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며 경주최씨 종가로 월성의 남천 변에 자리한 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사랑채는 다시 복원했으며 ‘一’의 대문채와 안채는 ‘ㅁ’자 모양입니다.

 

2006년 복원한 큰사랑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수수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높이 또한 낮아 그저 평범한 모습입니다. 현재에는 복원한 큰 사랑채이지만 화재이전의 구한말에는 의병장이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선생, 스웨덴의 구스타프 당시 왕세자와 의친왕 이강 공 등이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주춧돌만 남은 작은사랑채 터

 

 

 

 

작은 사랑채는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집을 지을 당시 반월성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받침돌 옮겨와 지었다 합니다. 또 한 곳은 곳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재 곳간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창고로 700~800석의 쌀을 보관했던 경주최씨 고택의 부를 상징했던 곳입니다.

 

 

 

 

여성들이 거주했던 안채는 8채였다지만 현재는 3채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의 12대 만석꾼이자 독립유공자 최준선생을 아시는지요?? 영남대학교 하면 가장 많이 회자하는 분으로 독립운동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문화교육사업에 만석의 전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최준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벌리다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백산 안희재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는 경주에 흩어져 있는 신라문화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고 영남대학교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해 나라를 이끌 동량을 키워내는데 일조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과 그 공적을 인정해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는 코스로 경주 최부집인 경주 최씨고택입니다. 주위로 경주향교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께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요석궁 전설 등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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