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부 동헌. 새롭게 복원한 동래부 관아 건물 동래부 동헌을 여행하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 시대 후기 동래부 관아 건물인 동래부 동헌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동헌은 일명 아헌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살림집을 내아라고 하며 동헌은 외아라고 불립니다. 동래부 동헌은 조선 시대 동래도호부의 부사가 공무를 보던 곳으로 이청, 무청, 향청 등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동래부 동헌은 1636년 인조 14년에 부사 정량필이 창건하였습니다.





동래부동헌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




 

동래부 동헌의 외삼문 독진대아문


1711년 숙종 37년에 부사 이정신에 의해 충신당이라 이름 지어 아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동래부 동헌은 일제강점기에 동래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우여곡절인지 모르지만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합니다.



동래독진대아문 포스팅 보기:

2016/10/21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을 만나다. 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에 동익랑과 서익랑과 동래동호부 동헌의 출입문으로 망미루로 불렸던 동래도호아문과 외삼문인 독진대아문 등이 부속건물로 있었습니다. 동헌의 건물을 보면 동익랑은 동헌의 안살림을 담당했던 다모방으로 사용되었고 서익랑은 공물을 보관하는 내유포고, 형벌기구를 보관하는 형장고와 사령이 기거하는 흡창방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동래부 동헌 충신당(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정비계획을 한다고 동헌을 철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서익랑 건물은 철거되었고 동래도호아문인 망미루와 독진대하문은 1930년경에 각각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내에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헌의 중심건물인 충신당만 본래 위치를 고수하며 남아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동래부 동헌의 원래 위치에 복원하면서 전체적인 규모는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충신당과 동익랑 건물은 서로 많이 떨어졌으나 좁은 부지에 새롭게 복원하다 보니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느껴집니다. 충신당은 앞면 7칸에 옆면 4칸 규모로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처음에는 좌·우에 방이 있었으며 가운데에 대청을 두어 수령은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래군청과 보건소 등 관청 건물로 사용하다 보니 벽면과 천장, 마루 등을 용도에 맞게 개조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지희루 동래 읍성 동문의 현판 





서쪽벽은 원래 모습 그대로이며 문설주와 중방등이 남아 있습니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정면과 서측면만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전면에 놓여 있는 디딤돌과 계단은 이 건물의 바닥이 마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우루 동래읍성 남문 현판






은일루 동래읍성 암문에 있던 현판



심성루 동래읍성 서문의 현판





동래부 동헌의 충신당은 부산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단일건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유일한 건물입니다. 또한, 동래부 동헌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로 평가하고입니다.


 

찬주헌






 










 




망미루 포스팅 보기: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망미루(동래도호아문)


동래부 동헌의 출입문이었던 망미루는 바깥쪽으로 동래도호아문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안쪽에는 망미루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동래도호아문은 1742년 영조 18년에 동래부사였던 김석일에 의해 동헌 앞에 세워진 문루입니다. 1895년 고종 32년에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되어 포정사로 불렸습니다. 동헌을 들어서는 입구의 망미루 누각 위에는 동래읍성의 사대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 합니다. 동래도호아문인 망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으로 누각 밑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한 꽤 높은 크기의 건물이었습니다.





건물을 바치는 기둥의 아랫부분은 모두 장초석의 돌기둥을 세워 더욱 튼튼하게 보이도록 하였으며 동래도호아문의 권위와 외관을 갖추었습니다. 2층 누각 바닥은 귀틀마루에다 사방을 개방하였으며 그 끝에는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는 건물의 천장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방어와 감시용으로 세워진 건물로 보입니다.


 




고마청으로 마굿간








동래독진대아문은 1636년 인조 14년에 부사 정양필에 의해 동래부 동헌 충신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700년 숙종 26년에 동래부사 김덕기와 1870년인 고종 7년에 부사 정현덕에 의해 중수와 중건되었다 합니다. 이 문은 1655년 효종 6년에 동래부의 군사권을 담당했던 경상좌병영이 있는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습니다.














또한, 양쪽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과 교린연향선위사라는 주련(柱聯)이 걸려있으며 이 뜻을 보면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의 영이며 대일 외교시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입니다. 부산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대문이며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솟을삼문인 홑처마 기와 건물입니다. 대문의 천장 아래 홍살이 있는 것을 보면 동래부 동헌의 외대문으로 보입니다.


 





 

 

 

독경당은 동래부사가 독서하며 휴식했던 공간.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전형적 관아 출입문이며 부산 지역의 대표적 건물인 망미루와 동래부동헌의 외대문인 동래독진대아문은 1920년대까지 원래의 자리인 동래시장 입구와 농협인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시가지 정비계획을 추진한다고 헐릴 위기에 처하자 동래읍성 주민들에 의해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내에 각각 이건했다가 2014년 우리 문화재의 보호와 원형복원 차원에서 다시 원래 위치로 옮겨 복원했습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시장 인근에 동래부관아가 복원되어 지나는 길에 보게 되었습니다. 복원된 동래부관아 중에서 가장 내마음에 남아 있는 건물이 맨 왼쪽에 복원된 망미루로 2층의 문루입니다. 그러니까 1층은 문이고 2층은 누각인데 이 건물은 필자가 어렸을 때의 추억이 있습니다.






 

 


원래 자리에 옮겨오기 전에는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 입구에 있었습니다. 금강공원을 오르는 입구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니까 벌써 40년도 훨씬 더 지난 세월입니다. 같은 부산의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좀체 갈 기회가 없었지만, 항상 생각이 나는 게 어릴 적 뛰놀던 망미루였습니다.


 

 


그 망미루가 제 위치로 다시 옮겨 복원되었다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반가움에 앞서 망미루 포스팅을 합니다. 망미루는 원래 지금의 자리 바로 옆 그러니까 수안파출소 앞에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그 자리에 망미루 터를 알리는 작은 빗돌이 서 있으며 원래 자리로 복원한다며 바로 30m 옆 동래부 관아 내에 비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복원을 제대로 하여 망미루의 누각 문을 열고 그쪽으로 사람을 드나들게 하면 더욱 좋았는데 아쉽게도 그런 기능은 하나도 없고 그저 형태만 갖추어 복원된 모습이 많이 아쉽습니다.


 

 


망미루는 조선 후기인 1742년 영조 18년에 동래부사 김선일에 의해 동래부 동헌 앞에 세워졌습니다. 망미루는 1895년 고종 32년에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하면서 포장사라 불렀고, 누각에는 동래읍성 사대문을 여닫는 시간과 정오를 알리는 큰북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리를 한다며 망미루 철거를 단행하자 지역민들이 단합하여 경비를 모금해 1930년경에 온천장의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 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1970년에 한 번 해체복원을 하였으며 그 뒤에도 소소한 수리가 이루어지다 2014년 민족정기를 되찾자는 취지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동래부 동헌을 복원하면서 안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망미루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중층 누각인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일반 누문에 비해 누각의 규모가 높고 큰데 이는 누각 아래로 사람이 통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대문으로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물입니다.


 

 

 

 


또한, 누각 기둥을 받치는 긴 돌기둥인 장초석은 누각의 안전을 보안함과 동시에 위엄을 갖추었으며 누마루는 귀틀마루를 깔고 마루 외곽은 계자난간으로 돌렸습니다. 일반의 누각은 산천의 경치를 보기 위해 천장을 높여 탁 트이게 하는 게 보통인데 동래읍성의 망미루는 천장이 낮은 게 외부에서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와 감시용의 건물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망미루의 앞쪽에는 ‘동래도호아문’이, 반대편인 안쪽에는 ‘망미루’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망미루(望美樓)는 임금의 명으로 한양에서 내려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2층의 누각을 망미루라 부른대서 유래하며 1919년 동래장터에 울려 퍼진 3.1 운동의 시발점이 망미루입니다.


 

 

 

 


이곳 누각에서 만세삼창으로 시작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준 건물로 일제는 아마 악착같이 허물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동래성의 흔적은 진짜 돌멩이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최근에 와서 마안산 일원에 동래성이 복원되었고 동래부 관아도 복원하였습니다.


 

 


망미루 복원에 사용된 부재는 최대한 기존의 부재를 다시 사용하였으며 붉은 단청은 복원과 함께 벗겨내고 지금은 원래의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1972년 6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동래부 관아(동래부동헌)


동래부 관아 주소: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수안치안센터 건너편)



18세기 동래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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