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전홍유후설총묘 여행.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과 구황동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설총묘를 포스팅하겠습니다. 

이 묘의 주인은 전 홍유후 설총묘로 알려졌습니다. 설총은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중 한 분입니다. 

설총은 독특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분입니다. 요즘 말로 보면 아주 드라마틱한 출생의 비밀이라 할까요?. 부친은 신라 시대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원효대사이고 모친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친딸인 요석공주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깃거리는 왕족과 평민의 혼인이라고 치부하면 그저 평범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스님입니다. 스님은 결혼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사실인데 공주와 결혼했으니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ㅎㅎ




경주여행 전홍유후설총묘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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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길을 오릅니다. 

서라벌에서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찾아가는 길도 만만찮았습니다. 험난한 산과 깊은 계곡을 타고 넘으면서 몸은 파김치가 되었고 기진맥진하여 이들은 어느 동굴을 찾아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곯아떨어졌고 원효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더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이 손에 잡혔습니다. 

목이 말라 급한 김에 벌꺽벌꺽 순식간에 다 비워버렸고 다시금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에 꿀맛이었던 물그릇을 찾았다가 그게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밤새 달콤하게 잠을 잤던 동굴은 무덤 속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게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 사상을 깨달았습니다. 

원효는 당나라에 가보았자 별 통수가 없다고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만 보내고 자신은 신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민중 속을 파고들며 노래로서 불법을 전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노래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 김춘추만이 “자신에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아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라는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김춘추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요석궁에 머물러 있던 딸이 있어 이 둘을 맺어줄 계책을 세우고는 신하를 불러 원효를 궁궐로 모셔오라고 합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는 궁궐로 향하다가 요석궁 앞의 개울에 발을 헛디뎌 빠지면서 넘어져 그만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오늘 밤은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고 내일 만나자는 어명을 내렸고 원효는 옷을 말리려고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옷만 말리라 했는데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석공주는 10개월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분이 신라 10현 중 한 분인 설총입니다. 이로써 원효대사는 파계승을 자처하며 자신을 소성거사라 불렀습니다. 

설총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경북 경산시 원효대사의 고향마을과 가까운 곳에 설총과 요석공주의 전설이 있는 반룡사가 현재 남아있습니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고향에서 설총을 낳았고 설총과 함께 반룡사에 머물면서 설총을 키웠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을 때는 왕비와 함께 항상 구룡산에 걸린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고 지금도 그 고개를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라고 부릅니다. 

설총은 성장하면서 총명했나 봅니다. 아버지 원효대사의 노랫말처럼 현자를 낳아 나라를 받치는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말입니다.




설총은 이두법을 집대성했는데 이는 한자인 음과 훈인 소리를 새겨 우리말식으로 적어 사용했던 문자로서 유교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해서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습니다. 이두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사기의 설총 열전 편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에게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해줄 것을 우화로 엮어서 이야기해줍니다. 이게 한국 최초의 창작 설화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후대에 와서 화왕계로 불렸습니다. 

신문왕은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 글로 써서 왕 된 이들의 경계로 삼기 바란다“며 후세의 임금에게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문왕은 설총을 관직에 발탁시켰습니다. 

설총의 묘는 지름이 15m, 높이가 7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아랫부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022년(고려 현종 13년) 홍유후의 시호를 추증받았고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1623년(조선 선조 1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향교, 경주 교동의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향교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도 경주향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그럼 경주향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향교가 있는 자리는 아주 오래전인 신라 시대부터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경주여행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여행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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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국학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세워졌습니다. 국학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입니다. 그게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향교가 시대를 뛰어넘으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경주향교는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인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인 최응현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경주향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주향교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대성전에 모셨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정상아래 두덕암으로 옮겼으며, 두덕암은 현재 도덕암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인 선조 33년에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정을 먼저 중건하고 두덕암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4년에는 윤성이 대성전을 들어서는 동문과 서문을 세웠으며 1614년 광해군 4년에 이안눌이 강학공간은 명륜당과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를 중건함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1668년과 1979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평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의 형태입니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즉 강당영역을 앞에다 두고 문묘영역은 강당 뒤쪽에다 배치했다면, 경주향교는 이와 반대인 문묘를 앞에다 놓고 강당을 그 뒤쪽에다 배치한 형식입니다.









전묘후학이 조선시대 향교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양식은 생각보다 주위 향교에서는 만나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경주향교의 양식을 전묘후학을 따른 것은 옛 도읍지에 있는 향교의 공통점이라 합니다. 왕과 그 가족인 왕족이 먼저 공자와 성현의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전묘후학의 양식이 이해가 갔습니다.





경주향교에서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 입니다.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대성전은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양식을 말하며 대성전의 내력이 현재 정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물의 공포와 창호, 내부의 가구 등 옛날 방식의 기법이 남아 있으며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확인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나왔으며 공자의 위패와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주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 출신인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음력 2월8일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경주향교 여행에서는 문묘 공간을 바깥에서 까치 발로 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습니다. 어느 향교든지 모든 문묘공간은 문을 닫아두는데 이번 경주향교 대성전은 그날 행사가 있어 문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분께 양해를 구하자 원래 대성전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들어가세요 하여 대성전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성전을 보고 나오면서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돌우물은 경주향교를 들어서는 쪽문 앞에 있어 가장 먼저 보지만 향교를 만나고 나오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국학이 건립될 당시부터 있었던 우물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돌우물은 땅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낮은 형태이며 테두리를 다듬은 널따란 돌 2개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과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경주 교동 최씨 고택도 함께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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