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안동여행)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안동 봉정사를 만나다. 안동봉정사 세계문화유산. 


이번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우리나라 전통사찰 7곳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유명사찰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두 동의 국보 건축물을 보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안동의 봉정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봉정사는 국보인 대웅전과 극락전 이외에도 여러 국가 문화재를 보유했습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 안동봉정사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 안동봉정사 전화:054-853-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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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사찰로 규모보다 이리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을 찾기 힘들 정도로 봉정사는 숨겨진 보배로운 사찰입니다. 

봉정사 입구에서 내려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놓은 길을 걸었습니다. 

천연 고찰을 만난다는 설렘을 진정도 시키면서 산사의 진한 풀 내음과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음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16년에도 봉정사 여행을 했지만 2년 만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다 설렜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오르막이라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돌려야 했습니다. 

막바지에 봉정사 오르는 돌계단을 두고 푸름을 잃지 않은 굵은 소나무가 무더위에 그늘을 만드는 양 길가에 드러누워 관광객을 맞이했습니다.



봉정사에는 따로 천왕문이 없으나 이 소나무가 천왕문 역할을 하는 듯 당당합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봉정사 출입문인 누각형태의 만세루가 있습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게 세월의 더께를 느껴질 정도로 오래되어 보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1680년(숙종6년)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창건 후에는 덕휘루(德煇樓)라 불렀다 하나 언제부터 만세루가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세루의 특징은 봉정사의 출입문 역할을 하며 산비탈을 깎아서 봉정사 절터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터를 다졌습니다.

 


만세루는 축대 가운데에다 걸친 형태로 그 아래에 출입계단을 내어 봉정사를 드나들도록 했습니다. 

그 때문에 대웅전에서 만세루를 보면 지면과 연결된 단층건물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2층 누각형태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크기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모양을 한 홑처마 맞배지붕건물입니다.



마루가 깔린 만세루는 정자나 강당 역할 등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닥은 우물 정자 모양을 한 우물 마룻바닥에 평난간을 돌렸습니다. 

특히 만세루에서 눈여겨 볼 점은 누각을 받치는 기둥입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형태인 기둥은 휘어진 게 찾는 사람의 마음을 경직되지 않게 편안함을 주며 언뜻 보면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겨집니다. 

만세루는 장식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운판과 북,, 목어를 설치하였고 덕휘루 현판과 기문도 걸려 있습니다. 

유형문화재 제325호. 

만세루를 지나면 봉정사 경내입니다.

 


먼저 앞쪽에 사찰의 중심건물인 국보 제311호 대웅전이 있습니다. 

나라의 보물이 한점도 아니고 두 점이 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봉정사 대웅전은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두고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나온 기록을 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중창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극락전 상량문과 천등산 봉정사기(1728), 양법당중수기(1809)인 묵서와 1999년 해체 수리하면서 봉정사 탁자 조성기, 법당중창기(1435), 정면 어칸 기둥 묵서(1436), 대웅전개연중수기(1601)등의 기문을 찾아내어 대웅전의 변천 과정을 알게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확인된 자료에서 1809년까지 9~10회 정도 대웅전을 보수했으며 그중 1361년인 공민왕 10년의 불단 묵서와 1428년 세종 10년에 불화기록, 1431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내어 최소한 봉정사 대웅전은 1425년인 세종 7년 전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봉정사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크기로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모양의 팔작기와지붕입니다. 

봉정사대웅전은 기존의 대웅전과 다르게 대웅전 앞에 조선시대 누마루 양식인 툇마루를 달아내었습니다. 

이는 고려와 조선 초기의 건물 양식을 접목한 형태로 눈여겨 볼만합니다. 

안동 봉정사에서는 대웅전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이며 1971년 극락전을 수리하다 1625년 인조 3년에 작성한 상량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상량문에는 672년인 신라 문무왕 12년에 능인 대사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원효대사의 창건설로 알려졌었으며 1363년인 공민왕 12년에 극락전의 지붕을 수리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훨씬 이전부터 극락전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천등산은 대망산이라 불렀으며 능인대사가 대방산 토굴에서 수도에 전념하였고 그 과정에서 스님의 불력을 시험하려고 천녀는 능인에게 파계하여 속세에 내려가서 함께 살자고 유혹하였으나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불제자의 도리라며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옥황상제는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수도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님은 도를 깨치자 도력으로 봉황을 접어 날려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봉정사를 창건했습니다.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온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고 산은 천등산이라 불렀습니다.

 



천등산 봉정사는 최근까지 6번의 큰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6.25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주둔하는 등 많은 어려움과 곡절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봉정사 불전은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1999년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한국방문을 하면서 이곳을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 부릅니다. 

건물 내부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당 벽을 만들고 그 앞에다 부처님을 보시는 불단을 만들었습니다. 

닷 집은 화려하지 않으나 섬세하게 꾸몄으며 대장전이라 불렸다가 극락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극락전 앞에는 고금당과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고금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 기와건물입니다. 

봉정사의 많은 목조 건물 중에서 미니어처처럼 가장 작아 보이는 건물로 당시의 독특한 건축기법에 시선을 끄는 건물입니다. 

1969년 해체 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1616년 광해군 8년에 고쳐 지은 것을 확인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보물 제449호.








고금당과 극락전 사이에는 고려시대 양식인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에 지정되었으며 이중 기단에 석탑의 기단부 일부는 깨어지고 상륜부는 분실되었으나 대체로 깔끔하며 양호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봉정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는 데 그 역할을 담당하는 건물이 화엄강당입니다. 

봉정사의 오래된 건축물을 많이 접하다 보니 화엄강당의 연역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목조건물은 몇 년쯤 되었는지 그 궁금증을 가지며 화엄강당을 차근차근 보았습니다.

 






화엄강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크기로 주심포양식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양법당중수기에는 17세기에 대웅전을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이때 화엄강당도 새로 지어졌거나 수리된 게 아닌지 보고 있습니다. 

본전불을 모신 대웅전에 비해 간결한 장식으로 꾸몄는데 이는 법당과 강당의 차별을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엄강당은 보물제488호.





봉정사 경내를 둘러보고  영산암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전남여행/순천여행)두 종단 싸움에 대한민국 최고의 절집이 된 순천 조계산 선암사. 조계산 선암사.


순천 조계산은 동·서로 선암사와 송광사인 두 사찰을 두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 순천 여행에서는 조계산 선암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순천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국적인 사찰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유홍준 교수님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조계종과 태고종의 오랜 종단 싸움으로 선암사는 송광사처럼 개발의 미명에서 밀려나게 되어 오늘날 최고의 가람이란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 우습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순천 선암사 주소: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

순천 선암사 전화:061-754-5247




2018/06/06 - [여행] - (전남순천여행)순천 조계산 송광사 천자암 쌍곱향나무, 천자암 쌍곱향나무



순천 선암사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한국적 고찰 분위기가 생생하다는 선암사를 찾았던 5월, 바로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오색의 연등이 승무처럼 나풀나풀 미풍에 춤을 추는 모습이 한국 최고의 절집과 정말로 잘 어울렸습니다. 

선암사의 창건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나 백제 때 아도화상과 신라말의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분분합니다마는 후자인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해서 선암사로 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합니다.





선암의 유래는 절 서쪽 높고 편편한 바위에서 옛 선인들이 바둑을 두었다고 하여 절 이름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선암사는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부속암자였던 대각암에 머물면서 선암사의 중창을 진두지휘하셨다 합니다. 

당시 선암사는 중창으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는데 법당은 13동에다 전각이 12동에 많은 스님이 상주하면서 수도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거느린 암자만 19개였을 정도로 조계산에서는 송광사와 함께 최고의 사찰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왜적이 송광사로 들이닥쳤고 송광사는 전각과 건물, 암자가 치솟는 불길 속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나서 쇠락한 선암사는 1660년 다시 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경잠·경준·문정대사 이 세 분이 8년간의 각고 끝에 중창을 이루어 선암사는 옛 모습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암사는 여러 번 중창을 거듭하고 이어져 오다 1823년(순조23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등 수많은 전각이 불길에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해붕·눌암·익종 세 분 대사에 의해 선암사는 6번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청량산과 혜천사로 고쳐 불렀던 명칭을 본래의 이름인 조계산과 선암사로 다시 고쳐 부르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암사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6·25 한국전쟁에 또다시 역사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쳐 좌우의 대립과 갈등 속에 큰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그 후 비구와 대처승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두 종단에서 소유권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선암사가 옛 모습을 간직한 게 전통사찰의 무분별한 개발을 보면서 어찌 보면 그 분쟁이 다행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선암사는 사적 및 명승 8호에 지정될 정도로 짙은 숲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주차장에서 선암사 경내로 들어서는 1.5km 흙길은 울울창창한 숲 속 터널로 한여름의 무더위도 무색하게 만듭니다.

 


이 길을 벗어나면 오늘날의 선암사 명성을 있게 하는데 일조한 승선교가 왼쪽에 걸려 있습니다. 

무지개가 걸린 듯한 승선교는 홍예식의 아치형 다리입니다. 

승선의 뜻을 보면 "신선이 되어 오르는 다리"란 뜻으로 이 아치형 다리 밑을 통해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누각’인 강선루를 보는 풍경은 가히 선경이며, 제가 보기에도 선암사의 제1경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선암사 홍보물과 블로그, 카페 등 선암사를 알리는 모든 홍보 사진은 승선교 아래에서 강선루를 보는 사진이 메인 사진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이곳이 사진작가와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나 모두 공통의 선암사 승선교 포인트입니다. 

저 또한 미물이라 남들처럼 승선교 아래에서 강선루를 담아보려고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아치 교각 사이로 강선루를 넣고 사진 몇 장을 담고 올라왔습니다.



승선교는 조선 시대인 1713년(숙종39년)에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화강암으로 완공한 다리입니다. 

다리 규모는 길이는 14m이며 높이 4.7m 폭 4m 반원형 아치로 대단한 규모입니다. 

다리 아래 천장 가운데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넓은 계곡을 끼고 세워진 기단부는 자연 암반 위에다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게끔 튼튼하게 기초를 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승선교는 길게 다듬은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짜 맞추고 주변 계곡에서 주운 작은 돌은 차곡차곡 쌓은 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 정교합니다. 

다리 아래 천장에 달린 용머리는 승선교의 화룡점정일 정도로 돋보이는데 옛말에 이 돌을 빼버리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속설이 전해온다고 합니다. 

함부로 빼버리면 안 될듯합니다. ㅋㅋ 누구 장난으로 빼지 마세요. 

혹시 다리가 무너지면 큰일나니가요?





승선교을 세우게 된 유래가 전해져 옵니다. 

1698년(조선·숙종24년)호암대사는 관음보살 친견을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담하여 바위에서 몸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대사는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경내에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고 계곡에 무지개 모양의 승선교를 세웠다 합니다.



승선교 외에도 선암사의 승려였던 초안과 습성스님이 1729년 보성 벌교의 홍교도 보시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를 보면서 당시 선암사의 규모를 알 수 있었습니다. 

불교에서의 가장 큰 보시는 월천공덕이라하며 다리를 놓아 사람들을 편하게 다니도록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서 승선교를 세우고 난 뒤 돌다리인 홍교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인당은 선암사 경내를 들어서는 입구에 만들어진 긴 알 모양의 연못입니다. 

연못 안에는 작은 섬을 만들었으며 선암사 사적에는 신라 경문왕2년인 862년에 도선국사 때 만들어졌다 합니다. 

삼인당에서 삼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말합니다. 

연못의 섬은 자리이타(自利利他) 타원형의 연못은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의미하며 뜻을 풀이하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며 나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한다"는 뜻의 불교사상으로 이러한 모양과 이름을 가진 연못은 현재 선암사에만 남아 있다합니다. 

삼인당은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



부도군을 지나면 나오는 게 목장승입니다. 

양쪽에 세워진 목장승은 조선 말엽에 세워진 목장승의 모조품입니다. 

1987년 9월에 세운 것이며 장승에 새긴 '호법선식'은 불법을 수호하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성불하게 만드는 착한 신을 뜻합니다. 

'방생정계'를 새긴 장승은 이곳부터는 더욱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함을 뜻합니다.













선암사 대웅전 보물 제1311호

 대웅전은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신 건물입니다.

선암사 대웅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탔던 것을 1660년 (조선·현종1년)에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1766년(영조 42년)에 또다시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다가 1824년(순조 24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모양을 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기단은 기둥 면석 감돌로 조립하고 그 위에 다시 주춧돌을 놓아 민흘림 두리기둥으로 세웠습니다.

 




기둥 위로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고 그 위로 공포를 짜 올렸으며 출목수는 밖 3출목, 안 4출목으로 그 모습이 대단히 장중하고 화려합니다. 

대웅전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에 용조각과 공포 등이 장엄하게 단장되었으며 단청도 비교적 선명합니다. 

선암사에는 매화나무도 참 많았습니다.














선암사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















이곳에 선암매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원통전과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가는 길에 50주 정도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원통전 담장 뒤 백매화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가 문화재로 지정해 있습니다. 

이 두 매화가 천연기념물 제488호 입니다.

매화나무의 수령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약 600여 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송과 함께 심었다고 하며 이를 보면 600년 된 매화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암사 중수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92호

1707년 (숙종33년)에 건립된 비로 정유재란 때 불탄 선암사를 약휴대사를 중심으로 중건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이수와 귀부, 비신은 일반적인 양식의 비석이지만 전체 높이는 502cm, 비신의 폭은 125cm이며 비신 두께는 30cm로 조선시대 비석으로는 매우 뛰어나다 합니다.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395호

순천 선암사 동·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 양식의 삼층석탑이며 선암사의 중심건물인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세운 두기의 석탑입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인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세워 두 탑은 규모와 솜씨가 똑같아 같은 사람이 동시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기단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단의 굄돌로 윗돌을 받치게 했습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을 새겼고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4단의 층급받침으로 되어있습니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2단의 굴곡인 굄돌이 있는데 이는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노반과 그 위에 작은 석재가 남아 있습니다. 

석탑의 양식을 추정하면 신라 중기 이후 9세기의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선암사 대웅전







선암사에서는 꼭 보고 오는 게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선암사의 화장실인데요 화장실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마 제가 알기에는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찰에서는 해우소 또는 근심 푸는 곳이라 부르는데 선암사의 해우소는 뒤깐이라 작은 명패를 달고 있습니다. 

선암사 뒤깐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우리 전통 화장실로 선암사 여러 곳을 둘러 본다고 이번에는 화장실을 빼 놓고 와 버렸습니다. ㅋㅋ 

정말 많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선암사 여행은 어느 사찰에 비유해도 참 볼거리가 많습니다. 

이번에 많이 챙겨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보지 못하고 온게 참 많았습니다. 

다음 선암사 여행에서는 이번 여행에서 못보고 온거 부터 챙겨야겠습니다. 


선암사 일주문 천장의 용조각, 화재방지를 위한 비방으로 보입니다.


선암사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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