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읍성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청도 석빙고 여행


청도를 거치면서 잠시 들러 청도 읍성과 청도석빙고를 보고 왔습니다. 

청도읍성은 현재 일부 복원된 상태이며 석빙고는 허물어진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석빙고는 남북한을 합해 총 7곳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남한에 6개의 석빙고가 있으며 그 대부분이 경주와 청도, 현풍, 창녕읍과 영산에 각각 1개씩 총 5개와 안동에 1개뿐인 귀한 문화유산입니다.





청도읍성과 청도석빙고 주소: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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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하게도 석빙고는 남한에서 모두 영남권에만 모두 몰려 있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먼저 청도읍성 주차장에다 주차하였습니다. 

청도군을 다스렸던 현감들의 선정비가 수두룩한 게 많은 선정비가 청도군의 오랜 역사를 대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청도읍성은 경상북도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동상리·동천리에 걸쳐 쌓은 토성과 석성을 혼합해 쌓은 성입니다.

 




남고북저의 읍성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 하며 산성과 평지성을 혼합한 평산성으로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입니다.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성문을 내었으며 읍성의 높이는 1.65m에 길이는 약 1,8km, 성벽 위를 덧쌓은 여첩은 600측이라 합니다. 

1590년(선조25)에 청도읍성을 석축형태로 고쳐 쌓으면서 성벽을 더 높였습니다.



때마침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왜적의 총공세에 동·서·북·문은 불타버렸고 읍성은 허물어졌습니다. 

다시 청도읍성 문루와 성벽을 재정비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읍성을 철거하는 정책을 벌여 성벽과 문루를 모두 뜯어 파괴했습니다. 

그때 장관청, 아전청, 회계소, 동헌, 객사, 군기고와 3개의 누각이 철거됐습니다.





청도 선정비군은 서상리 동천리 남성현 등에 흩어져 있던 것을 2008년 청도읍성 동문지 주변에다 옮겼습니다. 

선정비는 1675년에서 1904년까지 건립된 비석으로 모두 30여 기입니다. 

청도석빙고는 현재 남아있는 석빙고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도 크다 합니다. 

또한, 그 모습이 가장 적나라합니다.





청도석빙고 이외의 석빙고는 모두 복원과정을 거쳐 큰 고분 같은 모습이지만 청도석빙고는 지붕은 뼈대만 남았고 벽체는 돌을 촘촘히 쌓은 석빙고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했던 청도석빙고는 화양읍 동천리 청도읍성 동문 부근에 자리했습니다.



 






당시 동문으로 살짝 나와서 얼음을 빼갔을듯합니다. 

석빙고 앞에는 석빙고를 축조하면서 함께 세운 비석이 유구한 세월이 흘렀음을 보여줍니다. 

비석에는 3개월가량 공사를 해서 완성했으며 건립날짜와 석빙고 건립에 관계한 이름까지 나와 있는 그야말로 창녕석빙고의 출생기록부입니다.







창녕석빙고 비석에는 “조선 1713년(숙종39년) 2월11일에 진사 박상고에 의해 공사를 시작해서 그해 5월5일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도석빙고의 빙고는 길이가 14.75m, 넓이 5m, 홍예 높이 4.4m에 화강암을 사용했습니다.









서쪽에다 출입구를 내고 동·서 방향이며 천장은 4개의 홍예가 걸쳐져 있습니다. 

바닥은 직사각형에 안쪽으로 경사지게 했고 흙을 다진 다음 그 위에다 돌을 깔았으며 가운데에는 배수구를 내었습니다. 

10개의 돌을 어긋나게 짜맞추어 4개의 홍예를 만들었고 그 위에는 장방형의 돌을 걸쳐 천장을 덮는 형태였으나 지금은 돌은 모두 깨어져 몇 개만 남아 있습니다. 

청도 석빙고는 1963년 1월 보물 제323호에 지정했습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창녕 우포늪을 여행하고 나서 점심을 창녕전통시장에 있는 수구레국밥을 먹었습니다. 수구레국밥을 맛있게 먹고는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걸으면서 창녕 석빙고를 보기로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조선 시대 얼음창고입니다. 요즘은 냉장고가 집집이 없는 집이 없어 냉동실에서 쉽게 물을 얼려 얼음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래서 얼음의 귀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냉장고는 귀하고 아주 값이 비싼 물건이라 서민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서민의 여름나기는 지금 생각하면 애처롭습니다. 



한여름에는 우물에다 수박을 담근 다음 차게 해서 먹는다든지, 아니면 얼음집에서 큰 얼음을 블록만 하게 톱으로 자른 팔았습니다. 작은 얼음에다 바늘을 꽂아 망치로 살살 치면 신기하게도 얼음이 산산 조각났고 그 얼음으로 차디찬 얼음 수박 화채를 만들어 먹든 기억이 있습니다.




창녕석빙고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창녕석빙고 연락처:055-481-4650






호랑이 담배 피우든 시절도 아닌 4~50년 전에도 이러했는데 조선 시대의 여름 나기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시원하게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삼복더위에는 요즘 같이 냉장고도 없는데 어디서 얼음을 구해와 냉 화채를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신기합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겨울에 계곡의 꽁꽁 언 얼음을 잘라 석빙고에 보관했으며 그 얼음을 가지고 삼복더위에 얼음 화채를 만들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얼음은 아무나 끄집어 내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아주 귀한 것이니까?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해”하면서 하사품으로 내려줬다고 합니다.







지금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빙수, 아이스크림, 얼음과자 등 먹고 싶으면 손쉽게 먹을 수 있어 좋은 시대에 사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창녕 석빙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러 곳에서 석빙고가 남아 있지만 그중 창녕 석빙고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현재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려고 입구에 쇠창살로 막아 놓아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내부를 완벽하게 본 곳이 청도 석빙고였습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청도석빙고를 내려가 보면서 여름철 얼음을 보관했던 원리와 석빙고 구조도 함께 보았습니다. 

창녕석빙고는 봉분은 흙으로 덮였으며 문은 닫혔지만, 창녕석빙고도 이와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석빙고는 옛 무덤인 고분을 닮았습니다. 고분과 크기도 비슷하고 출입구가 없다면 그냥 고분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석빙고의 구조를 보면 네모나게 땅을 깊이 파내었고 천장은 돌을 무지개(홍예) 인 둥글게 돌다리 형태로 짜맞추었습니다. 바닥은 평평하게 돌을 깔았으며 한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했습니다. 이곳이 얼음을 보관하는 방이며 빙실입니다. 

바닥의 북쪽에는 녹은 얼음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으며 벽체는 바닥에서부터 다듬어진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천장 부근에서는 다듬은 돌을 어긋나게 끼워 맞추어 무지개식 돌다리로 골조를 만들었으며 총 4개입니다. 

그리고 무지개형태의 돌다리 위에다 긴 돌을 걸치고 다시 보온을 위해 흙으로 두껍게 덮었습니다. 

천장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바깥의 공기가 적당히 드나들게끔 하는 굴뚝입니다. 이게 얼음이 잘 녹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보관하게끔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1742년인 조선 영조 때에 창녕 현감인 신서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계곡의 얼음을 석빙고에 쉽게 옮기도록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자하골과 직각이 되게 하였으며 남북으로 긴 모양에 출입구는 남쪽에 두었습니다. 보물 제3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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