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신라 시대에는 가장 신성시했던 산이 경주 낭산입니다.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다 장사를 지내라며 유언을 남깁니다. 도리천은 불국토에서 28개의 하늘나라 중에서 첫 번째가 사천왕이 지키는 나라로 사왕천이라 합니다. 두 번째가 사왕천 위쪽에 있는 나라인데 이를 도리천이라 합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낭산이 곧 도리천이라 합니다.






중생사 주소:경북 경주시 배반동 640-1

중생사 전화:054-772-4836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이 때문인지 신라인들은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지상의 극락세계인 낭산을 신성시하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10여 년 뒤에 선덕여왕릉 밑에 절이하나 들어섰는데 그게 사천왕사였습니다. 그리고 낭산 기슭에는 황복사와 중생사터가 남아 있으며 도리천으로 불렸던 낭산이라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사찰의 규모를 부재로 짐작 할 수 있지만 현재 모두 폐사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경주여행에서 다시 찾았던 중생사의 옛 영화는 부재로 남았으며 초라한 절집은 강아지 두 마리만 왕왕 짓으며 우리를 반겼습니다. 한쪽으로 길게 늘어선 중생사에서 출토된 연꽃 대좌와 석탑의 부재 등 석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욱 깊게 남습니다.





그러나 중생사는 도리천이라 일컫는 낭산 기슭의 사찰답게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이 보물 제665호에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뒹굴던 거대한 관음보살 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옮겨 전시 중이라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위면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흔적만남아 있는 마애보살삼존좌상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아주 높은 것 같습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매우 드문 사례로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운데 모신 본존불은 머리에다 두건을 썼으며, 양어깨를 감싼 듯한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한,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한 광배를 돌렸으며 손 모양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본존불 왼쪽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쪽에 칼을 집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위로 올린 유희좌를 취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신장상은 양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악귀를 내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게 꼭 절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과 닮았습니다.

 





 


현재 중생사 모습. 왼쪽 전각에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부산광안리불꽃축제)가을 밤하늘을 수놓은 부산광안리불꽃축제 역시 최고였습니다. 


장산 유격대에서 본 부산광안리불꽃축제 역시 대단했습니다. 화려한 8만 발의 축포소리에 넋을 빼고 봤는데 어느새 끝이더군요. 참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 가버렸습니다. 넋을 빼고 봤던 부산광안리불꽃축제 다시 또 보려면 내년인 제13회를 기다려야 하는군요??? ㅋㅋㅋ 많이 아쉽네요?? 부산광안리불꽃축제 사진 시답잖은 물량공세로 올립니다. 올해 불꽃은 이런 스타일로 불꽃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경주여행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누렇게 변해 그야말로 황금들판을 이루었습니다. 여행객들의 입으로 경주는 봄과 가을 여행이 최고라는 말이 허투가 아님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느꼈습니다. 이번 경주여행은 능지탑지입니다.






경주 능지탑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


경주 능지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21-1






능지탑지하면 벌써 여행을 하신분도 있지만, 저도 이곳을 두 번째 여행합니다. 한번은 이른 초봄에 찾았는데 그때는 삭막했던 겨울의 잔해가 남아 있어서 지금과는 느낌이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경주 능지탑지는 옛 신라인이 매우 신성시한 산으로 여겼던 낭산의 구릉지에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건축물로 2층으로 복원한 게 탑 같기도 하고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능지탑을 능시탑, 연화문을 새긴 바위를 테두리에 돌려 연화탑으로도 불립니다. 현재 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었던 문무대왕의 죽음을 이곳에서 화장하고 동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다 해중릉을 모셨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입니다.




 

 


능지탑지의 발굴조사에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소조 불상 조각과 내부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누군가의 화장터임을 보여주는데 주위에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 유적을 보면서 문무왕의 화장터로 보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열흘 후 창고 문밖 뜰에서 인도불교의식에 따라 검소하게 화장하라”며 유조를 남겼다는 대목이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 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고 문밖 뜰’이란 지점이 현재 능지탑지가 세워진 곳이라 합니다.


 










 

 


한때 문무왕의 화장터를 원성왕릉인 괘릉으로 주장했던 적도 있었지만 새로운 조사과정에서 능지탑이 문무왕의 화장터임을 밝혀내었습니다. 복원된 능지탑지를 보면 2층입니다. 현재 주위에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서 원래 능지탑은 5층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마 복원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능지탑은 사각 형태이며 연화문을 새긴 석재가 기단과 탑신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사방의 기단에다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는데 그중 뱀과 용 호랑이상은 분실되어 빈 곳의 바위를 설치했습니다.

 





문무대왕하면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성왕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당나라와 손잡고 먼저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그다음에 고구려도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는 애초에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했던 약조를 깨고 신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려하자 문무왕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괴멸시키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물리고 이 땅에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667년 드디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문무왕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을 염원하며 삼국통일과 당나라와의 전쟁에 사용했던 모든 무기를 땅에다 묻고 무장사를 지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문무왕은 항상 긴장의 연속에서 살았다 갑자기 풀려났기 때문인지 그다음 해에 56세로 붕어했습니다. 죽으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신라를 왜구로부터 지키고자 서라벌의 입구인 동해구에 감은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여 문무왕의 유조를 받들었습니다. 이견대와 만파식적 등 문무왕의 전설은 능지탑과 함께 신비함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경주 여행을 하면서 이런 역사와 전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을 만나다. 동래부 동헌 외삼문 동래독진대아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 안에 있던 동래독진대아문을 보고 자란 한사람입니다. 당시 금강공원 안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이름이 말바위였습니다. 이곳에서 동래 꼬치 친구와 총싸움, 칼싸움하며 뛰어놀았습니다. 그 옆에는 동래독진대아문의 현판이 걸린 삼문형식의 솟을대문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게 왜 이곳에 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우리의 놀이터로서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동래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2016/10/19 - [여행] - (부산동래여행)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2016/10/17 - [여행] -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내주축성비. 동래읍성 수축을 기록한 내주축성비

2016/10/13 - [여행] - (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복천동고분군

2016/10/12 - [여행] - (부산여행)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항상 한번 찾아가야지 하며 생각했던 놀이터의 유물(?)을 금강공원이 아닌 동래부동헌에서 만났습니다. 동래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을 복원하면서 외대문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동헌 밖에서 현판의 동래독진대아문을 되뇌며 참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릴 적 놀이터로 뛰어놀았던 그 문이었습니다. 동래독진대아문은 처음에 이곳과 마주 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옛터를 알리는 작은 빗돌이 당시의 동래부 동헌 외대문의 영화를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경상좌병영 경주진영에 소속되었던 동래부가 독립하여 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문이며, 지금은 동래부 동헌 안으로 옮겨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東萊府 東軒 外大 門)이었던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인 동래독진대아문은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사적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이곳은 일본과 가까웠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일본과의 전란을 겪었고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래부에는 일본인의 거주지역인 왜관도 있어 국방과 외교상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고을의 관아보다 규모도 컸습니다. 동래부독진대아문의 건립은 1636년인 인조 14년에 동래부사였던 정양필이 두 전란으로 황폐되었던 동래부동헌을 새로 건립하면서 함께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870년 고종 7년에 동래부사 정현덕이 중건했으며 외삼문 가운데에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현판이 떡하니 걸려 있습니다. 그 아래 두 기둥에는 주련이 달렸습니다.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사) 현판으로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를 하면서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독진이 된다는 뜻은 원래 동래부의 군사적 관할은 경상좌병영의 지휘하에 경주 진관 소속이었습니다. 경주진관소속에서 따로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음이며 그것을 보여주는 유적이 현재 수영시장 인근에 남아있는 경상좌수영 건물입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전형적인 관아 대문 모습입니다. 규모는 작으나 삼문형식의 솟을대문은 흔하지 않으며 천정 아래 홍살이 있어 처음부터 외삼문이었던 건물로 보입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홑처마입니다. 이 건물은 동헌 대문으로 망미루 뒤편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경에 시가지 정비를 하면서 철거위기에 처하자 동래 백성들의 노력으로 망미루, 내주축성비와 함께 금강공원 입구와 안으로 옮겨졌으며 2014년 8월 동래부 동헌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동래독진대아문(동래부 동헌 외삼문)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

동래부 동헌 동래독진대아문(동래부 동헌 외삼문)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부산의 옛 지명은 동래였습니다.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는 읍성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날 복원하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호가 되었습니다. 동래읍성의 범위는 아주 넓어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복천동·안락동·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원까지 걸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 마안산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지와 남문 터 등의 평탄지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의 석성입니다.






☞2016/10/17 - [여행] -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내주축성비. 동래읍성 수축을 기록한 내주축성비

2016/10/13 - [여행] - (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복천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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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8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내주축성비


북문



동래읍성은 마안산의 산성과 평지성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형태의 읍성입니다. 동래읍성의 축성을 보면 삼한시대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 동래에는 독로국으로 불렸던 성읍국가가 존재했습니다. 그때 이미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래읍성에 관한 기록은 1021년 현종 12년에 동래성을 수리했다며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바다 건너 일본의 약탈이 심했고 또한 동래부는 대일외교 창구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어 동래는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은 정3품의 부사가 담당하였습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발장군이 지켰던 부산진성이 무너졌습니다.


 



왜적 방어의 1차 관문인 동래성까지 왜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습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지키는 송상현 부사에게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고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내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으로 군·관·민은 최후의 일인까지 동래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실과학관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 마침내 동래성은 무너졌고 송상현 부사는 순절하였으며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전란은 끝이 났고 동래성은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731년인 영조 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언섭에 의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너진 성을 다시 더욱 크게 수축하였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지금 북문 안에 세워져 있는 내주축성비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약 3.8km이며 오늘날에 복원된 동래읍성도 그때의 흔적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동래읍성에는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라 부르면서 익성을 두었습니다.











동서남북 사대문에 문루가 있었으며, 은일루인 암문과 인생문, 남문의 앞쪽에 세병문이, 뒤쪽은 주조문의 이중구조였고 그 외 북문·서문·동문은 옹성을 쌓아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다시 한 번 헐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서장대








일제는 시가지 정비계획을 세우면서 평지의 동래읍성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복천동과 안락동 등 평지에는 읍성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그 터만 알리는 작은 빗돌만 세워져 당시의 가슴 아픈 흔적을 말해줍니다. 복원된 동래성은 북문·인생문·서장대·북장대·치성과 여장 등이 현재 있습니다.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내주축성비. 동래읍성 수축을 기록한 내주축성비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세워진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동래 읍민의 죽음을 불사한 항쟁의 피가 남아 있습니다. 송상현 부사는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나무막대에다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며 글을 썼어 성문 앞에 세워둔 것을 보고 송상현 부사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라 적은 나무토막을 던지며 끝까지 항쟁하다 동래성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란 뜻의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은 동래성전투와 함께 길이길이 후손에 남아 작금의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송상현 부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자 했던 동래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전란이 끝나면서 무너진 성벽은 더욱 황폐해져 갔습니다.







2016/10/13 - [여행] - (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복천동고분군

2016/10/12 - [여행] - (부산여행)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2016/10/08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최근에 복원된 동래읍성의 북문 앞에는 ‘내주축성비(來州築城碑)’란 비석이 있습니다. 이는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는데 1731인 영조 7년에 당시 동래부사였던 정언섭이 임진왜란과 함께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은 사실을 기념하며 1735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동래읍성의 비망록이라 할까요?. 비명을 보면 읍성의 둘레가 대략 1.4km, 성벽의 높이는 3.9m, 1731년 1월에 성터를 측량하고 경상도 65개 군에서 52,000명의 인원을 동원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동래읍성의 수축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연인원 417,050명에 쌀 4,585석, 베 1,552필과 13,454냥의 막대한 돈이 들어간 공사로 4월부터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5월에 성문을, 7월에는 문루를 완공했다 하며 이때 수축공사로 동래성의 둘레는 약 3.8km에 성벽의 높이는 5.1m가 되었습니다.




복원 된 동래읍성 북문



비신의 앞면은 이 모든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였고, 뒷면에는 축성에 동원된 임원 명단을 새겨 놓은 그야말로 동래읍성의 수축에 관한 모든 기록물이라 하겠습니다. 비의 높이는 422cm, 넓이는 108cm 규모의 비석으로 이수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석의 받침돌은 연꽃무늬가 조각된 아주 소박한 모습입니다. 비문은 황산도 찰방이던 김광악이 짓고 글씨는 송광제가 썼습니다. 그리고 비신의 전자는 현풍 현감 유우기의 글씨입니다. 이 내주축성비는 동래읍성의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조선 후기 축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원래 내주축성비는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정비계획으로 헐릴 위기에 처하자 1930년경 망미루와 함께 이전하였습니다. 내주축성비는 금강공원 내에 있던 독진대아문 뒤편으로 옮겨졌으며 2012년 10월에 지금의 동래읍성 북문 안으로 다시 옮겨왔습니다.





내주축성비주소: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산 3-2 일원

 


 

(함안여행/함안가볼만한곳)방어산마애불. 보물 제159호 통일신라시대 함안방어산마애불 여행을 하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방어산에는 방어산 정상 못 미쳐 보물 제159호 ‘방어산마애불’이 있습니다.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했다’는 뜻을 가졌으며 산세는 깎아지른 바위벼랑으로 천연요새와 다름없는 옹골찬 산세입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이 중 하나의 바위에다 새겨 놓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 정도로 지금은 옅어졌습니다.




 




 

 

 

마애약사여래불 


바위의 높이는 6m에 폭은 대략 7.5m이며 거친 바위 면에다 마애불을 새겼습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약사삼존불로로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세 분의 부처님입니다. 4.5m 크기의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로 추정되는 3.3m 크기의 협시보살 두 분을 새겼습니다. 약사여래불은 앞을 보고 있으며 두 분의 협시보살은 모두 약사여래불을 향하고 있습니다.


 

 일광보살

 

 월광보살

 

 


주존불인 약사불은 옷이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을 걸쳤으며 바위의 암질로 인해서 마모가 심한 상태지만 옷자락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배까지 올린 왼손에는 약그릇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어서 약사불이라 부릅니다.


 

 

 

 


또한, 정수리에는 봉긋하게 솟은 육계 하며 소발, 이마는 짧으며 두 눈썹 사이에 백호가 음각되어 전체적으로 얼굴은 약간 길고 몸은 큰데 좁은 어깨 하며, 힘을 뺀 몸에 긴장감은 떨어지지만, 위엄은 갖추었습니다.


 

 

 

 

 

 

 

 

 

 


두 협시보살은 약사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일광과 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으며 보살상 또한 통견의 법의에다 주존불과는 다르게 어깨 위에 걸친 천의자락이 무릎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모습입니다. 왼쪽 일광보살은 가슴까지 두 손을 올렸으며 강한 남성적인 모습에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왼손은 손등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월광보살은 여성적이며 미간에 달을 뜻하는 둥근 무늬를 새겼고 두 손을 가슴에다 모으고 있습니다. 세 분 모두 발뒤꿈치를 붙인 일자 형태이며 활짝 핀 연꽃잎이 위로 향하는 앙련의 연꽃좌대 위에 서 있습니다. 방어산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의 제작연대는 협시보살인 일광보살 오른쪽에 43자의 명문을 새겨 놓았습니다.


 

 

 

 

 

 

 

 

 

 


내용을 보면 ‘정원 17년 3월 16일에 마애불을 조성하였다’란 뜻입니다. 이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인 801년으로 애장왕 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어산 마애불은 당시 100여 년 전 불상에다 표현한 활력 넘치던 이상적표현이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불상 조각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방어산 마애불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면 산131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동래복천동고분군, 삼국시대 고분군 동래복천동고분군을 여행하다.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부산에서 큰 규모이며 또한 부산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사적 제27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의 발견은 아이러니하게도 1969년 주택공사를 하면서 고분군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016/10/12 - [여행] - (부산여행)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2016/10/11 - [여행] - (부산여행)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부관아 망미루

2016/10/08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2016/10/06 - [부산 축제]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제22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려요. 동래읍성역사축제






동래성이 있는 마안산이 반월형으로 감싸는 지능선의 완만한 구릉에 다양한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조사와 유물수습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발굴조사는 발견 당시인 1969년 9월 28일부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0월 3일까지 조사하였습니다. 이때 복천동 고분군의 모습이 드러났으며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함께 나왔습니다.





그 후 1995년까지 부산대학교와 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며 유구는 130여 기에 출토 유물은 총 9,000여 점입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인골 등과 금은의 유물보다는 철로 만든 유물이 더 많았으며 특히 무구류와 갑주류가 많았습니다.





부장품 중 특별한 것은 보물 제598호인 마구식 각배와 오리 모양 토기입니다. 고분을 보면 널무덤이 3기, 부곽이 딸린 덧널무덤 19기, 덧널무덤만 58기, 부곽 딸린 구덩식 돌방무덤 6기, 구덩식 돌방무덤만 42기, 독무덤 2기와 굴식 돌방무덤이 1기 등 전체적으로 170여 기의 무덤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복천동 고분군의 발굴조사와 유물수습이 모두 끝난 상태이며 고분군이 있던 자리는 회양목으로 둘러놓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분군을 발굴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으며 건물은 흡사 우주선을 닮은 듯 특이합니다.







야외전시장에 복원된 복천동 53호 무덤과 54호 무덤의 출토유물을 보겠습입니다. 먼저 53호 무덤은 능선 가운데 있으며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형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수혈식 석곽묘입니다. 덧널무덤 형식인데 따로 부곽이 달린 구조로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그 당시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부장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토기, 철기, 목걸이 귀걸이, 숫돌과 철제품 등 30여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중 토기류가 가장 많았는데 굽다리접시, 항아리, 그릇받침과 함께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도 출토하였고 이 토기는 당시 가야인의 부장 풍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출토된 토기류를 보면서 알 수 있는데 굽다리 접시는 신라계, 함안계 등 여러 지역으로 나누는데 부장된 토기는 함안계가 상당수 나와 무덤의 주인은 서부경남지역의 사람일 확률이 높으며 다른 무덤에 비해서 매장품이 작고 무기류의 비중이 낮아 남성보다는 여성일 가능성 높다 합니다.







복천동 54호 무덤과 출토유물을 보겠습니다. 무덤은 4세기 말에 만들어졌으며 대형 덧널무덤인 목관묘입니다. 무덤은 주곽과 부곽을 따로 갖춘 형식으로 후대에 와 무덤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부장유물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 철기, 목걸이 등 200여 점이며 거의 토기류입니다. 굽다리접시, 항아리, 손잡이 달린 굽다리 항아리, 그릇받침대 등 다양하며 투구, 재갈, 덩이쇠, 화살촉, 창 도끼, 관못 등 철기류도 함께 나왔습니다. 54호 무덤은 함안을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지역과 일본계 유물이 나온 것을 보면 가야인들은 주변 지역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서 알 수 있다합니다.







복천동 고분군을 보면 경주의 고분군에 비해서는 조금 떨어지지만, 남부지방 최대 고분에 속하며 출토된 유물 또한, 경주 고분 다음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고 많은 양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복천동 고분군의 중요한 유물 중 하나는 방어용 무기인 갑옷과 투구입니다.









우리나라 갑옷 연구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부산의 고대 유물이 궁금하다면 복천동 고분군을 꼭! 꼭! 추천합니다. 그리고 다음 여행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복천박물관으로 갑니다. 







 영보단비


영보단비(永報壇碑)를 아세요. 복천동 고분군과 복천고분박물관 사이에 있는 비석으로 1909년 나라에서 호적대장을 거두어들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동래지역 13개 면민이 반발하며 조상들의 이름이 적힌 호적대장을 함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마안산 기슭에다 불태우고 이곳에다 단을 쌓아 영모단이라 하였습니다. 이곳에다 일제 침탈로 우리의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며 1915년에 ‘영보단비’를 세웠다합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동래 장관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음 가봤던 동래 장관청 건물이 지금은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중. 동래 장관청


이번에 동래시장 인근을 배회하다가 알게 된 문화재 동래 장관청입니다. 장관청을 보면서 둥래부동헌이나 송공단, 동래읍성, 동래향교 등 이름난 곳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번 동래구 여행의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금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라 많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일하시는 분이 없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뭐 복원 공사하면 완전 건물을 해체하여 새로 짓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입구의 행랑건물은 아예 해체하여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동래부청사 건물의 하나였던 군장관들의 집무소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널브러진 공사 자재로 인해 올케 구경은 할 수 없었고 사진만 몇 장 담아왔습니다. 동래부는 지리적 여건으로 일본과 아주 가까워 국방상 요충지로 여겼습니다. 1655년 효종 6년에 독진으로 승격하면서 동래부는 군사상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군관의 기관이 설치되었습니다.





부사는 행정인 경찰 담당이며 군사적인 속료인 군교가 있었는데 장관, 군관, 포교가 이에 속합니다. 동래 장관청은 1669년 현종 10년에 동래부사 정석이 창건하였으며 숙종 때 두 차례 중건되었습니다.







그 후에 1706년인 숙종 32년에 동래부사 황일하가 향청이 있던 이곳에다 다시 옮겨 세웠습니다. 장관청은 앞면 7칸, 옆면 2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부연이 있는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도리 끝에 접시받침을 한집입니다.


 





지금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행랑채는 앞면 7칸, 옆면 1칸의 민도리집으로 현재는 건물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게끔 완전히 해체된 상태입니다.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재사용을 기다리며 바닥의 주춧돌만 건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동래 장관청은 부산 지방에 남은 조선 후기 관아 건물로 당시 건축양식을 가늠해볼 수 있지만, 워낙 여러번 구조를 바꾸는 등 개조하여 처음 모습과는 심한 변형이 있어 1997년 일차 전면 해체 복원을 했는데 이번에 다시 해체 복원이 진행 중입니다. 복원이 완료되면 다시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

1972년 6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정(참고:문화재 안내판)


동래 장관청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4번길 36-6(지번:동래구 수안동 510-1)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동래부관아 망미루. 동래부동헌 앞에 세워졌던 망미루가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2층 누각건물입니다. 


동래시장 인근에 동래부관아가 복원되어 지나는 길에 보게 되었습니다. 복원된 동래부관아 중에서 가장 내마음에 남아 있는 건물이 맨 왼쪽에 복원된 망미루로 2층의 문루입니다. 그러니까 1층은 문이고 2층은 누각인데 이 건물은 필자가 어렸을 때의 추억이 있습니다.






 

 


원래 자리에 옮겨오기 전에는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 입구에 있었습니다. 금강공원을 오르는 입구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니까 벌써 40년도 훨씬 더 지난 세월입니다. 같은 부산의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좀체 갈 기회가 없었지만, 항상 생각이 나는 게 어릴 적 뛰놀던 망미루였습니다.


 

 


그 망미루가 제 위치로 다시 옮겨 복원되었다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반가움에 앞서 망미루 포스팅을 합니다. 망미루는 원래 지금의 자리 바로 옆 그러니까 수안파출소 앞에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그 자리에 망미루 터를 알리는 작은 빗돌이 서 있으며 원래 자리로 복원한다며 바로 30m 옆 동래부 관아 내에 비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복원을 제대로 하여 망미루의 누각 문을 열고 그쪽으로 사람을 드나들게 하면 더욱 좋았는데 아쉽게도 그런 기능은 하나도 없고 그저 형태만 갖추어 복원된 모습이 많이 아쉽습니다.


 

 


망미루는 조선 후기인 1742년 영조 18년에 동래부사 김선일에 의해 동래부 동헌 앞에 세워졌습니다. 망미루는 1895년 고종 32년에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하면서 포장사라 불렀고, 누각에는 동래읍성 사대문을 여닫는 시간과 정오를 알리는 큰북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리를 한다며 망미루 철거를 단행하자 지역민들이 단합하여 경비를 모금해 1930년경에 온천장의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 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1970년에 한 번 해체복원을 하였으며 그 뒤에도 소소한 수리가 이루어지다 2014년 민족정기를 되찾자는 취지와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동래부 동헌을 복원하면서 안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망미루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중층 누각인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일반 누문에 비해 누각의 규모가 높고 큰데 이는 누각 아래로 사람이 통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대문으로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물입니다.


 

 

 

 


또한, 누각 기둥을 받치는 긴 돌기둥인 장초석은 누각의 안전을 보안함과 동시에 위엄을 갖추었으며 누마루는 귀틀마루를 깔고 마루 외곽은 계자난간으로 돌렸습니다. 일반의 누각은 산천의 경치를 보기 위해 천장을 높여 탁 트이게 하는 게 보통인데 동래읍성의 망미루는 천장이 낮은 게 외부에서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와 감시용의 건물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망미루의 앞쪽에는 ‘동래도호아문’이, 반대편인 안쪽에는 ‘망미루’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망미루(望美樓)는 임금의 명으로 한양에서 내려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2층의 누각을 망미루라 부른대서 유래하며 1919년 동래장터에 울려 퍼진 3.1 운동의 시발점이 망미루입니다.


 

 

 

 


이곳 누각에서 만세삼창으로 시작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준 건물로 일제는 아마 악착같이 허물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동래성의 흔적은 진짜 돌멩이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최근에 와서 마안산 일원에 동래성이 복원되었고 동래부 관아도 복원하였습니다.


 

 


망미루 복원에 사용된 부재는 최대한 기존의 부재를 다시 사용하였으며 붉은 단청은 복원과 함께 벗겨내고 지금은 원래의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1972년 6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동래부 관아(동래부동헌)


동래부 관아 주소: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수안치안센터 건너편)



18세기 동래성 모습








(부산국제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덕혜옹주 손예진씨를 보고 영화의 전당 야외 무대 이모저모. 영화의 전당 손예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덕혜옹주 손예진씨를 보고 영화의 전당 야외무대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우산을 들고 대충 둘러봤습니다. 최근에 부산을 강타했던 태풍 영향으로 해운대에서 열리는 야외행사는 안전문제로 모두 취소되고 갑자기 센텀시티 영화의 전당으로 옮겨와서 그런지 예전 부산국제영화제 때 해운대백사장에서 봐 왔던 여러 가지 볼거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내부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몇 개 있는 부스는 비가 와서 그런지 너무 조용한 모습. 오늘은 맑은 날씨고 하니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행사가 순조로울 것 같습니다. 부산 국제영화제는 오는 15일(토)까지 열립니다. 평소에 볼 수 없던 많은 영화를 만날 기회 지금이 적기입니다.







2016/10/05 - [부산 축제] - (부산국제영화제)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일정표, 부산국제영화제 야외무대인사 오픈토크 행사 일정표. 부산국제영화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춘몽'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덕혜옹주 손예진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필자는 동래읍성 역사 축제를 앞두고 송공단을 찾았습니다. 송공단이 어떤곳이냐고요??? 송공단은 1592년 일본이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5월 23일(음력 4월 14일)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우리의 치욕사 중 하나인 임진왜란입니다. 부산은 일본에게는 조선을 치기 위한 하나의 교두보였습니다. 왜군은 5월 24일 정발장군이 막았던 부산진성을 먼저 치고 동래읍성으로 진격했습니다. 






☞2016/10/06 - [부산 축제]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제22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려요. 동래읍성역사축제









당시 동래읍성은 동래부사 송상현께서 성문을 지켰습니다. 동래읍의 백성과 송상현은 죽음을 각오하며 한 뜻으로 끝까지 싸웠으나 종과부족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송상현은 갑옷에다 관복을 걸치고 북쪽의 선조에게 예를 올린 뒤 부채에다 부모님께 올리는 한시를 적었습니다.







송공단 주소: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229-78

송공단 문의 전화:051-550-4161







“孤城月暈(고성월운: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지만)

列鎭高枕(열진고침:여러 다른 진영에서는 도와줄 기척이 없습니다)

君臣義重(군신의중: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父子恩輕(부자은경:부모와 자식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

송상현부사는 포로가 되었으며 항복할 것을 강요받지만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자 정원루에서 그를 처참하게 살해했으며 그의 첩인 금섬 또한 그를 따라 자결하였습니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에는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1호인 송공단이 있습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휘하 장졸을 모신 제단으로 1742년인 영조 18년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단을 만들기 전에는 순절한 정원루터에 있었는데, 동래성의 남문 밖인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인 농주산입니다.







 농주산에다 임진왜란으로 순절하신 분을 모신 제단을 쌓고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과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신 모든 분을 모셨습니다. 1742년 제단은 지금 모습과 달리 동서남북 4단인 열십자 형태였습니다.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 등,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등,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 등, 남단에는 향리 송백 등을 모셨고 매년 음력 4월 15일 관에서 그들을 기리는 제사를 올렸습니다.





1760년에 와서는 부산진 첨사 정발과 이정헌을, 1766년에는 다대첨사 휸흥신을 함께 송공단에서 배향했습니다. 그러다 동래성에서 순절하신 분만 따로 모시게 되었고 다대포에서 순절한 윤흥신은 윤공단에, 부산진에서 순절하신 정발장군은 정공단으로 옮겨 각각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송공단은 2005년 11월에 1767년 ‘충렬사지(忠烈祠志) 기록에 나온 대로 복원한 상태이며 7단 16기로 구성했습니다. 중앙에다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 동단에는 조영규와 노개방을, 서단에는 문덕겸 등을 모셨으며 따로 송상현의 첩 금섬 등을 모셨습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본관은 여산이며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또는 한천이며 시호는 충렬입니다. 송공단은 동래시장 뒤쪽에 있습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범어사. 호국사찰 금정산 범어사 여행


부산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큰 규모인 금정산 범어사. 범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로 양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입니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과 부산 최고의 사찰인 범어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그 유래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2016/10/01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범어사 당간지주. 사찰을 표시하는 당을 걸었던 당간은 없고 범어사에는 범어사 당간지주만 남았네요. 범어사 당간지주

2016/09/30 - [여행] - (부산여행)금정산 범어사 조계문. 범어사의 얼굴인 웅장한 일주문 조계문을 만나다. 범어사일주문 조계문

2016/09/29 - [여행] - (부산여행)금정산 범어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금정산 범어사 대웅전 외벽의 담벽에서 만난 대웅전의 아름다움이 대단.



범어사 일주문 조계문


유래를 보면 금정산 산정에 50척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사시사철 물이 가득하며 마르지 않는 샘이 있습니다. 물빛은 항상 금빛을 띠고 있어 그곳에는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온 금어가 살고 있다 하여 금정산과 범어사의 설화가 탄생했습니다.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대사께서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678년에 창건했습니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도 범어사가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되어 있는 게 범어사 창건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천왕문 


그리고 범어사의 창건 설화를 보면 신라 문무왕 당시 왜군의 침입이 잦아 대왕이 항상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차에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인이 신라를 공격해온다는 소문으로 대왕은 수심에 가득 차 잠이 들었는데 꿈에 선인이 나타나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을 불러 ‘화엄신중기도’를 권하며 사라졌습니다.





문무왕은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올라 7일 동안 화엄신중독송을 외웠습니다. 그러자 남해의 왜선은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죽고 죽이더니 물러갔다 합니다. 문무왕은 크게 기뻐하며 의상에게 이곳에다 절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게 오늘날의 범어사입니다.


 

보제루


그러니까 범어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왜구를 진압했던 비보 사찰인데 이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임진왜란에는 서산대사가 범어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조직하자 그것을 알게 된 왜군은 범어사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고, 1919년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과 범어사 스님의 독립운동입니다.


 




구포 나루에서 3.1만세 독립선언문 초안을 몸에 품고 왜경의 눈을 피해 금정산을 넘어와 범어사에 도착하여 밤새워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범어사 스님과 부설학교인 명정보통학교(현 금정중학교) 학생은 동래장터에서 부산 최초의 3.1운동을 주도하다 스님과 학생은 투옥되었고 학교는 폐교되는 등 부산의 항일 운동은 범어사를 시작으로 들불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범어사의 현존하는 건물은 모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에 건립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범어사를 호국사찰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범어사는 10여 년간 폐허가 되었습니다.





문무왕의 청으로 의상이 창간했던 범어사는 전각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았으며 웅장했다는데 그만 왜적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으며 선조 35년인 1602년에 관선사에 의해 중건하지만, 다시 화재로 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여러 스님에 의해 법등의 불을 밝히는 중창을 하여 오늘날 범어사의 뿌리가 됩니다. 범어사의 가람배치를 보면 산지가람의 특성상 일반사찰과 다른 모습입니다. 맨 아래에다 일주문인 조계문을 세우고 그다음에 천왕문, 불이문을 배치했습니다.



 

 



범어사의 강당인 보제루는 불이문에서 7m의 높이에 계단을 만들어 그 위에 세웠는데 보제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섭니다. 근래까지는 보제루를 돌아서 대웅전 앞마당에 다다랐는데 일제강점기 때 보제루가 변형되어 그 모습이 많이 훼손되어 호국사찰인 범어사에서 일제 잔재가 왼 말이냐며 지금은 삼층석탑의 난간 철거와 함께 보제루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범어사에서 가장 큰 규모답게 당당하며 웅장합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둘러보면 범어사의 모든 전각이 보일 정도로 넓게 조성되었습니다. 보제루 좌우로는 심검당과 비로전, 미륵전을 각각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뒤쪽으로는 선원과 스님들의 요사채, 종무소를, 심검당 뒤로는 강당 등 승려들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당 끝에는 삼층석탑과 고려 시대 석등 사이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대략 8m의 축대 위에 1613년에 중수된 대웅전이 보무도 당당한 모습입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지금은 수리 중인 관음전과 일로향각이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명부전과 서향각이 그리고 한 단 높여 한일자로 길게 이어진 건물은 팔상전·독성각·나한전입니다. 제가 이번 범어사 여행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본 곳입니다.
















화려하기로 그지없는 독성각의 문살과 조각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세히 보면 독성각의 눈길을 잡는 것은 무지개형의 문틀 좌우로 모란꽃이 조각되었고 그 밑에 보살 두 분이 각각의 꽃을 받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꽃무늬 문살 또한 독성각의 격조를 한층 더 높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참을 넋을 잃고 문틀 조각을 봤습니다.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전각은 18세기 초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가운데 천태문만 있었으며 1905년 중수하면서 앞면 7칸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독성각은 스승을 모시지 않고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말하는데 이는 나반존자를 말하며 이번 범어사 여행을 하면서 파도 파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범어사의 전각들은 저를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게 합니다. 다음에 범어사의 다른 전각을 만나기 다시 위해 찾아야겠습니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불




범어사 부도





 금정상 고당봉


 



금정산 범어사의 유래인 금샘. 금정산 산정에 50척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사시사철 물이 가득하며 마르지 않는 샘이 있습니다. 물빛은 항상 금빛을 띠고 있어 그곳에는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온 금어가 살고 있다 하여 금정산과 범어사의 설화가 탄생했습니다.



범어사 주소: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전화:051-506-3122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복병산 배수지. 일제강점기 건설된 부산 최초 상수도 시설 복병산 배수지.


일제강점기에 우리 부산과 양산에는 총 3곳의 수원지가 건설되었습니다. 흔히 꽃마을로 불리는 구덕 수원지와 초읍어린이 대공원이 있는 성지곡수원지 그리고 또 한곳이 양산 동면의 법기 수원지입니다.









3곳 모두 일본인들의 거주지에 식수공급을 위해 세워졌는데 법기수원지는 당시 온천장과 남산동 등 동래구 쪽에 공급되었으며 구덕 수원지는 서구 등 일본인이 집단거주지역으로 공급하였고 성지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성지곡수원지의 물은 중구 복병산 배수지까지 공급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부산진구의 백양산 골짜기에 있는 수원지의 물을 침전시켜 멀고도 먼 복병산배수지까지 끌고 와 각가정에 공급했다고 하니 당시 수도관개시설로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병산배수지 또한 일반 배수지 형식을 따랐습니다. 땅을 파고 지하에다 물을 담는 통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또한, 여과시설의 입구와 벽체는 물을 잘 흡수하지 않는 붉은 벽돌로 불리는 내화벽돌을 쌓았으며 벽체의 위쪽에는 석재로 마감하였습니다.







복병산 배수지는 총 3동이며 왼쪽 저수시설 2동은 일본인에 의해 1910년에 건설하였으며 1973년에는 식수해결을 위해 오른쪽 동을 증축했습니다. 복병산 배수지의 입구를 장식하는 무지개식 석조문틀에 걸린 현판에는 ‘요지무진(瑤池無盡)’의 4글자가 써져 있는데 그 뜻을 보면 ‘선경의 물처럼 마르지 말라’입니다.







지금은 성지곡수원지는 폐쇄되었지만 복병산 배수지는 부산 시민들에게 현판의 뜻처럼 지금도 선경 명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북병산 배수지는 그 면적이 2,944.2㎡입니다. 부산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며 일본인의 급수 시설이지만 부산지역에도 본격적인 상수도 시설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산의 복병산 배수지는 우리 부산 근대 상수도 시설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부산 초창기의 상수도 시설로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7월에 부산광역시 등록문화재 제327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복병산배수지는 부산시민의 식수원은 물론이며 현재 지역민의 쉼터이자 건강한 휴식처인 체육공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복병산의 유래를 보면 초량왜관이 가까워 일본인들의 난동과 풍기문란, 밀거래 상인 등을 막기 위해 병사들이 잠복하기 위한 복병막(伏兵幕)을 설치한데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복병산 배수지 주소:부산광역시 중구 샘길 10(대청동 1가 6-4)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범어사 당간지주. 사찰을 표시하는 당을 걸었던 당간은 없고 범어사에는 범어사 당간지주만 남았네요.



오래된 사찰 입구에 똑같은 모습을 한두 개의 돌기둥이 있습니다. 이를 당간지주라 하는데 그 역할은 사찰의 표시등 다양한 용도의 깃발을 거는 데 필요한 장대인 당간을 세우기 위한 고정시설물을 말합니다.








2016/09/30 - [여행] - (부산여행)금정산 범어사 조계문. 범어사의 얼굴인 웅장한 일주문 조계문을 만나다. 범어사일주문 조계문

2016/09/29 - [여행] - (부산여행)금정산 범어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금정산 범어사 대웅전 외벽의 담벽에서 만난 대웅전의 아름다움이 대단.






흔히 당간은 돌 또는 쇠, 그리고 나무로 되었는데 양산에 있는 통도사의 당간은 돌을 깎아 세웠다면 계룡산 갑사의 당간은 철로 만들녀 졌던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범어사의 당간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범어사 창건 사적’과 ‘범어사 사적비명’에 33단의 철당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철당간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아주 귀한 문화재가 될 뻔 했는데 안타깝게도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범어사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33이란 숫자는 불교에서 이상의 세계인 33척을 나타낸 것인데 당간에 그 숫자를 부여한 것을 보면 절에서 당간의 의미가 아주 크다 하겠습니다.





범어사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 범어사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보다는 늦은 시기에 세워졌습니다. 또한, 범어사 당간지주는 돌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하지 않고 약간은 투박한 듯하며 소박한 느낌까지 듭니다.










당간지주의 높이는 4.5m에 아주 큰 규모로 이 정도의 크기면은 당간의 규모는 대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간지주는 가로가 50cm, 세로가 87cm이며 기둥의 간격은 79cm로 지주는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끝머리가서는 둥글게 처리했습니다. 현재 범어사 당간지주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입니다.





옛날 물을 받아 보관 했던 돌그릇인 수조는 지금은 어항으로 사용중입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금정산 범어사 조계문. 범어사의 얼굴인 웅장한 일주문 조계문을 만나다. 


모든 사찰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저는 생각하기로 그것은 주지 스님의 얼굴도 아니고 대웅전도 아니며 사찰을 들어서면 입구에서 만나는 웅장하거나 소박한 모습을 한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을 보면 대부분 사찰의 규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정산 범어사에서는 여타 사찰의 일주문과 조금은 색다른 일주문을 보게됩니다.





 



일반 일주문은 기둥이 2개뿐이지만 범어사 일주문은 ‘조계문’으로 불리면서 4개의 우람한 돌기둥에 아름다운 공포에 화려한 단청을 입혀 범어사의 얼굴로는 조금의 손색도 없습니다. 범어사의 얼굴답게 조계문은 그에 걸맞은 보물 제1461호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범어사 조계문을 들어서야만 드디어 범어사 경내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들어서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가 조계문 앞에 빗돌로 남아 있습니다. 일주문을 두고 “보통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삼해탈문이라”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보통 일주문은 2개의 기둥에 양쪽, 네 귀퉁이에 보조로 기둥을 받쳐 안정감을 주는 게 상식인데 범어사 조계문은 이런 방식을 하지 않고 한일자로 길게 4개의 큰 기둥을 세웠습니다. 보기에도 웅장하며 튼튼해 보이고 무엇인가 안정감을 더욱 들게 합니다.


 





범어사 조계문이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범어사의 다른 건물과 함께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때 1614년인 광해군 6년에 당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전란을 일으킨 왜(倭)의 전초기지는 부산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범어사는 짐작하건대 아마 쑥대밭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란이 끝나고 세월이 지나 묘전 화상이 다시 범어사전각들을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함께 세우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범어사 조계문을 살펴보면 네 기둥에다 모두 돌을 깎아 기다란 초석을 하고 그 위에는 굵고 짧게 배흘림을 한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건립과 함께 이 돌기둥이 있었던 게 아니라 1718년 숙종 44년에 명흡대사께서 기존의 기둥을 빼내고 새로 바꾸었으며 1781년 정조 5년에 백암선사께서 지금의 일주문인 조계문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계문은 앞면 3칸에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에다 다포양식입니다. 지붕 또한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데 이를 스스로 4개의 기둥으로 무게를 지탱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요즘 경주에서 발생한 5.8 강진에도 한일자로 길게 늘어 쓴 일주문이 끄떡도 없이 견디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고 대견합니다.





범어사 주소: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범어사)  

범어사 전화:051-508-3122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금정산 범어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금정산 범어사 대웅전 외벽의 담벽에서 만난 대웅전의 아름다움이 대단.  


제가 부산에 살고 있으면 금정산을 오르고 아니면 고당봉에서 내려오거나 하면서 매번 통과하는 게 부산 최대 사찰인 금정산 범어사입니다. 그래도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마음만은 항상 부처님을 찾는 반 불교도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항상 범어사를 다녀서 그런가 다른 오래된 사찰처럼 많은 문화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뭐 항상 수박 겉핥기로 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하여튼 지금까지 범어사를 너무 소홀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범어사를 연달아서 3번이나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대웅전을 보면서 전에 그리 보고 다녀도 외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희미하게 그려진 벽화를 보게 되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흥분의 도가니였다고나 해야할까요. 대웅전을 정면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대웅전 우측 벽 상단에 힘이 넘쳐 흐르는 긴 꼬리에 허리는 잘룩하며 경계하는 듯 네 발에 힘이 들어가고 두 눈을 부라린 백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호랑이의 입은 또 어떤가요.


 

 

 

 


크게 입을 벌리며 웃는 듯한 모습을 하면서 역시 백수의 왕 호랑이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호랑이와 함께 백학과 백록(사슴)의 모습을 보면서 사찰 대웅전에다 왜 이런 짐승을 그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호도 그러하고 사슴과 학까지 귀한 흰색을 나타내는 것은 대웅전을 지키는 비보 역할인가 생각해봅니다. 지금 대웅전 외벽의 방풍판 안쪽에 있지만, 비바람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 벽의 벽화는 그나마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우며 어서 빨리 대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범어사 대웅전은 1966년 2월 28일 보물 제4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범어사의 중심법당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며 왼쪽에는 미래불인 미륵불과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를 보살의 모습으로 모셨습니다



 


왼쪽에는 미래불인 미륵불과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를 보살의 모습으로 모셨습니다. 대웅전의 주존불은 1661년 현종 2년에 조각승 희장이 제작한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으로 사 대웅전과 함께 2007년 9월 16일 보물 제1526호에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개금불사를 한 생태입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이며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행했던 다포식 맞배지붕 양식으로 범어사 대웅전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기 회에 범어사 대웅전을 보면서 문화재의 화려한 겉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내면의 모습을 중시 여겨야 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웅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또다시 범어사 대웅전을 찾아야겠습니다.


 

 

 

 

 

 


◆부산 범어사 정보 안내

★ 범어사 주소: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

★전화:051-508-3636



(제주여행/제주가볼만한곳)선녀와 나무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60~70년대 풍경을 추억 태마 공원 선녀와 나무꾼에서 되살리다. 


제주 선녀와 나무꾼에서 궁핍했던 시절의 60~70년대 풍경을 만나고 왔습니다. 선녀와 나무꾼은 2만여 평의 너른 터로 건물은 3천 평이며 그 안을 모두 추억의 테마전시관으로 꾸몄습니다. 7080세대인 50대들은 조금은 공감하며 고향의 향수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추억의 테마공원 선녀와 나무꾼은 2008년 5월에 개장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정식으로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상설 박물관으로 등록되어 추억을 전시하는 규모로 는 걸어서 다리가 아플 정도니까 국내 최대 규모라 하겠습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시품은 우리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모두 사용했던 제품으로 채워져 있으니까 더욱 애착이 가는 곳입니다. 특히 젊은 층은 부모님 세대의 고생담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는 없지만, 추억의 테마공원에서 간접경험을 할 수 있으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당시 힘들었던 수많은 세월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견뎌왔다며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주여행에서 화려하고 유명한 관광지도 많습니다. 그러나 추억의 태마 전시관이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서 추억을 곰 씹어보세요.


◆제주 추억 테마공원 선녀와 나무꾼◆

 

제주 선녀와 나무꾼

 

선녀와 나무꾼 전화:064-784-9001

 

선녀와 나무꾼 주소:제주특별시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997

 

선녀와 나무꾼 입장료:성인 9천원, 어르신·청소년 7천원, 어린이 6천원

 

선녀와 나무꾼 홈페이지:www.namuggun.com

 

 

2016/09/27 - [여행] - (제주여행)섭지코지. 제주여행 초보라면 꼭 가봐야 할 여행지 , 동화속의 궁전 같은 섭지코지. 섭지코지


 

 

 

 

 선녀와 나무꾼 입장료



 

 

 

 

 

 

 

 

 

 

 

 

 

 

 

 

 

 

 

 

 

 

 

 

 

 

 

 

 

 

 

 

 

 

 

 

 

 

 

 

 

 

 

 

 

 

 

 

 

 

 

 

 

 

 

 

 

 

 

 

 

 

 

 

 

 

 

 

 

 

 

 

 

 

 

 

 

 

 

 

 

 

 

 

 

 

 

 

 

 

 

 

 

 

 

 

 

 

 

 

 

 

 

 

 


 


(제주여행/제주가볼만한곳)섭지코지. 제주여행 초보라면 꼭 가봐야 할 여행지 , 동화속의 궁전 같은 섭지코지.



두 해 전에 제주도여행을 하면서 섭지코지를 다녀왔습니다. 당시에 함께한 일행과 짜인 일정 때문에 공항에 가기 전 급히 들러본다고 봉수대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등대를 눈물을 머금고 눈팅만하며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다시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섭지코지를 방문했습니다.







 


섭지코지 주차장을 출발하여 등대로 바로 달렸습니다. 등대 뒤쪽 성산 일출봉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봉수대를 스치듯 지났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동안 바뀐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숨을 할딱이며 올라선 등대는 동서남북 시원한 조망을 열어주었으며 섭지코지를 찾는 관광객은 모두 등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역시 등대에 올라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돌아가지 않고 섭지코지 뒤쪽 해안을 돌기로 하였습니다. 성산 일출봉이 더욱 가까이에서 어서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이번에도 날씨는 맑지 않아 뿌연 모습입니다. 그래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성산 일출봉이 더욱 전설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대가 있는 섭지코지 오른쪽 끝에는 촛대를 닮았다는 뾰쪽하게 생긴 바위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촛대바위인데 바위에는 하늘의 선녀와 용왕의 아들이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섭지코지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워 내국인이든 외국인은 꼭 찾는 관광지입니다.


 

 

 

 

 

 


아마 옛날에는 섭지코지가 더욱 아름다워 하늘의 선녀가 봐도 반할 선경이었나 봅니다. 매일 선녀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머물다 하늘나라로 올라갔는데 마 그 광경을 용왕의 막내아들이 보고 말았습니다. 선녀를 보고 반해 식음을 전폐하며 아버지 용왕을 못살게 볶았나 봅니다.


 

 

 

 

 

 


할 수 없이 용왕은 아들에게 100일을 기다리면 너의 소원인 선녀와 결혼을 시켜주겠다.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루 이틀 날짜는 더디게만 지나갔지만 그래도 널짜는 흘러 어느덧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잠잠하던 하늘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이며 태풍이 몰려 왔습니다.


 

 

 

 

 

 

 

 


날씨 때문에 하늘의 선녀가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용왕은 너의 정성이 부족하여 이런 사단이 낫는 모양이다 하니 왕자는 매우 슬퍼한 나머지 섭지코지에서 그만 선체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며 촛대바위 또는 선돌 바위라 합니다. 2003년도에는 이곳에서 드라마 ‘올인’이 촬영되었습니다.


 

 

 

 


당시 아름다운 영상미로 드라마의 재미는 절정이었습니다. 그 드라마세트장이 요즘은 꼭 동화 속의 궁전 같은 모습입니다. 섭지코지는 제주도 방언으로 좁은 땅을 의미하는 ‘섭지’와 ‘곶’을 뜻하는 코지가 합성되어 붙여졌습니다. 섭지코지 이름도 경치만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외에도 일본과 가까워 왜구의 출몰이 빈번하여 이를 감시하는 봉수대가 있었으며 협자연대라하였습니다. 그리고 휘닉스 아일랜드 건물이 녹색의 초지와 어울려 꼭 외계인의 게이트를 닮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찌직 찌직 하고 문이 열리며 눈이 왕방울만 한 외계인이 내려설 것 같습니다.


 

 

 

 


이곳의 화산석이 다른 곳과 다르게 아주 붉은 모습입니다. 이는 ‘송이’라는 화산재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풀을 뜯고 있는 제주마를 보면서 너무나 평화로와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이곳에서 돌아 나와 휘닉스 아일랜드로 돌아 나왔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의 기를 정면으로 받는다는 ‘정동향’ 안내판이며 서 있으며 섭지코지 입구로 돌아나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여 공동으로 제를 지냈다는 포제단을 지나는데 따각 따각하며 말발굽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소리 나는 쪽으로 돌려보니 마차가 저쪽에서 경쾌한 움직임으로 신나게 오고 있었습니다


 

 

 

 

 

 

 

 

 

 

 

 

 

 

 

 

 

 



◆(제주여행)섭지코지 여행 정보 안내◆


★섭지코지 주소:제주특별자치도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87

섭지코지 전화:064-760-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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