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만옥정공원, 진흥왕척경비 창녕척화비 창녕객사 퇴천삼층석탑 만옥정공원 


와우, 창녕에 자주 가지만 창녕 주민을 위한 휴식공원이 이리 많은 줄 몰랐습니다. 

문화재도 많지만, 우포늪, 남지체육공원, 창녕문화공원, 영산연지못, 남산호국공원, 창녕함안보와 합천창녕보등 산책이면 산책, 자전거면 자전거길 등 공원과 낙동강 보 하며 다양한 게 정말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만옥정공원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만옥정공원안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가득해서 더욱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면적은 1만㎡이며 도심 공원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규모였으며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대원군의 창녕척화비, 창녕 객사, 퇴천삼층석탑, 유엔전적비, 창녕현감비군, 지석묘가 공원을 가득 채웠습니다.

 




창녕 만옥정공원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3

창녕 만옥정공원 전화:055-530-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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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4월에는 벚꽃공원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창녕신라 진흥왕척경비 앞의 벚나무에 벚꽃이 필 때는 정말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생각날 것 같았습니다. 

유엔전적비를 지나면 흥선대원군의 창녕척화비가 있습니다. 

척화비는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서양인을 배척하고자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이 이를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창녕척화비는 높이 1.23cm, 폭 46cm, 두께 20cm인 화강암으로 다듬었으며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짓이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창녕읍 교화리에 있던 것을 광복 이후 만옥정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그 왼쪽 작은 언덕에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각을 세워 보호하는 게 다른 문화재하고 달라도 정말 달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럴 만도 했습니다. 

비석인데요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입니다. 

창녕군 안에서는 나라의 보배인 국보는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과 함께 딱 두 점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위엄있어 보였습니다.



창녕신라 진흥왕척경비는 넓은 자연 암석을 이용해서 대충 다듬은 다음에 비문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중국 육조풍의 해서체로 새겨졌으며 모두 27행에 643자가 쓰였습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세운 3곳의 순수비에 나타나는 ‘순수광경’이라는 제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순수비가 아니라 영토를 넓히고 신라의 국경을 표시하는 비를 뜻하는 척경비라 합니다. 



그러나 왕을 수행했던 신료의 명단 등이 나와 있어 순수비에 속한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비문 내용에서 전반부는 마멸되어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나 첫머리에 ‘신사년이월일일립(辛巳年二月一日立)’의 글자가 확인되어 이 진흥왕 척경비는 561년인 진흥왕 22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의 후반부는 알아볼 수 있는데 대략 400자가 정도를 판독하였다 합니다. 

비문의 후반부에서 보면 어가를 수행한 관리의 관직명과 출신지역과 수행 순서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퇴천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이층의 기단에 탑신을 세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랐습니다. 

상륜부는 분실했으며 위층 기단과 갑석 일부는 부서져 없어졌으며 기단의 면석에는 양쪽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새겼습니다. 



각층의 몸돌 양 모서리에 기둥인 우주를 새겼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그 옆에는 창녕 객사 건물입니다. 

이 객사는 창녕 관아의 부속건물 중 하나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수 없다고 합니다. 

300~400년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객사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술정리로 옮겨졌다가 1988년 다시 현재의 위치인 만옥정공원내에 이전했습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 외국사신이 머무는 숙소이며 또한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객사 건물의 배치는 종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주건물과 좌우에 익사를 두어 건립되는데 창녕 객사는 주건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창녕 객사 건물은 벽체와 창호는 없고 지붕에 기둥만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본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하겠습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1호.












마지막으로 창녕현감비군입니다. 

역사가 깊은 고을이면 입구에 쭉 늘어서 있는 게 고을을 다스렸던 관리의 선정비입니다. 

신라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창녕에 부임했다 떠나는 부사. 현감과 어사 관찰사가 베푼 선정에 떠나는 것이 아쉬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을 백성이 세운 비석입니다. 

창녕 고을의 선정비가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은 것을 보면서 오랜 창녕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했습니다.

 











(부산여행/부산지구여행)부산시민공원과 부산시민공원역사관 여행, 부산시민공원


옛 하야리아 부대가 지금은 부산시민공원이 되었습니다. 

6.25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였고 그 후 반환받아 부산 시민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산시민공원은 그 역사가 오롯이 부산시민공원역사관에 전시하고 있어 찾게 되었습니다.






부산시민공원 부산시민공원역사관 주소: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195

부산시민공원 부산시민공원역사관 전화:051-850-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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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 하면 캠프하야리아 부대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부산시민에게 각인된 미군 부대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에 주둔했는지 어떤 연유로 주둔했는지 하면 잘 모릅니다.

그 이전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이곳의 역사를 알고 싶어 찾았던 부산시민공원역사관. 그 역사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말기의 범전은 백양산이 흘러내린 구렁지이지만 비옥한 농지에 주거지였습니다. 

그런데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조선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이란 핑계로 토지를 수탈하여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회사, 일본 지주에게 헐값으로 넘겨주면서 우리 농민은 졸지에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옛 캠프하야리아부대 장교클럽





그리고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에 투입되어 현재 부산진구 일대에 공업지구가 만들어지면서 근대 식민지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게 이어져 광복 이후에도 부산을 대표하는 큰 공장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중산층이 몰려들었고 이들의 소비와 여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한 방편으로 오락시설인 서면 경마장이 1930년에 준공합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세수확보와 군사적인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경마장에다 기마 부대를 설치하는 등 병참기지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서면경마장 부지에 제72 병참경비대를 설치하여 군수물자의 수송 안전을 확보하며 동남아에서 잡은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한 임시군속훈련소(노구치부대)를 만들어 포로감시원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 때까지는 일본군 군수품야석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곳에 미군 부대가 들어서게 된 것은 1950년 한국동란 발발 후에 미군이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주한미군 사령부가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한국전쟁이 휴전되면서 주한미군사령부는 서울 용산기지로 옮기고 부산의 하야리아부대는 주한미군의 군수물자보급을 담당하는 보급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하야리아부대의 업무를 이관시키면서 폐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8월에 부산시민공원 조성 기공식이 이루어졌으며 3년 만인 2014년 5월 부산시민공원이 정식 개장해 부산시민의 휴식처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부산시민공원을 둘러보면은 말굽거리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경마장소와 마권판매소 원형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경마 트랙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공원조성을 할 때 일부 단절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복원했다고 합니다. 

현재 경마 트랙의 느낌을 살리려고 황토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부산시민공원역사관의 건물은 하야리아 부대가 있을 때는 장교클럽으로 사용했습니다. 

1949년경에 준공하여 서면경마장과 미군부대 부속건물로 사용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인 캠프하야리아가 설치되면서 미군 장교의 식사·연회· 부대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합니다. 

이외에도 사령관관사, 극장, 퀀셋 막사, 학교, 위관급관사 등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역사관 옆에는 비로자나반가석불과 협시불이 세워져 있습니다.이와 함께 마두관세음보살 표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석불은 경마대회를 하면서 사고나 병들어 죽은 말의 위령재를 지낼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부산시민공원역사관은 무료관람입니다. 

부산시민공원 내에 있으며 관람 시간은 19:00~18:00(입장마감은 17:00)

휴관일은 1월1일, 매주 월요일(단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다음날 휴관)







부산시민공원역사관에서 캠프하야리아부대 역사 사진으로 알아보기  













































 죽은 말의 위령재를 위한 비로자나반가석불과 협시불








(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 학동 진석중 가옥. 몽돌로 유명한 거제도 학동마을 거제 학동 진석중 가옥


거제도에는 학동마을 앞 해안가에 몽돌이 유명합니다. 

학동 몽돌해변은 그 길이도 엄청나게 길어서 처음 그 광경을 보고는 우리나라 해안가에도 이런 신기한 곳이 있구나 했었을 만큼 신통방통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학동은 몽돌이 천지삐까리로 많습니다. 

그리고 도장포마을의 바람의 언덕, 신선대, 해금강 마을과 해금강 전망대, 우제봉을 들어가는 입구에 학동마을이 있습니다.




2018/03/20 - [여행] - (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바람의 언덕, 도장포마을, 신선대 여행



 


이곳 학동에는 몽돌해변 이외에도 등록문화재 제277호인 거제 학동 진석중가옥이 있습니다. 

거제 학동 진석중가옥은 1947년에 지어진 한옥 기와건물입니다. 

지금은 주위에 화려한 펜션 등에 가려져 진석중가옥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진석중가옥은 등록문화재라 하지만 대문도 없고 관리는 부실해 보였습니다.

 






마을 주민의 이야기로는 60년 전만 해도 거제도에서 최고 유지 중 한집안이며 떵떵거렸다고 합니다. 

당시에 어촌의 집 규모로는 대단했으며 광채도 큼지막한 게 학동 마을의 어선은 대부분 진석중 가옥 배였지 했습니다. 

마침 주인장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을 좀 보고 싶다며 인사를 드렸더니 보고 가라고 했습니다.





전에도 한번 보고 갔던 곳입니다. 

진석중가옥의 특징은 한옥과 일본식 건축이 절충된 양식이며 해방 이후에 지은 상류층 건물입니다. 

건물은 안채, 별채, 창고, 대문으로 ‘ㅁ’자형 입니다. 

진석중가옥은 현재 후손이 생활하고 있어 자세히 볼 수 내부를 볼수 없지만, 건물의 구조는 벽장과 창호, 입구의 별채는 욕실과 화장실이 집안에 딸린 구조입니다.








당시 모든 집은 화장실을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대문에다 많이 두었는데 집안에 두었다는 것은 현재 가정집의 구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실용적인 집 구조였습니다.

 화장실이 건물 내부에 있다는 별채를 보면 ‘一’자형 평면 구조에 뒷부분에 화장실과 욕실을 배치하고 복도와 연결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안채는 가족의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생활의 편리한 부분은 별채에다 넣어 기능성을 우선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어릴 때는 농촌에 살았지만, 밤에 멀리 있는 화장실에 한번 가려면 죽을 맛이었습니다. 

요런 거 생각하면 당시로써는 정말 획기적인 살림집 구조입니다. 

거제 학동 진석중가옥은 근대 건축물로서 경남 남해안 도서지방의 상류층 살림집 특징과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어 보존가치가 아주 높은 건물이라 합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함월산 기림사. 왕의 길, 경주 함월산 기림사 여행


지난 가을여행에 경주에서 가장 골짜기라 해도 괜찮을 도통골에 자리한 기림사를 다녀왔습니다. 

기림사는 신문왕의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곳입니다. 

신라 수도 서라벌에서 부왕인 문무대왕을 만나려면 이곳 기림사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토함산 옆인 추령으로 도로가 뚫렸지만, 

당시에는 기림사를 거쳐 넘어다녔습니다.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7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전화:054-744-2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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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 천왕봉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문무왕의 무덤을 감포 앞바다 암초인 대왕암에 장사를 지낼 때도 이 길을 넘어다녔으며 이견대에서 신통한 피리인 만파식적을 구할 때도 이길로 다녔습니다.  

지금은 옛길을 새롭게 발굴하여 왕의 길이라 부르며 봄 여름 가을 많은 관광객이 이 길을 걸으려고 찾습니다.



왕의 길 중심에 자리한 기림사는 오래된 절의 내력에서 보듯이 기림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재미있습니다. 

기림사의 창건은 인도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이 임정사를 세웠다 합니다. 옛날 인도 범머라국에는 임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광유성인이 오백제자를 모아 놓고 설법을 하며 중생을 제도했습니다.

 


서천국에는 400여 개의 소국을 다스리는 사라수대왕이 있었는데 무상도에 관심이 많아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광유성인은 사라수대왕을 임정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사라수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먼 길도 마다치 않고 출발했습니다.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비는 다리가 아프다 했고 사라수대왕은 왕비를 장자의 집에 비녀로 팔고 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계속 나아갔습니다.

 


대왕은 광유성인을 만났고 임정사에서 왕생계를 외우며 수행정진 했습니다. 

사라수왕의 왕비는 장자의 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는 ‘극락’을 뜻하는 ‘안락국’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아기였던 안락국은 7년 만에 부왕인 사라수대왕을 만났으며 부왕의 가르침을 받아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림사 진남루

광유성인은 해동의 남쪽 땅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전하라며 안락국에게 떠나라 합니다. 

스승의 명을 받은 안락국은 계림국의 명당에 절을 짓고 임정사라 했습니다. 

그 뒤에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신라 최초 절이라는 뜻으로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기림사라 했습니다.



이게 기림사의 출발이며 기림사의 현판에는 함월산 기림사라 되어 있습니다. 

절을 감싸고 않은 산이 경주 함월산이기 때문입니다. 

기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보통 사찰 영역의 출입문을 뜻하는 천왕문은 제법 걸어가야 합니다. 

천왕문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악귀로부터 불법을 수호하고 절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곳을 지나야만 비로써 기림사 경내에 들어섭니다. 

기림사는 창건 당시부터 대적광전이 있었다 합니다. 

법당에는 삼신 여래를 모셨으며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불과 석조 오백나한 상을 모신 응진전. 삼층목탑, 정광여래사리각, 진남루, 무량수전 건물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정광여래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기림사의 문화재를 보면 정면 가장 큰 규모가 대적광전입니다. 

단층이 벗겨졌는지 알 수 없지만, 무채색의 건물은 묵직한 느낌이었습니다. 

보물 제833호. 금자사경은 보물 제959호이며 유물전시관에는 종이로 만든 보물 제415호 건칠보살상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과 진남루 등은 기림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문화재입니다. 

기림사는 ’한국 33 관음성지‘이며 전통사찰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기림사 대적광전

기림사에서 눈길이 가는 목재 건축물은 진남루입니다. 

새롭게 복원을 했지만 한눈에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이며 건물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진남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림사는 승병과 수군의 훈련장소 였으며 그때 불린 이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림사 응진전·삼층석탑

앞면 7칸에 옆면 2칸,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 자를 한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우물마루에다 판벽은 창호가 있었으나 사용용도가 바뀌면서 지금의 진남루는 원형이 바뀌어 알 수 없습니다.


기림사 약사전



응진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며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습니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건물입니다. 

기림사 약사전은 1600년대에 처음 지어져 1654년(효종5년)에 중창되었고 1678년(숙종 4년)에 약사 법당을 중수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면 3칸에 옆면 1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를 대표하는 본전건물입니다. 

지혜의 빛을 세상에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629년인 조선 인조 7년과 1793년 정조 17년에 고쳐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1862년(철종 13년) 기림사에서 일어난 대화재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건물입니다.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축양식입니다. 

이 밖에도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유물전시관, 매월당 등 건물이 있지는 근래에 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의 변모가 갖추어져 기림사의 옛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기림사 관음전










(경북여행/포항여행)포항 선바위 둘레길. 호미반도해안둘레길 포항 동해면 호미곶 선바위 


한반도를 포효하는 호랑이에 비유합니다. 

그 호랑이의 꼬리가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호미곶입니다. 

포항 호미곶에는 호미반도해안들레길을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 핵심적인 곳이 동해면의 입암리와 마산리를 잇는 700m의 포항 선바위길입니다. 

호미곶에는 하늘을 받치듯 한 사람의 손 형상을 세워놓아 새해에는 일출과 함께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입니다. 

그때 겸사겸사 해서 찾으면 정말 좋은 곳입니다.




포항 선바위 둘레길 주소: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입암리




2017/12/01 - [여행] - (포항여행)포항 운제산 오어사와 오어지, 가을빛이 내려 앉은 오어사와 오어지 갤럭시 노트5로 담다.




포항 시내에서는 오천읍을 거쳐 동해면으로 가는 그 가운데 해안가에 입암마을이 있습니다. 

이 도로가 영일만을 가던 옛길이며 자동차 드라이브코스로는 최고로 엄지 척입니다. 

선바위는 절벽 밑에 숨어 있어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내판을 잘 보고 가야 합니다.







선바위와 하선대는 바다 위를 걷습니다. 

종아리를 동동 걷어서 바닷속을 뛰어든다고 싶겠지만, 바다에다 덱을 깔아놓아 전혀 바지를 안 걷어 올려도 되는 그저 남녀노소 모두 눈 호강만 하면 됩니다. 

이곳에서 최고의 절경은 선바위입니다. 

높이가 약 6m이며 우뚝 서가 있다고 해서 한자로 입암이라고 합니다.





선바위는 선바위길 입구를 딱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그때문에 더욱 당당해 보이는 게 멋집니다. 

선바위는 자갈과 시멘트를 어개어 놓은 듯합니다. 

이는 화산 활동을 하면서 뜨거운 화산 열로 벤토나이트성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대단한 규모였으며 벼락을 맞아 쪼개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의 크기가 되었다 합니다.





이 일대는 모두 선바위와 똑같은 지질이며 독특한 모양입니다. 

아마 일부 사람은 대만의 예류지질공원과 많이 비슷하다 할 것 같습니다. 

예류지질공원의 여왕바위를 닮아가는 바위도 보였습니다. 

어마 무시한 세월을 보내면 여왕바위가 될 것 같습니다.

 










선바위를 지나면 남근석이 나옵니다. 

꼭 도깨비 방망이를 닮았으며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진짜로 금은보화가 막 쏟아질 것 같습니다. 

파도가 때려 바위 조각이 떨어져 나가 사람도 되었다가 미륵도 닮았다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선바위길은 걷는 내내 보는 재미에 상상을 더해 느끼게 했습니다.



 

폭포바위





선바위길에는 폭포 바위도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위틈의 골짜기를 따라 물이 떨어지나 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저 멋진 바위골입니다. 예류지질공원에는 여왕 머리 바위가 있다면 포항 선바위길은 왕관을 쓴 여왕바위가 있습니다. 

자연의 묘미가 그저 신비할 뿐입니다.



여왕바위




킹콩

영화 킹콩에서 빌딩을 오르는 화난 킹콩이 포항의 동해바다 절경에 취해 그만 넋을 빼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킹콩도 혼을 빼놓는 선바위 절경 정말 킹콩이라고 참 이름 잘 지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힌디기라는 백색 바위가 나옵니다. 천길 낭떠러지에 큰 구멍도 뚫려 있습니다.




힌디기



노씨 성을 가진 분이 정착하여 흥하기를 바라며 흥덕이라 불렀다는데 그게 음이 변해 힌덕, 힌디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위가 흰색이라 흰 언덕이라 불렸다가 흰덕, 힌디기로 바뀌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힌디기는 화산 활동을 하면서 화산성분이 백토로 형성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








하선대

힌디기를 지나면 자갈마당도 나옵니다. 

자각자각 밟으며 걷는 재미도 있고 들이치는 파도가 자갈을 애무하며 내는 소리에 귀가 다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눈을 바다 한가운데로 돌리면 수면에 많은 갈매기가 앉아 있습니다. 

그곳이 하선대입니다.

파도가 좀 들이치면 하선대는 물에 잠겨 보이며 이 일대를 황옥포 또는 한미끼라 부릅니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놀고 갔다는 하선대에는 전설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날 칠월칠석날이면 동해 용왕이 하늘의 선녀를 하선대에 초청해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신명 나게 놀았습니다. 

그중에서 용왕의 마음을 움직인 참한 선녀가 있어 용왕은 왕비로 삼고 싶었습니다. 

선녀는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아야 혼인할 수 있다며 거절을 하자 용왕은 옥황상제의 환심을 사려고 태풍을 없애고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면서 옥황상제의 근심 걱정을 덜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에 옥황상제는 마음을 움직여 용왕과 선녀의 결혼을 허락하였고이 둘은 이곳에 자주 내려와 밀월을 즐겼다 하며 이 바위가 하선대입니다. 


 


멀리 바위 두 개가 솟은 게 자세히 보면 돌배를 닮았습니다. 

마을에서는 먹바위, 검둥바위라 부릅니다. 

여기에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입혀 봅니다.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편에 있습니다. 옛날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연오랑은 해안가에서 바위에 붙은 해초 채취를 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더니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먹바위

일본에서는 돌배에 사람이 탄 것을 보고 비범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들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세오녀는 저녁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바닷가에 나가 남편을 찾았고 바위에 벗어 놓은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 바위에 올랐습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바위는 쏜살같이 달려 일본으로 향했고 연오랑과 세오녀는 서로 만났습니다. 그러자 신라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해와 달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관은 왕에게 해와 달의 기운이 모두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며 아뢰었습니다. 

왕은 큰일이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를 어서 빨리 고국으로 모셔오라 했습니다. 

연오랑 부부는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 신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 한 필을 주면서 이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보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왕에게 고하였고 왕이 비단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다시 환하게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왕은 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삼고 창고에 잘 보관하게 하고 귀비고라 불렀으며 비단을 놓고 하늘에 재사 지냈던 곳은 영일현 도는 도기야라 했습니다. 

현실로 돌아와 이 먹바위가 연오랑과 새오녀를 일본에 실어 날랐다는 그 돌배가 아닌가 하며 다시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펴 봅니다.

 



선바위

이제 살을 애이던 추위도 지나고 여행하기 좋은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날 포항 선바위둘레길과 기기묘묘한 해안가 바위 여행을 떠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전혀 다른 모습인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경주 여행 포스팅에서 이번에는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서출지 가운데 있는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큼 많은 보물과 국보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 떡을 주무르듯이 빚어낸 석불과 석탑이 남산을 가득 채웠고 그것도 모자라 남산 언저리에 무수한 문화재가 널려 있습니다.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3

보물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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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한곳이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폐사지로 추정되지만 염불사지 같은 절터 명칭을 찾지 못하고 지역의 이름을 따와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그런데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 자리한 이곳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남산사로『삼국유사』에는 ‘남산 동쪽의 양피사’를 근거로 폐사지를 추정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합니다. 

아마 인근에 양피 저수지가 있는 것을 저수지 명칭이 양피사에서 근거한 게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나란히 섰다 하여 보통 남산리 쌍탑이라 합니다. 

그런데 쌍탑이라면 쌍둥이처럼 똑 닮지는 않아도 조금은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산리 쌍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완전 180도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이란성 쌍둥이인 특이한 모습이라 더욱 눈길이 갑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쪽 탑은 모전 석탑의 형식으로 세웠다 생각됩니다. 

기단부는 바위를 벽돌식으로 다듬어 쌓았으며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 8개를 어긋나게 놓아 서로 물리게끔 했습니다. 

층마다 몸돌과 옥개석인 지붕돌을 한 개씩 다듬어 올렸고 전탑 형식인 죽장리 오층석탑과 같은 지붕돌의 경사면에 5개의 층단을 두었습니다. 

또한, 처마 밑에도 층급받침을 5개 두었습니다.





남산리 서탑은 동탑에 비해 많은 정성을 들였다 하겠습니다. 

동탑의 기단부는 돌을 그냥 다듬은 형태로 쌓았다면 서탑은 2중 기단에 위층은 사방 널돌에 팔부중상을 돋을새김한게 돋보입니다. 

진짜 예술성이 장난 아닙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이 꿀떡 같았지만, 문화재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둘려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이는 곳만 렌즈를 당겨 담았습니다. 

팔부중상 하나하나 개성이 넘쳐나며 한 분 한 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세세하게 조각했습니다. 

한 면마다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팔부신장을 조각했는데 동쪽에는 야차와 용, 남쪽은 아수라와 건달바, 북쪽은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쪽은 천과 가루라 신장입니다.



팔부중상은 신라 중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탑은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을 나타내는 신앙의 한 표현입니다. 

원래 석탑은 열반에 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듯이 아주 신성시 하며 불법을 보호하는 팔부신장을 새겨 악귀들의 범접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의 높이는 동탑은 7.04m, 서탑은 5.85m이며 동탑이 서탑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원동매화축제 순매원. 원동매화축제 순매원 매화 보고 왔어요.



원동매화축제 순매원 매화 보고 왔어요.


겨울의 끝 무릎에 남쪽에는 봄꽃축제가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시작은 매화축제와 산수유축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산수유축제는 구례 산동에 여행을 갔을 때 마침 산수유개화시기가 맞아 산수유시목지 등 여러 곳을 아쉽지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온 산을 매화로 수놓은 광양청매실농원의 매화는 섬진강 건너 먼발치에서는 구경했지만 가까이서 보려고 광양 매화축제기간보다 한주 앞서 찾아갔습니다.





양산 원동매화축제 순매원 주소: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원리 1102-1

양산 원동매화축제 순매원 전화:055-383-3644





너무 일러 매화 같은 매화를 보지 못하고 무채색의 광양 청매실농원만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터득한 게 역시 모든 축제는 축제기간에 가야만 제대로 꽃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진리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산근교인 양산 원동의 순매원에서 열리는 매화축제로 위로하며 돌아왔습니다.



일주일 뒤에 원동의 순매원도 광양청매실농원과 같은 날에 원동 매화축제가 열렸습니다. 

원동 매화축제는 양일간 열렸으며 축제가 열리는 첫날 찾아갔습니다. 

처음 계획은 축제라 많은 인파를 피해야겠다며 아침 일찍 찾아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오전 11시가 다 되어 출발했습니다.

 


물금을 지나 순조롭게 가는가 싶었는데 화제리가 가까워지니 그때부터 자동차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여기서 차가 밀리는 거 보니 오늘 매화축제 보기는 텄는가 보다며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어제 3월24일 토요일 아직은 매화가 남아 있겠지 싶어 또다시 순매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화제리를 지나 순조롭게 달렸습니다. 

순매원을 약 2km쯤 남겨둔 휴게소부터 차가 밀려 어쩔 수 없이 순리대로 따라갔습니다. 

축제가 열리는 순매원 주위에는 주차할 공간도 없고 해서 양산 원동면사무소 근처까지 가서 빈터에 주차하고 순매원까지 걸었습니다.





순매원의 촬영 포인트는 전망 덱입니다. 

많은 사진작가님의 양산매화 사진은 거의 이곳에서 담아 올립니다. 그래서 구도가 비슷비슷합니다. 

몇 분이 삼각대를 걸쳐놓고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축제기간보다는 진사님의 숫자가 적어 보였습니다. 저도 그 옆에 자리가 나서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덱 전망대 주위의 매화나무는 지난주 내린 눈과 바람에 다 떨어지고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그보다도 전체적으로 날씨가 황사인지 뿌옇게 좋지 않았습니다. 

사진 담는 기술도 부족해서 그런지 집에 와서 열었더니 사진이 영 신통찮았습니다.

 


기차 운행 간격이 점심시간을 전후에서 가장 긴지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매화를 보러온 관광객도 기차가 들어오는 사진을 담으려고 기다리며 자꾸 몇 시에 기차가 들어옵니까 하면서 물어왔습니다. 

조금 있으면 들어오겠지요? 아마 30분 간격으로 다닐 것입니다. 

역시 사진은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역방향인 부산 쪽으로 KTX가 내려가는 것도 아쉬운 마음에 담았습니다. 

양쪽 다 기차 대가리를 달고 있어 어느 쪽이 앞인지 분간 가지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기다린 끝에 기차는 들어왔습니다. KTX는 오지 않고 무궁화 종류만 들어왔습니다.

 










빵빵하고 미려한 KTX가 쌩하고 지나가야 보기 좋은데 하며, 아이고 아쉽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고 무궁화든 새마을이든 열차만 담으면 됐다며 이제 순매원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이 순매원을 찾았습니다.











머리를 하늘로 쳐 들어 다른 분들이 담은 그런 매화 가지를 찾았는데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용처럼 타고 올라가는 형상, 낭창 하게 가지를 축 늘어트린 매화 사진, 가지치기로 여러 번 가지가 꺾인 매화를 찾아다녔지만 내공 부족에 목도 아프고 노쇠하여 몸도 피곤하고 마!!! 대충 담았습니다.





정성이 부족했던지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 장도 없었습니다. 

사진 담는 기술이 UP 된 눈을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며 호화로운 매화사진으로 높여진 눈높이를 대폭 낮추어 내년 매화축제를 기다려야겠습니다.

 나 홀로 순매원 매화 출사였습니다. 

순매원은 오늘까지 매화 구경은 괜찮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서찰을 받아 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서출지 여행


경주 남산 동쪽에는 특별난 이력의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라 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연못보다는 조금 큰 못이라 생각됩니다. 

이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세상 시름을 잊으며 지냈을 분을 생각하니 정말로 부러웠습니다. 

뒤로는 경주를 대표하는 남산이 드리우고 앞에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품은 토함산을 정원 삼아 그 가운데 연못에 정자을 세운 이요당은 사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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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돌을 쌓아 정자의 턱을 받쳤으며 나머지는 연못에 몸을 맡기며 즐거움을 노래했을 이요당은 1664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1612~1672)이 지었던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3칸 규모였다고 하나 5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치며 앞면 4칸에 옆면 2칸으로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팔작기와지붕에 건물은 ‘ㄱ’자 형태입니다.

 


임적은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 마을에서 덕망이 높았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농작물이 바싹 말라 농민이 애를 태웠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생은 직접 땅밑에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내어 마을은 물론이고 이웃마을에까지 물을 공급하여 사용하게 했습니다. 

서출지 정자의 편액은 물과 산을 즐긴다는 ‘요산요수’의 뜻을 취해 ‘이요당’이 되었습니다.





이요당을 품은 서출지는 신라 시대 때부터 있었으며 전설이 있습니다.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소지왕은 궁궐을 나왔다가 남산 아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습니다. 

쥐는 소지왕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쪽을 가르키며 따라가라고 일렀습니다.


 


소지왕은 신하를 보내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신하가 서출지 부근에 이르자 멧돼지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정신이 팔려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면서 소지왕에게 전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신하는 괴이하게 생각하여 소지왕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봉투를 건네주었습니다.





봉투 겉면에는 “봉투를 보면 두 명이 죽을 것이요. 만약에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이 있어 고민하다가 두 명이 죽는 거보다는 한명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봉투를 뜯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보고는 “두 명은 백성을 말하며 한 명은 임금을 뜻한다며 봉투를 뜯을 것을 아뢰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소지왕이 봉투를 뜯었더니 안에는 ‘사금갑(射射匣)’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라는 뜻이며 소지왕은 궁궐로 돌아와 활을 당겨 화살을 거문고 통에 쏘았습니다. 

그때 거문고 통 안에서 비명이 났습니다. 

통 안을 보니 궁녀와 승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잡아 참형시키고 그일이 있은 후 서찰을 받아 임금의 목숨을 구했다는 뜻인 서출지(書出池)라 불렀습니다. 

서출지 사적 제138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경주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입니다. 

흔히 아흔아홉 골(실제는 60여 개)에 아흔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암자가 부지기수로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절터로 보는 곳이 아주 많은데 그중 한곳이 경주 동남산 칠불사로 오르는 남산마을 맨 안쪽에 자리한 염불사지입니다.






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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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에는 현재 동·서 쌍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염불사지의 쌍탑은 2007년 6월에 복원을 시작해서 2009년 1월에 완료하여 현재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으로 맵시를 뽐내며 전시중입니다. 

복원 되기 전 염불사터의 두 삼층석탑은 훼손 상태가 상당히 심했다 합니다.



1963년 나뒹굴던 염불사지 석탑 부재와 도지동의 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옥개석을 조합해서 불국동 구정광장에다 삼층석탑을 세웠전시했는데 저도 그곳을 지나면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을 시작하면서 2008년 1월 해체되었고 옛 염불사지에 동·서 삼층석탑으로 거듭났습니다.



경주 남산동 염불사지는 사찰 이름치고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염불이란 “부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며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중생이 생각하는 염불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의 수행법 중 가장 기초적인 게 염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염불사에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와 있으며 내용을 보면 경주 남산 동쪽인 피리(避李)마을에 어떤 스님이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염불을 외웠다 합니다. 

목탁을 두드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아했던지 서라벌의 백성이 모두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염불을 들은 모든 사람이 스님을 공경하였으며 염불(念佛)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목탁을 치며 머물렀던 피리사(避里寺)는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 합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늠름한 외모와는 다르게 아무런 문화재 감투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주 시내에 신라시대 문화재가 많아서 그런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근에 남산사지 동·서삼층석탑만해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문화재에 관심은 많지만,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석탑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염불사지는 사적 제311호에만 지정되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염불사지를 발굴 조사하고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를 내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염불사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고서에는 남리사지로 나오며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이라 합니다. 

2003년과 2008년에 각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와 금당터가 확인되었다합니다.







또한, 발굴보고서에서 석탑의 기초는 연약한 지반을 뚫은 후 안에 천석과 사질점토를 섞어서 교차로 다졌고 동탑지의 규모는 사방 6.5m, 깊이 1.2m 정도이며 내부에서 인화문 토기가 나왔는데 석탑의 건축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외에도 동회랑과 남동회랑, 중문지가 조사되었으며 출토유물을 분석했더니 사천왕사 등 시내사찰과 같은 시기의 기와가 창건기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서탑에서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함이 2개가 나왔으며 3층 탑신의 방형 사리공은 투공되고 탑재 등에서 염불사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와 같은 종류의 기와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의 ‘낭산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던 그 예언인 도리천이 사천왕사라 생각됩니다. 

그게 맞다면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30년이 지난 679년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던 것을 참작하면 염불사지의 창건 연대가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될 것 같습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보고 나서 남산리 버스정류장으로 돌아나오면서 해 떨어진 남산마을의 양피저수지입니다. 

안내판에는 3월에 벚꽃, 7월~10월에는 연꽃과 베롱나무가 장관이라합니다.

(참고: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




(경북여행/경주여행)고운 최치원의 상서장 여행. 상서장에서 최치원의 상소문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다.


우리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분은 너무나 잘알고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많은 분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대의 풍운아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을 가보았습니다. 

상서장은 경주 최씨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나랏일을 걱정하는 ‘시무십여조’를 써서 상소를 올렸던 곳입니다.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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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68년 약관 12세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엄청나게 빨리 조기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정에서는 그의 어떤 뜻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로 더욱 미운털이 박히자 40세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산천을 주유하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여생을 보내며 ‘계원필경’ 등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상서장 뒤로 최지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으며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상서장은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되었다 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바람의 언덕, 도장포마을, 신선대 여행


거제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은 바람의 언덕이 있는 해금강과 거제도의 유토피아 외도입니다. 

그중에서도 해금강과 외도는 유람선을 타야 갈수 있지만 갈곶리의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는 도장포마을은 14번 국도와 연결되어 손쉽게 찾아가집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바람의 언덕과 우제봉을 연결하는 둘레길을 찾았다가 도장포마을의 유람선 선착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풍차, 신선대를 구경했습니다.



거제도 바람의언덕 주소: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산 14-47(도장포마을)











섬인 거제도에서도 툭 튀어나온 갈곶리는 조금은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으로 바다 전망이 좋은 곳이라 합니다. 

그 중심에 도장포마을이 있습니다. 

도장포마을은 큰 바다가 아닌 갈곶리의 북쪽인 내륙을 보고 있어 움푹 들어앉아 아늑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태풍이 들이치면 도장포 선착장에 많은 배가 피신했을 듯 보였습니다.

 






도장포마을의 유래를 보면 오래전에 원나라와 일본 등을 무역하던 도자기 배의 창고가 있었다 하여 도장포로 불렀다 합니다. 

그게 오늘날에 도장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도장포선착장은 항상 파도가 잔잔하여 대한해협을 지나던 선박들이 많이 쉬어 갔던 곳이라 합니다.
















도장포 선착장에서 북쪽에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덱 계단이 있습니다. 

지금은 명칭이 바람의 언덕이라 부르지만, 그 이전에는 ‘띠밭늘’이라 불렀다 합니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띠밭이란 지명을 보면 아마 띠 풀이 언덕을 뒤덮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바람의 언덕’으로 지명을 바꾸고 2009년 11월에 바람의 언덕 마스코트인 풍차를 설치하면서 일약 거제도를 대표하는 거제도 관광 1번지가 되었습니다.







거제시 홈페이지를 보면 바람의 언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한없이 넓고 고즈넉하다. 여기서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지루하지 않은 한가함을 입었다. 섬도, 등대도, 유람선도, 바람마저도 한가해 보인다. 짊어진 마음의 짐을 바다에 던지거나 바람에 날려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영국에 황량한 폭풍의 언덕이 있다면, 한국에는 넉넉한 바람의 언덕이 있다.“








바람의 언덕은 작지만 초라하지 않은 엄마의 품속같이 안온한 우리의 정서와 가장 잘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많은 티브이 드라마와 영화, 예능프로그램이 다투어 촬영되었습니다.

 TV드라마는 2003년 ‘이브의 화원’, 2004년 ‘회전목마’ 영화는 2005년 ‘종려나무숲’ 등이 촬영되었으며, 2009년 5월에는 KBS 2TV인‘1박2일’이 촬영되었던 곳입니다. 

바람의 언덕 풍차와 함께 보는 전망이 정말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찍는 가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선대 구경입니다. 신선대는 도장포마을의 남쪽에 배의 돛대같이 우뚝한 바위에 편편한 전망대를 말합니다. 

대병대도와 소병대도 가라산과 망산 등 신선이 내려와 풍류를 즐겼을 만한 빼어난 자연경관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선대의 또 다른 절경은 망산 뒤로 넘어가는 거제도 일몰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거제도 낙조와 오목한 해안의 변화무쌍한 절경, 자르륵 자르륵 몽돌을 애무하는 파도소리는 신선대 몽돌의 운치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거제도 신선대. 바람의 언덕, 도장포마을 대중교통편.

 

"부산서부터미널에서 거제시 고현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를 탑니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6:00~22:00까지 운행하며 20분 간격, 심야버스 23:00 운행,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금강행 55번(6;25, 9;05, 11;05, 13;05, 1705, 18;25) 시내버스를 타고 도장포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끝. 우제봉 둘레길을 마친 후 해금강주차에서 출발해서 도장포마을을 거처가는 고현시외버스터미널행(해금강마을 출발시간 7:35, 12:38. 14:38. 16:38, 18:48, 19:30)은 각각 총 6회 운행합니다. 고현에서 부산서부(사상)터미널행은 6:00~21:30까지 약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심야버스(22:00, 23:00)도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내비 검색은 해금강테마박물관, 도장포마을, 바람의 언덕 입력"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향교, 경주 교동의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향교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도 경주향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그럼 경주향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향교가 있는 자리는 아주 오래전인 신라 시대부터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경주여행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여행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2018/01/23 - [여행]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2017/12/21 - [여행] - (경주여행)경주 월정교와 춘양교지. 반월성에 걸린 경주 월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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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국학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세워졌습니다. 국학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입니다. 그게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향교가 시대를 뛰어넘으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경주향교는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인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인 최응현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경주향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주향교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대성전에 모셨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정상아래 두덕암으로 옮겼으며, 두덕암은 현재 도덕암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인 선조 33년에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정을 먼저 중건하고 두덕암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4년에는 윤성이 대성전을 들어서는 동문과 서문을 세웠으며 1614년 광해군 4년에 이안눌이 강학공간은 명륜당과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를 중건함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1668년과 1979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평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의 형태입니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즉 강당영역을 앞에다 두고 문묘영역은 강당 뒤쪽에다 배치했다면, 경주향교는 이와 반대인 문묘를 앞에다 놓고 강당을 그 뒤쪽에다 배치한 형식입니다.









전묘후학이 조선시대 향교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양식은 생각보다 주위 향교에서는 만나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경주향교의 양식을 전묘후학을 따른 것은 옛 도읍지에 있는 향교의 공통점이라 합니다. 왕과 그 가족인 왕족이 먼저 공자와 성현의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전묘후학의 양식이 이해가 갔습니다.





경주향교에서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 입니다.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대성전은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양식을 말하며 대성전의 내력이 현재 정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물의 공포와 창호, 내부의 가구 등 옛날 방식의 기법이 남아 있으며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확인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나왔으며 공자의 위패와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주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 출신인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음력 2월8일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경주향교 여행에서는 문묘 공간을 바깥에서 까치 발로 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습니다. 어느 향교든지 모든 문묘공간은 문을 닫아두는데 이번 경주향교 대성전은 그날 행사가 있어 문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분께 양해를 구하자 원래 대성전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들어가세요 하여 대성전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성전을 보고 나오면서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돌우물은 경주향교를 들어서는 쪽문 앞에 있어 가장 먼저 보지만 향교를 만나고 나오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국학이 건립될 당시부터 있었던 우물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돌우물은 땅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낮은 형태이며 테두리를 다듬은 널따란 돌 2개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과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경주 교동 최씨 고택도 함께 만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경주 최부잣집으로 통하는 최씨 고택과 경주향교, 월정교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보았던 곳이 경주 교동 마을 입구에 있는 경주 사마소(慶州 司馬所)입니다. 사마소하면 텔레비전 사극드라마에 한 번쯤 등장하는 양념입니다. 사마소는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토론을 벌이던 장소를 말합니다.



경주 교동 사마소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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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수령에게 자문하던 유향소가 당시 권력인 훈구파가 장악했는데 이와 맞서서 사마소는 젊은 유생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훈구파의 행태를 보면서 팔팔한 젊은 기상으로 뭉쳐져 아주 좋은 뜻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연구와 정치토론을 하면서 고향마을 교화에 힘써기도 하고 관청의 행정도 도와주는 등 처음에는 아주 좋은 뜻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권력이 따라붙고 세력화가 되니까, 초창기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관청의 업무를 도와 주던 게 권력으로 개입하고 수령에게 태클까지 거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변질하여 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등 그 행동이 도를 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폐단이 자꾸만 일어나자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은 사마소 폐지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시국의 시류에 휩쓸리는 정치꾼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경주 사마소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741년 영조 17년에 복원해서 풍영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사마소를 찾았을 때는 풍영정과 병촉헌 사마소 현판이 없었는데 이번에 세 현판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때는 아마 수리 중이었나 봅니다. 사마소 현판은 1762년 부윤 홍양한이 글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촉헌은 1832년 생원 최기영이 썼다고 하는데 사마소, 풍영정, 병촉헌의 현판 글씨의 필체가 묵직하고 모두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사마소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출입문이 꽉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까치발로 담장 너머에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사마소는 경주향교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월정교 인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에 옮겨 왔다고 합니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



그리고 사마소 바깥의 담장 아래에는 영광대가 새겨진 사각 돌기둥과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안내판을 보니 사마소에 세워져 있었던거라 합니다. 1860년에 선비들이 남천에 흩어져 있는 월정교의 석재를 모아 대를 쌓고 영광대(影光臺)라 했다고 합니다.



영광대의 뜻풀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으며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잘못하지 않게 타일러 주의를 시키는 글귀가 담겨 있다”는 의미라 합니다. 영광대를 보면서 성현의 책을 읽고 마음을 닦는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전남여행/광양여행)동백림 동백꽃이 유명한 옥룡사지. 광양 벽계산 옥룡사지 동백나무 여행


광양 백운산을 등지고 아담한 봉우리인 백계산이 있습니다. 백계산 아래에는 우리나라 풍수가의 대가인 도선국사께서 주석하며 머물렀다는 옥룡사지가 있습니다. 도선국사께서는 광양 백운산 토굴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용맹정진하며 수도하여 득도에 이르렀습니다.






광양 동백나무 옥룡사지 주소: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산 35-1

광양 동백나무 옥룡사지 전화:061-797-2418








 



이제 수도를 마치고 토굴을 나서려고 했지만, 양반자세로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어서 그런지 무릎이 굳어서 다리를 펼 수 없어 앞으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자 급한 나머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주위의 나무를 잡았는데 그만 가지가 부러지면서 함께 넘어졌습니다.





그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수액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수액을 받아먹었더니 굳었던 무릎을 펼 수 있었다 하여 ‘뼈에 이로운 물이다’라는 골리수라 부르게 되었고 그게 고리수의 유래이자 백운산 고로쇠가 유명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로쇠 수액 하면 도선국사를 빼놓을 수 없으며 도선국사 하면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 옥룡사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옥룡사는 8세기인 통일신라 때에 창건되었다 합니다. 도선은 864년~898년까지 대략 34년 옥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옥룡사에서 입적했습니다.




 



현재 옥룡사지를 뒤덮은 동백나무도 도선국사가 절터의 기운을 보강하려고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합니다. 현재 옥룡사지는 동백숲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썰렁합니다. 절터는 덩그런 빈터만 남아 있으며 주춧돌로 보이는 돌만 몇 개 깔려 있어 옛날 대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옥룡사는 언제까지 존재했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1878년 고종 15년에 대화제로 소실되었다 하니 조선 말기까지는 옥룡사가 천년의 법통을 이으며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실과 함께 폐사되었으며 1920년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도선국사의 비석과 부도, 동진대사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어 마을에서는 비석거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비석과 부도마저도 찾을 수 없으며 도선국사와 경보스님 탑비와 부도만 현재 복원해 있습니다.





옥룡사지는 1996년 정비 복원계획하에서 개인 소유인 토지를 사들이고 그리고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비석거리에 탑비와 부도를 보호했던 비각의 흔적을 확인했으며 도선국사 부도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에 8각의 바닥 돌이 있었고 그 아래에서 인골이 들은 석곽이 출토되어 당시 도선국사의 인골로 추정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현재 옥룡사지 주위로는 작게는 100년에서 300년이 넘은 오래된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겨울 강추위를 무색게 하며 붉은 꽃망울을 빵빵 터트려 옥룡사지를 찾는 관광객을 즐겁게 해줍니다. 2월달에 동백꽃 보러 옥룡사지 여행 한번 계획해 보세요.




(일출일몰시간)2017 일몰시간과 2018년 새해 일출 시간






2018년 1월 1일 전국 일출(해돋이) 시간 


인천백령 07:57

인천대청도 07:57

인천소청도 07:56

인천연평도 07:52

석모도민머루 07:50

강화도동막 07:49

인천을왕리 07:49

인천월미도 07:48

무의도하나개 07:49

영흥도장경리 07:48

화성전곡항 07:47

화성제부도 07:47

화성궁평 07:47

당진난지도 07:48


당진왜목마을 07:47

서산간월암 07:47

보령대천 07:45

태안만리포 07:48

안면도꽃지 07:46

보령무창포 07:45

서천춘장대 07:45

부안격포 07:44

부안곰소항 07:43

영광가마미 07:43

무안도리포 07:43

진도세방낙조 07:42

완도보길도 07:40

신안흑산항 07:45

신안홍도 07:46

신안가거도 07:45

해남땅끝마을 07:40

제주차귀도 07:39

제주협재 07:39

성산일출봉 07:36

서귀포마라도 07:38

서귀포강정 07:38

서귀포표선 07:36

서귀포이어도 07:38

독도 07:26

울릉도 07:31

부산태종대 07:32

부산다대포 07:32

울산간절곶 07:31

대왕암공원 07:31

울산방어진 07:31

울산주전몽돌 07:32

감포수중릉 07:32

포항호미곶 07:32

포항구룡포 07:32


포항칠포 07:33

포항화진 07:34

영덕장사 07:34

영덕고래불 07:35

울진망양정 07:35

울진죽변 07:36

삼척맹방 07:37

동해추암 07 38

동해망상 07 38

강릉정동진 07 39

강릉경포대 07 40

강릉주문진 07 40

양양하조대 07 41

양양낙산 07 42

속초항 07 42

고성백도 07 43

고성송지호 07 43

고성화진포 07 43

거제학동몽돌 07 33

고흥외나로도 07 36

서울 07:47

세종 07:43

대전 07 42

대구 07 36

부산 07 32

광주 07 41

인천 07 48

울산 07 32

가지산 07 34

내연산 07 34

두타산 07 38

보현산 07 35

설악산 07 42

소백산 07 39

오대산 07 41

응봉산 07 37

주왕산 07 35

청량산 07 37

토함산 07 32

팔공산 07 36










2017년 12월 31일 전국 일몰(해넘이)시간 


인천백령도 17:31

인천대청도 17:32

인천소청도 17:32

인천연평도 17:28

석모도민머루 17:26

강화도동막 17:25

인천을왕리 17:26

인천월미도 17:25

무의도하나개 17:26

영흥도장경리 17:26

화성전곡항 17:26

화성제부도 17:26

화성궁평 17:26

당진난지도 17:27

당진왜목마을 17:27

서산간월암 17:28

보령대천 17:29

태안만리포 17:29

안면도꽃지 17:29

보령무창포 17:29

서천춘장대 17:29

부안격포 17:31

부안곰소항 17:30

영광가마미 17:32

무안도리포 17:32


진도세방낙조 17:35

완도보길도 17:34

신안흑산항 17:37

신안홍도 17:38

신안가거도 17:40

해남땅끝마을 17:34

제주차귀도 17:38

제주협재 17:37

성산일출봉 17:34

서귀포마라도 17:38

서귀포강정 17:37

서귀포표선 17:35

서귀포이어도 17:38

독도 17:05

울릉도 17:08

부산태종대 17:22

부산다대포 17:22

울산간절곶 17:20

대왕암공원 17:19

울산방어진 17:19

울산주전몽돌 17:19

감포수중릉 17:18

포항호미곶 17:17

포항구룡포 17:17

포항칠포 17:18

포항화진 17:17

영덕장사 17:17

영덕고래불 17:16

울진망양정 17:15

울진죽변 17:15

삼척맹방 17:15

동해추암 17:15

동해망상 17:15


강릉정동진 17:15

강릉경포대 17:15

강릉주문진 17:15

양양하조대 17:15

양양낙산 17:15

속초항 17:15

고성백도 17:15

고성송지호 17:15

고성화진포 17:15

거제학동몽돌 17:24

고흥외나로도 17:30

서울 17:23

세종 17:25

대전 17:25

대구 17:22

부산 17:21

광주 17:30

인천 17:25

울산 17:20




한국천문연구원 보도자료 참고 



(경주여행)경주 월정교와 춘양교지. 반월성에 걸린 경주 월정교 


경주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현재 10여 년 가까이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며 2018년 봄이면 월정교를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월정교의 다리와 건물은 모두 완공되었지만, 월정교 주변의 유적지 부대시설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공사 중이지만 멀리서 외부를 보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 엄청난 규모의 월정교를 마음껏 보고 왔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2016/11/15 - [여행] - (경주여행)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월정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인 760년(경덕왕 19년)에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아 경덕왕 때 건설된 다리임을 알 수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250년 전입니다. 오랜 세월을 겪다 보니 지금은 다리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리를 지탱했던 배 모양의 교각만 남천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고 월정교의 길이가 60.57m였으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가 나왔다 합니다. 그 유물로 추정하기를 교각 위에 누각과 지붕이 연결된 누교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경주 월정교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복원된 월정교




월정교 복원공사는 2008년 4월 시작하여 내년에 봄에 모든 공사가 끝나는 10년의 장기 복원공사입니다. 복원되는 월정교의 규모를 보면 길이가 66.15m에 너비가 9m, 높이는 8.25m입니다. 다리는 돌기둥이며 그 위의 다리 상판은 나무를 깔고 두리기둥에다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다리 양쪽 끝에는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건물의 최고 높이는 15.67m인 중층 건물에다 주심포 양식의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를 하면서 원효가 태종무열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향하던 중 남천에 놓인 유교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데 요석공주와 로맨스를 만들게 했던 다리의 유적을 발굴했다 합니다. 당시의 다리가 맞는다면 삼국시대 유적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월성 걸린 월정교






반월성






월정교와 700m 위쪽에 남아있는 춘양교지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 있는 누각 다리의 유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제 원효가 건넜던 유교가 가장 오래된 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춘양교는 조선 시대에 월정교와 짝을 이루어 일정교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며 효불효교와 칠성교 등 민간신앙과 결합해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월정교와 함께 두 다리는 왕궁으로 드나들던 다리입니다. 춘양교도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그 규모가 밝혀졌습니다. 길이는 월정교보다 조금 짧은 55m이며 다리 상판은 최소한 13m, 교각높이는 5m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교각은 월청교와 같은 방식인 남천의 유속을 고려하여 배 모양으로 쌓았으며 다리의 규모와 석재의 재질, 색깔까지도 월정교와 거의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합니다. 이 두 다리 터는 고대 신라의 교량 축조방법과 토목기술, 신라 왕경의 규모와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 합니다. 춘양교지는 경주 박물관 뒷쪽에 있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는 사적 제457호





 (부산다대포여행)다대포 빛축제. 다대포꿈의낙조분수에서 열리는 다대포 빛축제.



부산 다대포 하면 생각나는 게 2대 볼거리라 하여 일출과 일몰입니다. 

해수욕장이라 부르지만, 주위의 사상공단과 장림공단 때문에 언제부턴가 해수욕장이란 의미는 많이 퇴락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다시 다대포해수욕장의 재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해수욕장 일부에다 덱 전망대길이 설치되었고 해수욕장의 정비로 지금은 작지만, 해수욕장의 기능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은 일출과 일몰은 많은 관광객에게 익히 알려졌지만 지금은 한여름 밤을 화려하게 수놓는 분수와 레이저쇼가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에서 연출을 해 다대포 3대 볼거리로 호평 받으며 싱그러운 여름밤을 나게 합니다. 그만큼 다대포 꿈의낙조분수 또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는 겨울의 다대포도 일몰과 더해서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에서 펼치는 빛축제로 다대포를 찾는 많은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대포 4대 볼거리라 호평하고 있습니다.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다대포꿈의낙조분수 주소: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482-3 다대포해수욕장 진입로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다대포꿈의낙조분수 전화:051-220-5891






지난밤에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노트 5를 들고 다대포 빛축제 사냥에 나섰습니다. ㅎ ㅎ 여름철 레이저를 뿜어내는 분수에는 지금 로마 왕실의 분수대와 같은 모습을 한 화려한 불빛 조형물이 빛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곳이 다대포 빛축제의 매인부스입니다. 시시각각 조명의 색상이 바뀌면서 영롱한 빛을 연출하는데 화려한 보석도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 빛축제를 따라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많은 관광객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저도 스마트 폰으로 메인 빛축제 구조물을 이쪽 방향, 저쪽방향 아니 이몽룡이 성춘향이 얼굴을 돌려보듯 360도로 방향을 바꿔가며 빛이 변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사진에 잘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빛의 아름다움은 진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주위에 펼쳐지는 많은 조명과 함께 더욱 다대포 빛축제의 열기는 빛이 났습니다. 


밤만 되면 다대포는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다대포 일몰과 함께 바다에서 만나는 다대포 빛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가족 나들이도 많이 보였습니다.

 다대포 분수대 주위 조경에 감아올린 빛 조명과 설치된 구조물의 조명이 함께 어울려 다대포의 밤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습니다. 예년을 보면 다대포 빛 축제는 연말과 연초까지 아마 길게 이어질 것 같습니다. 

부산여행에서 특히 꼭 빼놓을 수 없는 다대포 일출과 일몰, 그리고 덤으로 다대포 빛축제를 함께 여행해보세요. 부산이 이리 아름다울 수가 하며 부산 여행이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다대포꿈의낙조분수에서 열리는 다대포 빛축제 사진으로 보기▶








































































































(경남함안여행)함안 말이산고분군. 해질녘 말이산고분군의 저녁 노을을 갤럭시 노트5로 담다.


함안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지는 말이산고분군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은 2011년 7월 사적 제515호에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사적 제84호 도항리고분군과 사적 제85호인 말산리고분군으로 따로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발굴조사에서 이 두 곳의 고분군이 같은 시기인 하나의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의 무덤임이 밝혀졌습니다.







 함안 말이산고분군 주소:경남 안군 가야읍 도항리 526-1

함안 말이산고분군 전화:055-580-2344





2017/11/27 - [여행] - (경남여행/함안여행)함안 무진정, 갤럭시 노트 5로 함안 무진정의 가을 만추를 담다.

2017/12/06 - [여행] - (경남함안여행)함안 가볼만한곳 신라 석축산성 성산산성에 오르다. 성산산성

2016/10/16 - [여행] - (함안여행)방어산마애불. 보물 제159호 통일신라시대 함안방어산마애불 여행을 하다.






말이산고분군은 주로 함안박물관이나 함안군청 방면에서 관람이 이루어지나 필자는 그 반대편인 백산마을 쪽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31번 고분군부터 보았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은 당시 찬란했던 아라가야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말이산은 머리산의 소리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최고권력자를 상징하는 우두머리 산이란 뜻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의 크기는 대략 남·북으로 1.9km입니다. 그리고 동쪽 면은 급사면인 데 비해 서쪽은 완만한 구릉지대로 여덟 개의 나지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대에 고분군이 쭉 늘어서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철도개설과 마을을 확장하면서 북동쪽은 절개되어 훼손되었다 합니다.


 






말이산고분군은 현재 37기가 관리 중이며 고분이라 여겨지는 게 100여 기고 봉분의 흔적이 사라진 것까지 합한다면 총 1,000기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대 고분군이라 합니다. 말이산고분군의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서입니다. 일제는 4세기 후반 일본 야마토정권이 가야, 백제, 신라를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200여 년간 다스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증거를 찾으려고 6 가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말이산 4호 고분을 발굴하여 10일 만에 조사를 끝마쳤다 합니다. 그 이후 말이산고분군은 1,990대에 들어와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0여 번의 발굴조사에서 아라가야 최고 권력자와 그 왕족의 무덤임을 확인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은 덧널무덤, 널부덤, 구멍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 기원전부터 6세기 전반의 다양한 무덤 양식으로 조성되었고 아라가야의 성립에서 발전과 멸망까지 전반적인 과정을 고분을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을 걷다보면 규모가 큰 고분이 있습니다.


 









이 고분은 아라가야가 한창 번성하였을 때인 5세기 후반의 무덤이며 구덩식돌덧널무덤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무덤의 내부는 길이가 10m에 너비가 2m 이고 5명의 순장인골과 많은 유물이 함께 나왔습니다. 불꽃무늬토기, 수레바퀴모양토기 등 토기류와 쌍용문, 둥근고리큰칼, 투구, 갑옷, 말갑옷, 새모양장식 미늘쇠 등 철의 왕국이라 했던 아라가야의 발전된 철기류가 무더기로 나왔다 합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은 말이산고분군 서쪽 사면의 함안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긴 함안여행으로 늦게 함안박물관에 도착했지만, 겨울철은 오후 5시에 마감해서 박물관을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함안박물관 입구에 모형으로 만든 수레바퀴모양토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다시 한번 함안 여행을 계획해서 그때는 함안박물관부터 먼저 둘러보아야겠습니다.


 























(경남함안여행)함안 가볼만한곳 신라 석축산성 성산산성에 오르다. 갤럭시 노트 5로 찍은 성산산성


함안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조남산 정상부에 퇴뫼식으로 쌓은 산성이며 6세기경인 신라 시대 산성입니다. 현재 성산산성은 돌을 다듬어 수직형태로 쌓은 석축산성이며 발굴현장에는 하얀 부직포를 덮어놓았습니다. 





1991년부터 발굴조사를 하면서 석축 산성임을 확인했으며. 산성의 전체길이가 1.4km인데 남·북은 길며 동·서로는 짧은 타원형 산성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작은 분지이며, 주위 높은 능선을 따라 성벽을 돌렸습니다. 산성의 동·서·남쪽에 성문터 외 우물 1개와 건물터 2곳을 확인 했습니다. 

함안읍지에는 가야 고성이란 기록이 있어나 출토되는 신라기와와 토기파편 등으로 유추하면 6세기 신라 시대 석성이며 동문터에서 많은 목간이 나왔습니다. 종이 대신 나무에 기록한 목간은 동쪽 성벽 부근의 계곡지형을 메우려고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부엽층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부엽층에서 많은 목간과 생활 농기구, 그릇파편, 목기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습니다. 





2017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2014~2016년까지 17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23점의 목간이 나왔으며, 6세기 신라의 율령체계와 신라 왕경인(王京人)의 관직명 ’대사(大舍)‘ 등 새로운 사실이 확인 되었습니다. 그 중 4면에 글자가 있는 사면 목간 1점에서 길이 34.4cm. 두께 1.0~1.8cm이며 소나무로 길쭉한 모양을 하였습니다. 목간에는 총 56글자가 있습니다. 

이 목간에는 진내별 지방의 촌주가 중앙 출신 관리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올린 문서로 당시 신라 지방사회에까지 중앙정부의 강력한 공권력이 율령을 통해 지방까지 지배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라 법흥왕의 율령반포 이후의 신라 시대 정권통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며. 함안 성산산성의 출토된 목간은 총 308점에다 우리나라 목간의 절반 정도의 많은수량입니다. 

함안여행을 계획할 때는 성산산성도 올라보고 말이산고분군과 함안읍·가야읍을 둘러보면 정말 좋습니다. 사적 제67호

 




성산산성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함양읍 괴산리·가야읍 광정리


2017/11/27 - [여행] - (경남여행/함안여행)함안 무진정, 갤럭시 노트 5로 함안 무진정의 가을 만추를 담다.

2016/10/16 - [여행] - (함안여행)방어산마애불. 보물 제159호 통일신라시대 함안방어산마애불 여행을 하다.
































 

(포항여행)포항 운제산 오어사와 오어지, 가을빛이 내려 앉은 오어사와 오어지 갤럭시 노트5로 담다.   


포항에서 가을에 쉽게 가볼 만한 곳이 오어지가 있는 오어사입니다. 보통 사찰이 큰 저수지를 끼고 있는 곳이 드문 일인데 그래도 오어사는 가을철 단풍그림과 잘어울리는 오어지로 인해 한층 더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찾았던 포항 오천읍 오어지와 오어사. 시기를 딱 맞추어 찾아서 그런지 절 주위 단풍은 좋았지만, 가을을 즐기려는 관광객 때문에 오어지와 오어사는 완전 북새통 이었습니다.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합니다. 창건하면서 많은 큰스님이 이곳에서 주석하며 수도 정진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신라 4대 성인이라는 자장율사는 물론이고 원효대사와 혜공선사. 의상대사가 머물렀으며, 삼국유사를 집필하시면서 일연스님도 이곳에서 계셨다 합니다.





오어사는 창건 당시 항사사라 불렸지만, 원효와 혜공의 일화 때문에 사찰 이름이 바뀌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왜 오어사라 불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원효와 혜공은 이곳에서 수도 정진을 했습니다. 혜공은 항사사에 머물렀고 원효는 오어사 앞 계곡을 건너 골짜기 안의 운제산 자락의 토굴에서 수도에 전념했습니다. 하루는 원효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먼저 중국에 유학을 갔다 온 선배로서 원효를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혜공은 원효를 찾아가 내기를 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원효 또한 흔쾌히 승낙하여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기란 게 오어사 계곡에 사는 물고기를 삼켜서 죽지 않고 살아서 대변으로 나오는 사람이 이긴다였습니다. 두 스님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서 각자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서 삼켰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한 마리는 죽어서 나왔지만 한 마리는 살아서 오어사 계곡을 거슬러 힘차게 가는 것을 보고 서로 물고기가 자신의 것이라 했습니다. ㅋㅋ


 



원래 이런 내기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두 스님은 아마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나 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내 물고기다’하여 내吾자와 고기魚자를 합해 오어사(吾魚寺)가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오어사를 품은 운제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혜공과 자장은 서로 운제산 자락의 바위절벽에서 참선하며 수도할 때에 하늘의 구름을 잡아 사다리를 만들어 서로 내왕했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운제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합니다.


 







각설하고 가을 오어사의 제1경은 바위 벼랑 끝에 지어진 자장암이 비친 오어지 반영입니다. 많은 사진작가분이 단골로 찍는 사진인데 요즘 가뭄이 심해서 그런지 오어지의 수량이 만수위가 아니고 계곡도 완전히 말라있어 오어지에 비친 자장암의 반영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저는 오어지에 건설된 구름다리를 건너서 오어사를 붉게 물든인 단풍 반영은 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의 오어지와 오어사는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어사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 오어사 동종과 원효대사가 사용했다는 삿갓입니다. 모두 오어사 경내의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동종은 오어지 공사를 하면서 진흙을 긁어내다 발견해 보존처리를 하고 전시중이며, 삿갓은 1,300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누더기와 같이 헤어져 심하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종이와 실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솜을 넣고 바깥에는 풀뿌리로 만들었다 합니다. 단풍이 좋은 날 오어사의 빛바랜 대웅전을 둘러보고 파란 가을하늘의 오어지 반영을 보면서 내년의 오어사와 오어지 여행이 기다려졌습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지. 갤럭시 노트 5로 찍은 밀양 위양지 가을 정취. 밀양 이팝나무 위양지 




밀양 위양지(位良池)


밀양 부북면 위양지에서 마지막 가을의 분위기를 느끼고 왔습니다. 위양지는 5월 이팝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릴 때 가장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는 저수지 둑과 완재정 주위로 많은 이팝나무가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을 위양지 또한 이팝나무의 5월 위양지 못지않게 알려져 많은 사진작가를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위양지는 양민을 위한다는 뜻이며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습니다. 

역사가 엄청나게 오래되었습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의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가 1634년인 인조 12년에 밀주 부사였던 이유달이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밀양구지를 보면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해 위량리를 양양부곡이라 했습니다. 저수지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와 양양지라 불렀으며 처음에는 제방의 둘레가 4.5리였다 합니다. 그러다 규모도 축소되고 해서 지금은 수리구역의 제방으로 바뀌었습니다. 

위양못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에서 못의 중앙에 있는 섬에는 완재정의 정자가 있습니다.

완재정은 안동권씨의 학산 권삼섭을 기리기 위한 정자이며 완재정 편액은 ‘완전히 물 한가운데 있다’라는 뜻으로 시경의 ‘완재수중앙’에서 그 음을 취했습니다. 

이팝나무와 함께 더욱 알려진 밀양 위양지는 밀양 8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밀양시 위양지 주소: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297


2016/12/15 - [여행] - (밀양여행)김종직 생가 추원재와 김종직의 묘, 호랑이 무덤 여행.


2016/11/12 - [맛집] - (밀양맛집/상동맛집)상동역 웰빙 고동국. 경상도 들깻가루로 끓여낸 고소한 국물이 일품인 상동역 웰빙 고동국





































(경남여행/함안여행)함안 무진정. 함안 무진정의 가을 만추,


경남함안 무진정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무진정(無盡亭)

 

무진정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의 언덕에 있는 정자입니다. 

무진 조삼선생이 낙향해서 후진양성과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직접 지으신 정자로 본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하였습니다. 

조삼선생은 1473년인 조선 성종 4년에 태어났으며 1489년 성종 2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인 중종 2년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제수.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부사와 목사를 거치고 내직인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정치판을 보면서 환멸을 느껴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의 외척이었던 파평윤씨가 소윤·대윤의 반목에서 대윤을 몰아낸 사건인 을사사화에서 옛날 동료들이 모두 희생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진정은 유려한 문장으로 쓴 주세붕의 기문이 유명하며 정자에 걸린 무진정 편액 또한 주세붕의 필체라합니다. 


무진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기와지붕건물입니다. 그리고 정자는 둥근기둥에 아무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는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의 건물로 정자 바닥은 하늘로 띄워 만든 누마루이며, 앞면의 가운데 칸에다 온돌방 대신 마루방을 꾸몄습니다. 앞면은 개방식이라면 뒷면은 문을 접어서 올리는 개폐식입니다. 

좌·우 벽면은 나무 기둥 사이에 크게 창문을 만들어 나무판자로 문을 달아 여닫게 했습니다. 건물은 소박한 형태로 지어졌지만 중후한 멋은 잃지 않은 선비정신을 보는 듯했으며 조선전기의 정자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물입니다.



 




























(경남여행/창녕영산여행) 영산 만년교. 13세 소년의 신필 만년교 비석과 돌다리를 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소통에 많은 비유를 합니다. 그런 만큼 다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이야 콘크리트를 가설하는 일률적인 형태로 다리를 건설하지만 옛날에는 장인인 석공이 돌로 만들어 예술성을 가진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창녕 영산만년교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455

창녕 영산만년교 연락처:055-530-1473




2017/11/22 - [여행] -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특히 창녕 영산의 만년교는 현재 완벽한 상태로 남아 충실하게 소통을 위한 다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창녕 영산 만년교는 영축산 병봉과 남산(함박산)에서 내려오는 냇가에 걸린 다리라고 해서 만년교를 남천교로도 부릅니다. 만년교는 1780년인 정조 4년에 석공인 백진기가 놓았습니다.








만년교는 순수하게 돌만을 가지고 건설한 석교입니다. 서민적인 멋을 가진 다리이며 아무 꾸밈없이 지어졌습니다. 무지개를 뜻하는 홍예식인데 짜맞추어 끼운 32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다 둥글둥글한 모양의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흙을 덮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만년교는 막 쌓은 돌다리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홍수와 오랜 세월에도 끄떡없이 견뎠으며 현재도 충실히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년교 양쪽 호안의 석축도 만년교가 지어졌을 때에 함께 쌓았다 합니다. 빈틈없이 짜맞추듯 쌓아올린 고색창연한 석축은 만년교의 분위기를 한층 더 분위기 있게 만들었습니다.












물이 흐르는 개천에 새운 홍예의 넓이는 11m에 높이가 5m이고 홍예의 장대석 석축의 교량 폭은 4.5m입니다. 만년교에는 전설도 있습니다. 현재에도 만년교를 알리는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의 만년교 필체는 기운이 넘치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필체로 문외한이 제가 보아도 명필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필체의 주인공이 13세 어린 소년이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어린이가 여기에 글을 남기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만년교가 거의 완공될 무렵입니다. 어느 날 밤 소년의 꿈에 산신이라며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소년에게 말하기를 “네가 신필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내가 다닐 다리에 만년교란 이름을 네가 글로 써주면 좋겠다”고 하며 사라졌다 합니다.









소년은 꿈에서 깨어나 밤을 새워 ‘만년교(萬年橋)’ 글을 완성했으며 현재 만년교의 거무틱틱한 비석입니다. 그 비석 끝에는 ’十三歲書(십삼세서)란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창녕 영산의 만년교는 부산 근교에서 잘 볼 수 없는 무지개 돌다리입니다. 아마 언뜻 생각해도 유일한 무지개 돌다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귀한만큼 영산의 만년교는 주위의 산세와 정말 잘 어울리며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만년교를 가면 꼭 한번은 돌다리를 건너갔다 옵니다. 다리의 안전함도 확인하기 위해서지만 남산 산신이 건너다니는 돌다리라 했는데 이를 보면 신령스러운 다리 아닙니까. 그래서 그 기운도 받을 겸 해서 돌다리를 건넙니다.








창녕 영산 만년교 주위에는 영산 석빙고도 있고 1,300년이 넘는 신라시대 약수터인 함박약수터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명수로 통할 만큼 신령스러운 함박산 약수도 마시고 신령스러운 영산 만년교도 건너면 이제 남은 나의 운세는 활짝 펴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습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창녕 우포늪을 여행하고 나서 점심을 창녕전통시장에 있는 수구레국밥을 먹었습니다. 수구레국밥을 맛있게 먹고는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걸으면서 창녕 석빙고를 보기로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조선 시대 얼음창고입니다. 요즘은 냉장고가 집집이 없는 집이 없어 냉동실에서 쉽게 물을 얼려 얼음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래서 얼음의 귀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냉장고는 귀하고 아주 값이 비싼 물건이라 서민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서민의 여름나기는 지금 생각하면 애처롭습니다. 



한여름에는 우물에다 수박을 담근 다음 차게 해서 먹는다든지, 아니면 얼음집에서 큰 얼음을 블록만 하게 톱으로 자른 팔았습니다. 작은 얼음에다 바늘을 꽂아 망치로 살살 치면 신기하게도 얼음이 산산 조각났고 그 얼음으로 차디찬 얼음 수박 화채를 만들어 먹든 기억이 있습니다.




창녕석빙고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창녕석빙고 연락처:055-481-4650






호랑이 담배 피우든 시절도 아닌 4~50년 전에도 이러했는데 조선 시대의 여름 나기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시원하게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삼복더위에는 요즘 같이 냉장고도 없는데 어디서 얼음을 구해와 냉 화채를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신기합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겨울에 계곡의 꽁꽁 언 얼음을 잘라 석빙고에 보관했으며 그 얼음을 가지고 삼복더위에 얼음 화채를 만들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얼음은 아무나 끄집어 내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아주 귀한 것이니까?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해”하면서 하사품으로 내려줬다고 합니다.







지금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빙수, 아이스크림, 얼음과자 등 먹고 싶으면 손쉽게 먹을 수 있어 좋은 시대에 사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창녕 석빙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러 곳에서 석빙고가 남아 있지만 그중 창녕 석빙고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현재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려고 입구에 쇠창살로 막아 놓아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내부를 완벽하게 본 곳이 청도 석빙고였습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청도석빙고를 내려가 보면서 여름철 얼음을 보관했던 원리와 석빙고 구조도 함께 보았습니다. 

창녕석빙고는 봉분은 흙으로 덮였으며 문은 닫혔지만, 창녕석빙고도 이와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석빙고는 옛 무덤인 고분을 닮았습니다. 고분과 크기도 비슷하고 출입구가 없다면 그냥 고분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석빙고의 구조를 보면 네모나게 땅을 깊이 파내었고 천장은 돌을 무지개(홍예) 인 둥글게 돌다리 형태로 짜맞추었습니다. 바닥은 평평하게 돌을 깔았으며 한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했습니다. 이곳이 얼음을 보관하는 방이며 빙실입니다. 

바닥의 북쪽에는 녹은 얼음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으며 벽체는 바닥에서부터 다듬어진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천장 부근에서는 다듬은 돌을 어긋나게 끼워 맞추어 무지개식 돌다리로 골조를 만들었으며 총 4개입니다. 

그리고 무지개형태의 돌다리 위에다 긴 돌을 걸치고 다시 보온을 위해 흙으로 두껍게 덮었습니다. 

천장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바깥의 공기가 적당히 드나들게끔 하는 굴뚝입니다. 이게 얼음이 잘 녹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보관하게끔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1742년인 조선 영조 때에 창녕 현감인 신서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계곡의 얼음을 석빙고에 쉽게 옮기도록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자하골과 직각이 되게 하였으며 남북으로 긴 모양에 출입구는 남쪽에 두었습니다. 보물 제310호



(경남여행/창원여행)주남저수지 창원주남돌다리. 800년된 창원주남새다리를 만나다.


방가방가

이번에는 주남저수지 여행을 하면서 돌다리인 주남새다리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주남돌다리는 창원시 주천강에는 대산면 가술리 고등포마을과 동읍 월잠리 판신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200m 근방에 콘크리트 다리인 주남교를 새롭게 건설하면서 많은 사람이 건너다니던 다리의 기능은 잃어버렸지만, 돌다리는 그대로 근대에까지 두 마을을 연결하는 돌다리로 남았습니다.






창원주남돌다리 주소: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가술리 590

창원주남돌다리 주소: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월잠리 590








그러다 1967년 폭우로 불어난 물에 돌다리는 떠내려갔습니다. 그 후 30년이 지난 1996년 창원시에서 주변 하천에 나뒹굴고 있던 돌다리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요즘 주남새다리와 같은 전형적인 우리의 옛 돌다리를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꼭 저 멀리 남의 고장의 문화재와 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부산하고 가까운 곳에 이런 800년의 역사를 가진 돌다리가 있으니 신통방통합니다. 주남돌다리는 화강암과 점판암이며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다리입니다. 4m 간격으로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넓고 평평한 돌판을 여러 장 올린 형태입니다.








교각에 쌓은 돌도 보면 일정한 모양과 크기가 아니라 작은 돌을 여러 개 겹쳐 포개어 쌓았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주남 돌다리를 일명 주남 새 다리라 하는데 이는 새로 만든 다리란 뜻이 아니라 주천강 사이에 놓인 다리로 ‘사이 다리’란 뜻을 가졌으며 ‘사이’를 줄이면 ‘새’가 되는데 그래서 ‘새다리’가 되었다 합니다. 새로 생긴 다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뜻이 아닙니다. 참고하세요.





창원 주남돌다리는 협동정신을 상기시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두 마을 사이에 주천강이 있어 매번 왕래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마을 장정이 보여 동읍에 있는 정병산의 돌로 다리를 놓기로 했습니다. 마침 정병산 정상에 장방형의 평평한 돌을 두 개 발견하고 돌다리의 상판에 제격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우선 한 개를 운반하려고 모든 마을 사람을 동원해 당기고 밀고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기왕 이래 된 거 한꺼번에 두 개의 돌을 옮겨보자며 이번에도 마을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당겼습니다.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던 돌이 서서히 움직였고 두 마을을 연결하는 주남 돌다리의 상판이 되었다 합니다.










가을과 겨울 최고의 여행지인 주남저수지에서 꼭 보고 와야 할 여행지인 주남돌다리, 마침 백월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찾았는데 돌다리는 황금빛으로 바뀌면서 환상적인 황금 돌다리가 되었습니다. 창원주남돌다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5호입니다.




사진으로 창원주남돌다리 구경하기

































(군위여행/군위가볼만한곳)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집필지 인각사 여행.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에는 산성이 있는 화산이 있습니다. 그 화산의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천년고찰 인각사가 자리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도로변에 있어서 아주 편리해졌지만 원래 인각사가 창건될 당시에는 인적은 찾을 수 없고 첩첩의 산골짜기에 호랑이가 살았을 그런 오지였습니다.




군위 인각사 주소: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

군위 인각사 전화:054-383-1161





이곳에 대찰이 들어섰는데 그 사찰이 일연선사의 하안소(1284~1289)였던 인각사입니다. 인각사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일연이 1283년 국존의 추대와 원경충조의 호를 받고 이듬해인 충렬왕 10년에 연로한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내려와 인각사를 중건하게 됩니다.

 


이때 충렬왕은 토지 100경을 하사하였고 이를 가지고 인각사 중건을 도모하였습니다. 일연선사께서 주석하면서 인각사에서 구산선문의 전체모임인 ‘구산문도회’를 두 번씩이나 열렸을 정도로 사세가 대단했으며 이후 선종의 중심사찰이 되었습니다.



현재 인각사 오른쪽에는 오래된 석재들이 발굴 진열되어 있습니다. 인각사를 정비하면서 출토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석재가 대부분인데 이는 중요 부재만을 모아 놓았어 그렇다 합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인각사 동쪽에 절터가 있었으며 고려시대 후기로 오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왔으며, 이는 현장에서 나온 유물로 알 수 있다 합니다.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 연하문 석등 대석, 심초석, 방형초석, 원형초석, 기단석 등이며 2005년 극락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심초석이 확인되면서 통일신라시대에는 목탑이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합니다.



인각사는 642년인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 창건기록과 643년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대구 팔공산 은해사 말사입니다. 왜 인각사로 불리게 되었는지 보면 인각사를 두른 산이 화산인데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닮았으며 인각사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절 입구 위천에 깎아지른 바위벼랑이 있는데 기린이 뿔을 그 바위에 올렸다 해서 인각사라 부르게 되었으며 기린이 뿔을 올렸다는 바위는 현재 학소대라 불리고 있습니다.

 


인각사에는 삼국유사의 집필지 답게 많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제 428호인 ‘군위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이며 고려시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군위인각사삼층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인 ‘군위인각사석불좌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인 ‘군위인각사미륵당석불좌상’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내 당우로는 극락전, 산신각, 명부전, 국사전, 요사채등이 있습니다.

 


먼저 군위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는 일연선사 사리탑인 부도와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을 말합니다. 보각국사 부도는 팔각원당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몸돌에는 ‘보각국사정조탑’의 명문이 새겨져 일연선사의 부도임을 알 수 있으며 세워질 당시에는 인각사에서 2km 떨어진 능선 자락에 있었다 합니다.





그러다 19세기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이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78년도에 국사전 앞쪽에 모셨다가 현재에는 국사전 오른쪽에 인각사석불좌상과 나란히 모셨습니다. 보각국사정조탑 명문 반대편에는 문 모양을 조각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이 2구 조각되어 있습니다. 기단의 중대석에는 동물을 조각했지만, 현재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보각국사 비는 지금 훼손상태가 매우 심합니다. 비는 일연스님의 제자인 법진이 세웠고 비문의 내용은 민지가 지었으며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서 보각국사 비를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황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보각국사비는 이 때문에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왕희지의 글씨가 귀하여 수도 없는 탁본을 하면서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1701년(숙종 27년) 용문거사 윤광주의 ‘인각사비탑서’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겨울철 불을 피우고 비석을 땅에 넘어뜨려 탁본하면서 보각국사비는 더욱 파괴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1760년 홍양호가 쓴 이계집 제인각사비에서는 스님들이 탁본의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비를 부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로 왕희지의 글씨는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극락전 앞에 조성한 군위인각사 삼층석탑은 인각사 경내의 중심에 떡 버티고 있으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초기의 석탑입니다. 현재 인각사삼층석탑은 기단의 상대갑석부터 노출되었으며 노반, 목발, 양화, 보륜 등 상륜부 대부분이 남아있어 인각사 삼층석탑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는 듯 했습니다.



















부도와 함께 있는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은 불신과 배 모양의 광배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은 소라 모양의 곱슬형태이며 상투 모양인 머리 묶음이 큼지막하게 솟았으며 얼굴은 원만한 인상에 도톰한 입술을 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어 나옵니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가 있으며 오른손은 촉지인, 왼손은 선정인의 자세를 취했으며 손위에는 조그마한 보주를 올려놓았습니다. 인각사 석불좌상의 조각수법을 보면 10~11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극락전 뒤쪽에는 전각과 다른 건물이 있습니다. 미륵당으로 이곳에는 군위인각사미륵당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훼손상태가 심한 불상이지만 정교하게 조각된 불상임을 알 수있습니다. 현재 미륵당 앞에는 인각사석불좌상을 설명하는 엉뚱한 문화재 안내판을 세워 놓았습니다. 절이나 문화재청에서 조금은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합니다.






인각사 산령각






국사전


명부전


극락전








인각사 일연스님 삼국유사 특별전시관 구경하기












































위천


학소대

인각사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께서 말년에 주석했던 사찰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화산을 등지고 옥녀봉을 바라보는 인각사의 빼어난 절경은 군위 여행에서 최고로 가볼만한 여행지였습니다. 그리고 인각사에서 군위 댐 아래 일연공원을 잇는 둘레길을 만들어 위천을 쉬엄쉬엄 걸으면서 삼국유사의 일연스님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산서구여행/부산서구가볼만한곳)닥밭골행복마을. 소원바위에서 소원을 빌어 봐! 닥밭골벽화마을 여행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부산 서여고 뒤에는 주위 건물과 다르게 단층의 슬레이트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일명 닥밭골마을이라 부르며 주위보다 많이 낙후된 모습입니다. 동·서대신동 일대를 고분도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통일신라가 왕건에게 멸망하면서 고려가 개국하였습니다.





부산 서구 닥밭골벽화마을 주소: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2가 79-51




그런데 고려에 반기를 든 신라인의 저항이 만만찮았고 왕건은 신라인으로서 고려에 투항한 자들과 떼어 놓기 위한 방책으로 이들을 한곳에 잡아 가둘 수용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 수용소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대신동인데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뒤로는 구덕산과 엄광산 등 높은 산이 막고 있어 수용소로는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고려는 신라인으로 남겠다고 반항하는 사람을 모두 잡아 드려 이곳에다 격리했습니다. 격리된 신라인들은 고리짝을 만드는 노동을 해야 했으며 세월이 흘러 이들을 지키던 경비병도 철수하자 옛 신라인들은 이곳에 그대로 눌러앉아 살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호구지책으로 주위의 대나무를 잘라 고리짝(대나무로 엮어 만든 바구니)을 만들어내다 팔았고 또한 종이를 만드는 재료인 닥나무가 지천인 것을 보고 닥종이를 생산하여 내다 팔아 생활했습니다.




그 뒤 고분도리 고리짝과 닥종이는 우수한 품질로 소문이 나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 부자 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마을을 닥밭골로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서여고 정류장에서 닥밭골행복마을 이정표를 따라가면 됩니다. 안내판이 잘 되어 있으며 벽화도 있어 보고 갑니다.



닥밭골벽화마을 문화 나눔터



특히 소주병과 맥주병에 열을 가해 납작하게 만들어 예쁜 꽃을 꾸몄는데 닥밭골 긍정나무입니다. 닥밭골 벽화마을에는 ‘벽화와 문화를 품은 닥밭골 행복 마을’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오고 닥밭골벽화마을 안내도와 벽화마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계단에 올라서면 기념사진을 담을 수 있는 포토전망대입니다. 여기서 골목길을 찾아 들어가면 여러 벽화를 만납니다. 한사람이 겨우 지날만한 골목길은 아름다운 벽화로 칙칙했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어 마을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큰 나무로 조형물을 만들은 쉼터에서 한참을 쉬다가 소나무가 보이는 당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산에는 큰 소나무가 5그루 인 게 웅장했습니다. 1453년에 생긴 당산이며 매년 음력 정월 14일 자정쯤에 초현경로당에서 선정한 제관이 주관해 마을과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산신제와 당산을 지키는 할매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닥밭골벽화마을 당산

이곳 당산의 역사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매우 영험하여 기도발이 좋은 곳이라 소문났다 합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구경하면서 중복도로에 올라서면 길게 192계단으로 된 소망 계단입니다. 참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같이 높고 긴 게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닥밭골벽화마을 소원계단

이런 계단을 이곳 주민들은 하루에도 수십번 오르내렸다. 생각하니 그저 대단할 뿐입니다. 이곳에 집이 들어서기 전에는 모두 밭이었다 합니다. 당시 이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이곳을 오르내리던 사람은 그 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졌다 하여 소원바위라 불렀습니다.



이 높은 곳 까지 집이 차차 들어서면서 산복도로가 개설되었습니다. 그와 함게 소원을 들어주었던 소원바위도 산복도로의 개설과 함께 깨어져 나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이곳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소원바위는 없지만, 그 바위가 있었던 자리에는 계단이 생겼고 지금도 이 계단을 오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바위가 꼭 소원을 이루게 해 준다”며 저보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속으로 빌었습니다.


이번에 풀바디 카메라로 꼭 바꾸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ㅎ ㅎ 아직 풀바디 카메라는 소식이 없네요? 닥밭골 벽화마을 구경도 하고 소원 계단에서 소원도 빌어보세요. 행운의 여신이 찾아올지 누가 압니까??




 

(부산동구여행/부산동구가볼만한곳)호랭이이바구길.  부산 동구 범일동 호랭이이바구길을 걷다

 

이번에 부산의 이바구길인 동구 호랭이이바구길을 산보 삼아 다시 한번 걸었습니다. 도시철도 1호선 범일역 7번 출구로 나오면 현대백화점입니다. 이곳 현대백화점에서 동구 호랭이이바구길은 출발합니다. 호랭이이바구길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면서 백화점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로를 걷습니다.

 

 

 

 

 

안창마을 주소: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산 65-300

 

호랭이 이바구길 지도

 

 

곧 하늘에 걸린 구름다리가 보일 때쯤에 갑자기 하수가 흐르는 도심 속의 하천이 나타납니다. 이 하천이 수정산에서 발원하는 호계천입니다. 범일동과 범천동의 유래가 되었던 골짜기지만 지금은 도심에 묻혀 계곡의 흔적은 이곳 이외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호계천일대가 온통 수림의 바다였습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숲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몸을 숨기고 살았다 합니다. 지금이야 모두 집이 들어서고 도심의 개발에 밀려 숲의 흔적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호랭이이바구길의 흔적을 찾아 발길을 옮겼습니다. 구름다리를 올라갑니다.

 

 

경부선 철로에 걸린 구름다리는 언제부터인가 ‘친구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부산 출신 영화감독 곽경택이 메가폰을 잡아 ‘친구’가 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유행병처럼 번졌던 명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 ‘내가 니 시다바리가’ 등 유행어를 남겼던 영화 친구는 부산 영화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구름다리를 다람쥐처럼 뛰어올라 범일동 극장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던 우리들의 친구.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나도 배낭을 옆구리에 끼고 냅다 뛰어보지만 아이고 무릎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는 게 이제 다되었나 봅니다. 나의 학창시절도 이럴 때가 있었다며 그때를 생각하고 보림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이야 영화관이 모두 광복동과 서면 해운대로 몰려있지만, 예전에는 보림극장하면 부산 최고의 시설을 갖춘 빵빵한 영화관이었습니다. 실제 시설과 규모 때문에 영화상영보다는 당대의 기라성 같았던 연예인이 단골로 출연해 리사이틀을 주로 열었습니다.

 

 

 

 

가수 남진·나훈아·하춘화·이미자와 코미디언 서영춘·배삼룡 등 백지수표를 제시하며 모셔갔다던 연예인을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쇼 전문극장 보림극장, 역사의 굴레 속에 폐관되었다가 부산 동구 호랭이이바구길로 조금은 옛 명성을 잇고자 당시를 회상하는 걸개그림을 달았습니다.

 

 

 

 

 

 

 

 

참 많은 사람을 울게 하고 웃게 했습니다. 보림극장을 왼쪽으로 돌면 범일 골목 시장입니다. 지금이야 쇠락하여 명맥만 유지하지만, 한때는 좁은 골목길에 시장을 보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던 곳입니다.

 

 

 

이는 한국동란의 피난민과 6~70년 경기가 살아나면서 호구지책으로 탈 농촌 하여 무조건 도시로 올라온 사람이 신발공장과 봉제 공장이 많았던 범일동·범천동에 대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국제상사·삼화고무·태화고무 등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아는 굵직굵직한 공장입니다.

 

 

이들 여공과 가족이 아침·저녁으로 채소와 생선 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고 갔는지 이제 범일 골목 시장도 추억만이 흘렀습니다. 골목 안에 ‘동구 영화 촬영지’를 훑어보면서 우리가 보았던 많은 영화가 동구에서 촬영되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골목 시장을 지나다 보면 호천석교비 안내판이 있습니다. 1711년 숙정 37년에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 썩고 해서 돌다리로 바꾸면서 세운 기념비로 당시에 세웠던 비석은 2000년에 박물관으로 옮겨가고 그 대신 지금의 비석을 세워 호천석교비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호천석교비를 지나면 ‘누나의 길’과 만납니다. 6~70년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무작정 고향을 떠나 신발공장이 많았던 범일동에 몰려들었던 우리의 누나들... 이 골목길은 신발공장, 봉제 공장에서 여공이 되었던 수많은 누나가 출·퇴근하면서 오르내렸던 골목길입니다.

 

 

 

 

하늘의 별과 함께 출근하고 하늘에 솟은 달과 함께 퇴근하면서 지났던 골목길. 그 당시 출퇴근 시간에는 따각따각 하는 누나들의 구둣발 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합니다. 그 누나들의 흔적이 신발박물관에 남아있으며 골목 담벼락 이곳저곳에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나마 당시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신발박물관

 

 

 

 

 

신발박물관은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관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아름빌 아파트 앞입니다. 여러 갈래가 갈라지지만 아름빌아파트를 왼쪽으로 끼고 도로를 따라갑니다. 왼쪽 산비탈에 ‘극장이야기’ 안내판이 있습니다. 영화 포스트, 당시 동구의 수많았던 영화관이 있었음을 알게끔 꾸며놓았습니다.

 

 

 

 

 

 

 

 

 

 

삼일극장. 삼성극장, 보림극장 등이 있었으며 ‘저 하늘에도 슬픔이’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영자의 전성시대’ ‘미워도 다시 한번’ ‘얄개’ 등 영화 포스트가 당시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영축사 계단 길을 올라 새롭게 조성된 범일동 전망대에 오릅니다. 이곳은 똥산으로 불렸던 아담한 산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집집이 수세식 화장실이지만 당시에는 푸세식으로 똥바가지에 똥을 퍼와 이곳에다 구덩이를 파고 묻었으며 멋모르고 오르내리다 똥통에 숱하게 빠졌다는 에피소드가 있는 범일동 전망대를 똥산전망대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참 우습고 슬프다는 신조어인 ‘웃프다’를 떠오르게 하는 범일동산전망대. 그러나 전망하나는 시원한 게 끝내줍니다.

 

 

범일동산전망대

 

 

 

마을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할 것 같습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이제 귀환 동포 마을입니다. 주위의 집들보다 한결 낮아 보이는 단층 슬레이트 지붕이 해방과 함께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내렸던 귀환 동포를 수용했던 시설물입니다. 그중에서도 천재 화가 이중섭도 1951년 12월에 안내 마사코와 함께 피난 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한국명 이남덕은 ‘범일동 1497번지’ 판잣집의 생활이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고 행복했던 순간이라며 술회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뒤에 형편이 여의치 않아 마사코는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아이와 함께 떠나고 이중섭은 술과 부두노동자로 고단한 삶을 살면서 가족을 그리워하다 그의 대표작인 ‘범일동 풍경’을 그리게 됩니다.

 

 

 

 

다시 골목길을 나오면 쌈지공원에 운동기구가 놓인 호랭이 쉼터입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만물상회를 지나면 산복도로의 삼거리와 만납니다. 오른쪽 럭키슈퍼 골목길을 따라가면 통일교 성지인 통일교 기도관 옆입니다.

 

 

여기서 오른쪽 도로를 내려서서 안창마을로 바로 가도 되지만 내친김에 문선명 목사가 한국동란 때 범일동에 피난 와 기도했다는 ‘눈물의 바위’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계 40개국에서 모은 돌과 눈물의 바위를 보고 내려와 만나는 첫 번째 집에서 왼쪽 골목으로 빠져나갑니다.

 

 

지금은 정자쉼터 등 말끔하게 정비를 해 놓아 한결 좋아 보였습니다. 다시 마을 길을 내려서면 안창마을 오르는 메인도로입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르던지 광명사 앞의 하천을 따라 오르는 길을 가도 안창마을 29번 버스종점에서 만납니다.

 

 

 

 

동구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안창마을. ‘골짜기 안의 분지마을’이라는 뜻인 안창마을은 실제 밖에서 보는 것하고는 엄청나게 규모가 큽니다. 피난민과 산업화로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이 하나둘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버스가 다니지 않던 시절에는 이른 새벽 범일동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합니다.

 

 

많은 사람의 애환이 서려 있는 안창마을에 호랑이를 모티브로 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호랭이이바구길’로 다시한번 새로운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칙칙했던 동네는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으며 언제부터인가 오리 요리하면 안창마을로 통할 정도로 오리요리 대표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을 가운데 루미네수녀 기념관에서 호랭이이바구길 여행을 마쳤습니다. 루미네수녀님은 부산 동구의 안창마을 2평 남짓한 판잣집에서 형편이 어렵던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21년 동안 사랑과 희생. 봉사로 돌보았던 수녀님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입니다. 부산 동구 호랭이이바구길을 걸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루미네수녀 기념관

 

한국동란과 그 후의 산업화의 중심에 있었던 범일동과 범천동 특히 호계천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많은 아버지·엄마·누나·형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부강한 대한민국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지리산 지안재.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지안재 여행.


함양 쪽 지리산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산에서 가기 위해서는 통영 대전고속도로에서 생초 요금소를 나와 엄천강을 따라가면 바로 마천면의 지리산 명소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함양 지리산 여행에서는 생초나들목이 아닌 광대고속도로 함양 요금소에서 차를 내렸습니다. 이는 지리산 제일 관문인 오도재와 지안재를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함양 지리산 지안재 주소: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 산 119-3 




함양여행에서 꼭 찾게 된다는 지안재는 이색볼거리로 유명합니다. 티브이나 언론에서 이색명소로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곳입니다. 왜!! 이곳이 이색명소가 되었는지 보겠습니다. 지안재는 갈지(之)자 형태의 도로가 여러 개 겹쳐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된비알의 오르막길을 여러 번 꺾어 쉽게 고개를 넘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모습이 꼬불꼬불한 양의 창자를 닮았다고도 합니다. 지안재를 지나 오도재를 오르면 함양사람은 비로소 지리산 품속에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질적인 지리산의 시작이며 지안재 고갯길을 올라 많은 선인이 지리산을 찾아들었습니다.



해운 최치원, 점필재 김종직, 남명조식, 일도 정여창, 유호인, 서산대사, 벽송대사, 인오대사, 청매조사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지리산으로 향했으며 모두 이 고개를 넘어 다녔습니다. 또한, 오도재는 청매조사가 지리산을 찾으면서 험준한 고개를 넘어 다니다 도를 깨쳤다 하여 오도재라 불렀습니다.



남해와 하동의 해산물을 이고 진 보부상이 태산준령의 지리산 주능선인 장터목과 벽소령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함양을 거처 내륙지방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들어가는 통로로 모두 오도재와 지안재를 이용했습니다.



지금이야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이 부로 지안재를 찾지만, 고종 25년인 1988년까지만 해도 오도재 아래인 구룡리 조리마을에다 제한역 두어 통행하는 인마와 물산을 관장했으며, 이를 보면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통행량이 아주 빈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오도재와 지안재는 함양사람에게는 삶의 일부분으로 그만큼 중요한 고개였습니다.

 


이곳 지안재 도로가 어느 해 한국타이어 광고에 등장했습니다. 자동차가 급히 커버를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대부분 시청자는 어느 외국의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함양의 지안재가 촬영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아름다운 도로가 있다는 것에 적이 놀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지안재는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으며 건설교통부가 지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특히 밤의 지안재는 더욱 아름다워 전국의 사진작가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자동차 라이트 불빛이 길게 이어지는 장노출 촬영은 지안재의 백미로 떠올랐으며 저도 낮의 지안재는 여러 번 찾았지만, 밤의 지안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볼품없는 사진 실력이지만 시간만 허락된다면 삼각대를 가지고 장노출의 지안재 사진을 꼭 한번 담아보고 싶습니다. 함양여행을 계획한다면 지안재 여행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리산전망대로서도 꼭 추천합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천태종 삼광사 연등 축제. 5만개의 연등이 장관인 삼광사 연등 축제 여행


방가방가 안녕하세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지난 토요일 저녁에 삼광사 여행을 했습니다. 부산시 부산진구 초읍동의 천태종 종단인 삼광사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매년마다 연등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삼광사 주소: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54-58

삼광사 전화:051-808-7111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4월 16일부터 세상을 밝히는 연등 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삼광사의 연등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방문객이 매일 찾고 있습니다. 삼광사의 연등축제는 CNN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선에도 당당히 이름 올렸으며 한국에서 가장 가 볼 만한 여행지에도 뽑혔습니다.

 

 

 

 


 

 

저도 가장 아름다운 한국 50선에 선정된 삼광사 연등 축제 구경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연등축제 행사 기간에는 삼광사주변이 복잡해서 대중교통편 이용이 편리합니다. 저 또한 대중교통편을 이용했으며 교통편을 보면 도시철도 1·2호선이 만나는 서면역에서 영광도서 방향인 9번 출구로 나가면 됩니다.

 

 

 

 

영광도서 건너편 분수대 옆에 부산진구 15번 마을 버스정류장이며 이곳에서 승차하면 편안하게 앉아서 삼광사까지 갈 수 있습니다. 물론 환승도 가능합니다. 삼광사 연등축제는 오는 5월 3일 부처님오신날까지가 공식행사 기간이지만 예년을 보면 기간이 끝나도 연등에 불을 밝혀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은 더 연장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연등에 불을 밝히는 시간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이며 승용차 이용하여 밤늦게 도착하면 여러 곳에 마련된 삼광사 주차장에서 주차할 수 있지 않나 쉽습니다. 올해 삼광사 연등축제는 대략 5만 개의 연등을 입구에서부터 달아 놓았습니다.


 

 

 

 

 

삼광사 산책길은 물론이고 지관전과 법화삼매당 사이의 광장에까지 모두 뒤덮어 그야말로 연등의 바다입니다. 삼광사 연등 사진포인트는 지관전 2층과 3층 그리고 법화삼매당 2층 복도입니다. 이 두 곳이 삼광사 사진 포인트이며 저도 갤럭시 노트3 스마트폰을 들고 삼광사 연등 사진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담았습니다.

 

 

 

 

 

 


 

 

 

 

여기 올린 삼광사 연등사진은 모두 스마트폰으로 찍었습니다. 노출하고 화이트발란스만 조절했는데 사진을 잘 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삼광사에서 수많은 연등에 둘러 싸여보는 행복도 느꼈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성불도 기원해 보는 하루였습니다. 즐거운 석가탄신일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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