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보문들에 있는제26대 신라 진평왕릉 여행. 진평왕릉


이번 경주 보문동 4번째 여행지는 진평 왕릉입니다. 

진평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부왕이었습니다. 

현재 진평 왕릉은 남산과 명활산 사이에 만들어진 보문들 가운데에 있습니다. 

낭산에는 그의 큰딸인 선덕여왕릉이 있어 서로 부녀의 정을 나누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 진평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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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은 이번 겨울 방문까지 합해 세 번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진평왕릉은 고목에 새싹이 터지는 늦봄부터 찾는 게 좋을듯합니다. 

특히 여름이면 진평왕을 호위하듯 두른 짙은 수림의 노거수로 그야말로 환상의 경관을 연출합니다.



26대 진평왕은 신라의 초대 왕인 박혁거세를 이어 두 번째로 장기집권한 왕입니다. 

579년에 집권하여 632년까지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가 27대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동륜 태자입니다.





24대 진흥왕의 장자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일찍 죽자 그의 동생 금륜이 왕위를 계승하여 25대 진지왕이 되었으며 후에 동륜 태자의 장자인 진평왕에게 다시 왕위를 물려줍니다.



신라에는 불교가 국교로 공인된 게 법흥왕으로 진평왕은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전 가족을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모니 왕실의 이름을 따와 사용했습니다. 

진평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이라 했으며 왕비는 석가모니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따와 '마야부인 김씨'라 불렀습니다.



동생도 백반, 국반이라 하였는데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입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초반에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왕권을 잡으면서 먼저 관제 정비를 서두릅니다.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국정과 군권을 장악해 왕권 강화에 힘써섭니다. 

581년에는 위화부를 설치하여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했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설치하였습니다.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직접 군사를 일으켜 출격하는 등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분쟁이 심해 잦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타계하려고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608년에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유도하였습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진평왕은 더욱 외교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신라를 수많은 위기로부터 지켜내었으며, 남산산성을 축성과 명활산성 개축 등 서라벌 방어에 전력하였습니다.



진평왕은 632년 죽자 한지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진평왕은 의지가 굳고 현명하고 식견이 있는 군주였나 봅니다. 

당나라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진평왕릉을 보면 봉분의 지름은 약 40m이며 높이는 8m로 흙을 쌓아 올린 둥근 형태의 봉분입니다. 

봉분 아래쪽에는 자연석의 호석을 돌렸으며 그중 몇 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적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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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배동을 삼릉이라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세 왕릉이 있는 소나무 숲을 어릴 적부터 배리숲·삼릉숲이라 불렀습니다. 

삼릉은 이름 그대로 3개의 능이 있음을 뜻합니다. 

일렬로 3개의 능이 서 있고 오른쪽에 55대 경애왕릉이 있습니다. 

이번 경주 남산을 돌면서 마지막에 삼릉을 보고 왔습니다.




경주 배동 삼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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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은 신라시대의 경주 박씨 왕릉입니다. 

신라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세왕을 모신 능입니다. 

세 왕릉은 원형의 봉분에 흙을 덮은 형태입니다. 

현재 삼릉의 주인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능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모두 비정한 상태입니다. 

먼저 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을 보겠습니다.



아달라왕의 부왕은 7대 일성왕릉입니다. 

일성왕릉 또한 인근인 경주 서남산 탑동의 해목령 아래 산기슭에 있습니다. 

아달라왕은 재위 시절 156년에 계립령(하늘재)과 2년 후에는 소백산의 죽령 길을 열었는데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백제의 침입으로 우리 백성을 잡아가자 아달라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백제는 포로로 잡아간 백성을 돌려주면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달라왕이 다스릴 때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은 포항 호미곶의 선바위에 가면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부는 아달라왕 4년인 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오랑이 해안가 바위에 올라가 해초를 열심히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우고는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연오랑을 보고는 이는 하늘이 내려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세오녀는 연오랑이 오지 않자 바다로 나갔고 바위에서 연오랑의 신발을 발견하고는 바위에 올랐습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바위는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연오랑이가 있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해안 바위에서 세오녀를 발견한 일본 주민은 놀라서 연오랑에게 아뢰었고 이들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신라에서 사라지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사라지는 암흑천지가 되었고 해를 관찰하던 일관은 이는 우리나라에 있던 해(연오랑)와 달(세오녀)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 보고했습니다.

 


아달라왕은 일본에 가서 어서 이들 부부를 데려오라고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연오랑은 “하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었는데 어찌 돌아가겠나” 하면서 돌아갈 수 없다며 그 대신 왕비인 세오녀가 짠 비단 한 필을 내어주면서 이 비단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된다고 돌려보내었습니다.

 


사신은 아달라왕에게 비단을 내어놓고 보고하였고 아달라왕이 비단을 놓고 친히 제를 올리자 예전처럼 하늘에는 해와 달이 떴다고 합니다. 

아달라왕은 신하에게 이 비단을 잘 보관할 것을 명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비단을 보관했던 창고는 귀비고라 하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 오늘날 포항시의 동해면이며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하였다 합니다.

 


지금도 흥해부터 호랑이 꼬리처럼 툭 튀어나온 호미곶 일대를 영일만이라 하며 영일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전설입니다. 

삼릉에서 제일 위의 능을 말합니다. 

신덕왕(재위 912~917)의 성은 박씨 이름은 경휘, 본명은 수종이며 헌강왕의 사위입니다. 

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낸 예겸으로 선성대왕에 추봉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겸은 의부이며 친부는 흥렴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입니다. 

두 아들은 승영과 위응이며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에 오릅니다.



당시에는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의 궁예가 쳐들어와도 방어할 힘이 없을 정도로 신라의 국력은 쇠락할 때로 쇠락했습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시신은 화장하였고 유골은 수습하여 잠현의 남쪽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가운데 능이 신덕왕입니다.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 두 번이나 도굴당했습니다. 

그 후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로 확인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무덤 내부일부벽면에 황색·백색·붉은색·군청색·감청색의 색칠을 확인했으나 벽화는 아니라고 합니다. 

54대 경명왕(?~924)은 이름은 승용이며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입니다.








이때에는 경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왕건과 견훤에게 빼앗겼으며 이들이 서로 신라의 서라벌을 차지하려는 패권을 벌리는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어수선한 경주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설화가 내려옵니다. 

사천왕사 벽화에 그려진 개가 울었으며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그 벽화의 개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또한, 황룡사구층목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성안에 쫙 퍼졌다 합니다. 

이게 신라의 멸망을 암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경명왕이 죽자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 지냈다 합니다.

1971년 4월 대한민국 사적 제219호에 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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