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부산의 옛 지명은 동래였습니다.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는 읍성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날 복원하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호가 되었습니다. 동래읍성의 범위는 아주 넓어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복천동·안락동·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원까지 걸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 마안산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지와 남문 터 등의 평탄지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의 석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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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축성비


북문



동래읍성은 마안산의 산성과 평지성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형태의 읍성입니다. 동래읍성의 축성을 보면 삼한시대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 동래에는 독로국으로 불렸던 성읍국가가 존재했습니다. 그때 이미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래읍성에 관한 기록은 1021년 현종 12년에 동래성을 수리했다며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바다 건너 일본의 약탈이 심했고 또한 동래부는 대일외교 창구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어 동래는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은 정3품의 부사가 담당하였습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발장군이 지켰던 부산진성이 무너졌습니다.


 



왜적 방어의 1차 관문인 동래성까지 왜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습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지키는 송상현 부사에게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고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내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으로 군·관·민은 최후의 일인까지 동래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실과학관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 마침내 동래성은 무너졌고 송상현 부사는 순절하였으며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전란은 끝이 났고 동래성은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731년인 영조 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언섭에 의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너진 성을 다시 더욱 크게 수축하였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지금 북문 안에 세워져 있는 내주축성비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약 3.8km이며 오늘날에 복원된 동래읍성도 그때의 흔적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동래읍성에는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라 부르면서 익성을 두었습니다.











동서남북 사대문에 문루가 있었으며, 은일루인 암문과 인생문, 남문의 앞쪽에 세병문이, 뒤쪽은 주조문의 이중구조였고 그 외 북문·서문·동문은 옹성을 쌓아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다시 한 번 헐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서장대








일제는 시가지 정비계획을 세우면서 평지의 동래읍성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복천동과 안락동 등 평지에는 읍성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그 터만 알리는 작은 빗돌만 세워져 당시의 가슴 아픈 흔적을 말해줍니다. 복원된 동래성은 북문·인생문·서장대·북장대·치성과 여장 등이 현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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