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래여행)수안역에서 임진왜란 참상인 동래읍성 해자.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현재 책 한 권을 보는 중입니다. 

보는 것도 아니죠 하루 만에 다 읽어갈 정도로 지금은 조금 남았습니다.

책의 제목은 ‘임진왜란 부산, 그 길을 걷다’입니다. 

저자는 정약수 선생님이며 벌써 가지고 있던 책이지만 마침 보던 책을 다 보고 다음 볼 책을 고심하다가 책상 위 포개진 책 위에 ‘임진왜란 부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안역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 주소: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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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서 보듯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먼저 함락된 부산진성과 동래성이야기라 생각되었습니다. 

저 또한,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동래읍성과 부산진성의 흔적이 있는 자성대. 다대포 윤공단 등 부산의 여러 임진왜란 전적지를 다니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은 알고 있어 그런 유의 책이라고 치부하면서 별 관심 없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잠시 머리말을 읽다가 임진왜란의 그 생생한 내용에 책을 놓지 못해 바로 하루 만에 책한권을 다 읽을 판이었습니다. 

책 내용에 나오지만, 임진왜란에 몇몇 장수를 빼고는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도외시하고 장수란게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울분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특히 경상좌수사였던 박홍이 취했던 태도에는 이런 자가 장수였다는 것에 참담할 뿐입니다.





절영도(현 영도) 앞바다를 꽉 메운 왜군의 함선을 보고 달려온 부산진첨사 정발장군은 오늘 밤 왜군에게 기습공격을 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박홍은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갔고 정발은 더는 기대를 하지 않고 다시 부산진성에서 일전을 치를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박홍은 왜군의 동태를 본다고 황령산에 올라가 바다를 뒤덮은 왜군의 함선을 보고는 놀라 그 길로 내려와 배를 수장시키고 식량창고에다 불을 지르고는 도망 쳐 버렸습니다.







현재 수영에는 당시 경상좌수영이 복원해 있으나, 당시 왜군이 무혈입성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경상우수사의 원균 또한 좌수사의 박홍 못지않았습니다. 

원균 또한 거제도의 우수사를 부하 장수에게 맡기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왜적은 부산진성을 지키던 정발장군에게 “명나라를 치려 하니 길을 내어 달라”하자 장군은 “내어 줄 길이 없다”며 3,000여 군·관·민은 목숨 걸고 싸웠으나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장군은 절명하였습니다.





이들은 부산진성의 여세를 몰아 들불처럼 나아갔습니다. 

주력부대는 동래성으로 향하고 일부는 다대포로 향했습니다. 

다대포첨사 윤홍신장군도 왜적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왜는 1592년 4월15일 송상현부사가 지키는 동래성에다 '전즉전의부전즉가도(戰則戰矣不戰則假道)'인 “싸울 테면 나와서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자 송부사는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으로 답하며 끝까지 동래성을 사수하다 군·관·민 모두 동래성에서 옥쇄하였습니다.








왜는 ‘움직이고 피 흘리는 모든 것은 살해했는데 여자고 어린아이고 고양이고 개 할 것 없이 모두 도륙했다’고 일본의 ‘길야일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참혹했던 현장의 모습이 도시철도 4호선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습니다. 동래읍성이 있었던 수안역인데 동래읍성을 따라 땅을 파서 만든 해자였습니다.

 






동래읍성 해자는 성벽에서 30m 떨어져 있고 폭은 5m에다 높이는 대략 2m 깊이에 돌을 쌓은 형태였습니다. 

‘임진왜란 부산. 그 길을 걷다’에서 수안역 동래읍성 해자에서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인골이 수습되었다 합니다. 

이들은 칼에 베였거나 활과 총 , 둔기 등에 맞았거나 조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구멍 뚫린 인골과 함몰된 인골이 발굴된 현장을 보면서 당시 처참했던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칼과 화살촉, 목궁, 해자 바닥에 설치한 목익 등 널브러진 무기류를 보면서 당시의 처참한 모습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이안눌이 남긴 시를 보고서입니다. 

이안눌의 시에는 두 왜란의 참담함이 잘 나와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1608년경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해왔습니다.







“4월15일 새벽에 집집이 곡소리가 일어나 천지가 소슬하고 처참한 바람이 숲을 진동하니 놀라서 나이 많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임진년 성이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로 시작되는 ‘동래맹하유감’입니다. 

당시 송상현부사와 백성이 함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쌓인 시체 밑에 깔려 목숨을 건진 사람은 천백 명 중 한두 명뿐이었다 합니다.







이는 종군 승려 텐게이의 서정일기에 동래성 전투에서 “3,000을 목 베고 500을 포로로 잡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4월 15일 친족의 제사를 지내는 통곡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울렸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번 큰 전란의 참상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경술국치, 한국동란 등 수많은 전란과 핍박은 모두 준비하지 않은 데서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불완전한 정세 속입니다. 준비하지 않고 넋 놓고 있다가는 또 어떤 전란과 핍박을 당할지 모를 일입니다. 

수안동의 처참한 동래읍성 해자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부산, 그 길을 걷다 저자 정약수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부산의 옛 지명은 동래였습니다.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는 읍성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날 복원하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호가 되었습니다. 동래읍성의 범위는 아주 넓어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복천동·안락동·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원까지 걸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 마안산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지와 남문 터 등의 평탄지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의 석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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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축성비


북문



동래읍성은 마안산의 산성과 평지성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형태의 읍성입니다. 동래읍성의 축성을 보면 삼한시대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 동래에는 독로국으로 불렸던 성읍국가가 존재했습니다. 그때 이미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래읍성에 관한 기록은 1021년 현종 12년에 동래성을 수리했다며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바다 건너 일본의 약탈이 심했고 또한 동래부는 대일외교 창구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어 동래는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은 정3품의 부사가 담당하였습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발장군이 지켰던 부산진성이 무너졌습니다.


 



왜적 방어의 1차 관문인 동래성까지 왜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습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지키는 송상현 부사에게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고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내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으로 군·관·민은 최후의 일인까지 동래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실과학관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 마침내 동래성은 무너졌고 송상현 부사는 순절하였으며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전란은 끝이 났고 동래성은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731년인 영조 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언섭에 의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너진 성을 다시 더욱 크게 수축하였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지금 북문 안에 세워져 있는 내주축성비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약 3.8km이며 오늘날에 복원된 동래읍성도 그때의 흔적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동래읍성에는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라 부르면서 익성을 두었습니다.











동서남북 사대문에 문루가 있었으며, 은일루인 암문과 인생문, 남문의 앞쪽에 세병문이, 뒤쪽은 주조문의 이중구조였고 그 외 북문·서문·동문은 옹성을 쌓아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다시 한 번 헐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서장대








일제는 시가지 정비계획을 세우면서 평지의 동래읍성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복천동과 안락동 등 평지에는 읍성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그 터만 알리는 작은 빗돌만 세워져 당시의 가슴 아픈 흔적을 말해줍니다. 복원된 동래성은 북문·인생문·서장대·북장대·치성과 여장 등이 현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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