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문화공원. 동요 산토끼를 상징하는 토끼 조형물 창녕문화공원 여행


창녕에서 두 번째 찾았던 공원은 창녕군을 대표하는 창녕문화공원입니다. 

창녕문화공원은 창녕군청 뒤의 야트막은 산봉우리와 창녕의 진산인 화왕산을 푹 담근 명덕저수지, 창녕향교를 아우르는 7만 평의 넓이로 보는 재미와 걷는 재미가 쏠쏠한 군민공원이었습니다.





창녕문화공원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398




2018/04/03 - [여행] -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만옥정공원, 진흥왕척경비 창녕척화비 창녕객사 퇴천삼층석탑 만옥정공원

2017/11/26 - [여행] - (경남여행/창녕영산여행) 영산 만년교. 13세 소년의 신필 만년교 비석과 돌다리를 보다.

2017/11/22 - [여행] -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창녕문화공원을 구성하는 시설물은 한여름 무더위를 날려주는 분수대와 화왕산과 창녕 읍내의 빼어난 전망을 선사하는 팔각정, 산새 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걷는 산책로, 108개 번뇌를 씻어준다는 108계단,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놀이터 등이 있으며 공원과 연계된 수변 생태공원인 명덕저수지가 있습니다.

 


휴식과 산책을 동시에 겸할 수 있는 힐링 공간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을 심어 어린이의 자연학습장으로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공원 인근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창녕향교와 교동 고분군까지 갖추고 있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합니다.

 


인양사를 창건하면서 세웠다는 인양사 조성비를 보고 찾았던 창녕문화공원은 다른 공원과 다르게 창녕의 지명과 문화라는 이름이 붙어 무엇인가 특별한 공원이구나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창녕은 동요 산토끼의 고장으로 ‘산토끼노래동산’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어린이는 물론이고 청장년층까지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로 시작하는 산토끼 동요는 모르는 분이 없는 국민동요입니다.





이 산토끼 노랫말은 1928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안리 당시 이방보통학교에 재직했던 이일래(1903~1979) 선생이 지었습니다.

학교 뒷산 고장산을 올랐다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산토끼를 보고서 생각한 노랫말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나라 잃은 우리 민족도 하루빨리 나라와 억압에 빼앗겨버린 자유를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동요라 합니다.


창녕문화공원



저도 창녕문화공원의 산토끼 조형물을 만나면서 새삼스럽게 산토끼의 노랫말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녕문화공원의 탄생은 바로 이 노랫말인 ‘산토끼’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라의 보배인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 시설 등이 참 잘되어 있어 가족공원으로서도 최고였습니다.





108계단을 오르다가 왼쪽의 덱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키큰 나무가 서 있는 오솔길을 오르면 어느덧 봉우리에 팔각정 전망대에 닿습니다. 

창녕의 진산인 화왕산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며, 창녕읍내를 세세하게 내려다보는 그야말로 일급조망이 펼쳐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이날 날씨가 흐려서 많이 아쉬웠지만 맑은 날이면 전망은 끝내줄 듯합니다.





 재미있게 산토끼를 풍자화한 조형물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어도 보았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명덕저수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다가 보니까 사직단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올라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합니다. 

그런 곳이라 하면 아주 신성시했던 곳 같았습니다.











창녕현 사직단의 기록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며 『여지도서』, 『경상읍지』, 『조선후기지방지도』, 『교남지』 등의 문헌에 나타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현의 서쪽 1리에 위치한다고 하며 지금의 사직단과 위치나 방향 등 모든 게 일치하며 창녕 사직단은 16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창녕사직단







창녕은 6·25 한국동란의 최고 격전지였던 낙동강 방어선 중 한 곳인 박진 나루터와 오항 나루터, 남지 등을 방어했던 미 제24사단이 북괴의 제4사단을 맞아 많은 병력을 희생하면서 지켜내었던 곳입니다. 

이곳에 세워진 ‘6.25 월남 참전기념비’를 보면서 이분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과 6·25 참전 용사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의가사 제대를 하셨던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했습니다.

월남 참전비를 보면서 이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습니다.

 








이제 명덕저수지입니다. 생태공원답게 수변공원을 따라 덱 길이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참 반영이 아름다웠습니다. 누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저 아름다운 반영을 깨트리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못은 고요했습니다. 

연못을 돌아 창녕향교로 향했습니다.

 



창녕명덕저수지 명덕수변공원








창녕향교

창녕향교는 외삼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으며 까치발로 들여다보았습니다. 

창녕 지역 유림이 건립했으며 공자의 위폐 봉안과 외삼문과 동·서재, 강학소인 명륜당, 동·서무, 제향 영역인 대성전으로 구성했습니다. 

창녕향교는 명륜당 뒤로 제향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특이한 점은 석축을 쌓은 석재 중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사찰의 기단, 면석 등이 섞여 있는데 이는 폐사된 인양사의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높게 석축을 쌓고 명륜당을 세웠으며 앞면5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입니다. 

명륜당의 둥근 나무 기둥을 받치는 둥근 돌기둥의 주춧돌에 명륜당은 더욱 웅장하며 위엄이 느껴졌습니다.



창녕향교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효종 원년인 1650년에 한 차례 중건되었고 여러번 중수가 있었다 합니다. 

다시 명덕저수지로 돌아와 수변공원을 가로지르는 덱 길을 걸으면서 창녕문화공원 여행을 마무리 했습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만옥정공원, 진흥왕척경비 창녕척화비 창녕객사 퇴천삼층석탑 만옥정공원 


와우, 창녕에 자주 가지만 창녕 주민을 위한 휴식공원이 이리 많은 줄 몰랐습니다. 

문화재도 많지만, 우포늪, 남지체육공원, 창녕문화공원, 영산연지못, 남산호국공원, 창녕함안보와 합천창녕보등 산책이면 산책, 자전거면 자전거길 등 공원과 낙동강 보 하며 다양한 게 정말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만옥정공원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만옥정공원안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가득해서 더욱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면적은 1만㎡이며 도심 공원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규모였으며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대원군의 창녕척화비, 창녕 객사, 퇴천삼층석탑, 유엔전적비, 창녕현감비군, 지석묘가 공원을 가득 채웠습니다.

 




창녕 만옥정공원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3

창녕 만옥정공원 전화:055-530-2478




2017/11/22 - [여행] -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2017/11/26 - [여행] - (경남여행/창녕영산여행) 영산 만년교. 13세 소년의 신필 만년교 비석과 돌다리를 보다.



특히 4월에는 벚꽃공원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창녕신라 진흥왕척경비 앞의 벚나무에 벚꽃이 필 때는 정말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생각날 것 같았습니다. 

유엔전적비를 지나면 흥선대원군의 창녕척화비가 있습니다. 

척화비는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서양인을 배척하고자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이 이를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창녕척화비는 높이 1.23cm, 폭 46cm, 두께 20cm인 화강암으로 다듬었으며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짓이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창녕읍 교화리에 있던 것을 광복 이후 만옥정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그 왼쪽 작은 언덕에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각을 세워 보호하는 게 다른 문화재하고 달라도 정말 달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럴 만도 했습니다. 

비석인데요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입니다. 

창녕군 안에서는 나라의 보배인 국보는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과 함께 딱 두 점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위엄있어 보였습니다.



창녕신라 진흥왕척경비는 넓은 자연 암석을 이용해서 대충 다듬은 다음에 비문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중국 육조풍의 해서체로 새겨졌으며 모두 27행에 643자가 쓰였습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세운 3곳의 순수비에 나타나는 ‘순수광경’이라는 제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순수비가 아니라 영토를 넓히고 신라의 국경을 표시하는 비를 뜻하는 척경비라 합니다. 



그러나 왕을 수행했던 신료의 명단 등이 나와 있어 순수비에 속한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비문 내용에서 전반부는 마멸되어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나 첫머리에 ‘신사년이월일일립(辛巳年二月一日立)’의 글자가 확인되어 이 진흥왕 척경비는 561년인 진흥왕 22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의 후반부는 알아볼 수 있는데 대략 400자가 정도를 판독하였다 합니다. 

비문의 후반부에서 보면 어가를 수행한 관리의 관직명과 출신지역과 수행 순서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퇴천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이층의 기단에 탑신을 세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랐습니다. 

상륜부는 분실했으며 위층 기단과 갑석 일부는 부서져 없어졌으며 기단의 면석에는 양쪽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새겼습니다. 



각층의 몸돌 양 모서리에 기둥인 우주를 새겼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그 옆에는 창녕 객사 건물입니다. 

이 객사는 창녕 관아의 부속건물 중 하나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수 없다고 합니다. 

300~400년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객사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술정리로 옮겨졌다가 1988년 다시 현재의 위치인 만옥정공원내에 이전했습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 외국사신이 머무는 숙소이며 또한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객사 건물의 배치는 종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주건물과 좌우에 익사를 두어 건립되는데 창녕 객사는 주건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창녕 객사 건물은 벽체와 창호는 없고 지붕에 기둥만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본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하겠습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1호.












마지막으로 창녕현감비군입니다. 

역사가 깊은 고을이면 입구에 쭉 늘어서 있는 게 고을을 다스렸던 관리의 선정비입니다. 

신라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창녕에 부임했다 떠나는 부사. 현감과 어사 관찰사가 베푼 선정에 떠나는 것이 아쉬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을 백성이 세운 비석입니다. 

창녕 고을의 선정비가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은 것을 보면서 오랜 창녕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했습니다.

 











(경남여행/창녕영산여행) 영산 만년교. 13세 소년의 신필 만년교 비석과 돌다리를 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소통에 많은 비유를 합니다. 그런 만큼 다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이야 콘크리트를 가설하는 일률적인 형태로 다리를 건설하지만 옛날에는 장인인 석공이 돌로 만들어 예술성을 가진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창녕 영산만년교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455

창녕 영산만년교 연락처:055-530-1473




2017/11/22 - [여행] -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특히 창녕 영산의 만년교는 현재 완벽한 상태로 남아 충실하게 소통을 위한 다리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창녕 영산 만년교는 영축산 병봉과 남산(함박산)에서 내려오는 냇가에 걸린 다리라고 해서 만년교를 남천교로도 부릅니다. 만년교는 1780년인 정조 4년에 석공인 백진기가 놓았습니다.








만년교는 순수하게 돌만을 가지고 건설한 석교입니다. 서민적인 멋을 가진 다리이며 아무 꾸밈없이 지어졌습니다. 무지개를 뜻하는 홍예식인데 짜맞추어 끼운 32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다 둥글둥글한 모양의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흙을 덮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만년교는 막 쌓은 돌다리같이 보이지만 그래도 홍수와 오랜 세월에도 끄떡없이 견뎠으며 현재도 충실히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년교 양쪽 호안의 석축도 만년교가 지어졌을 때에 함께 쌓았다 합니다. 빈틈없이 짜맞추듯 쌓아올린 고색창연한 석축은 만년교의 분위기를 한층 더 분위기 있게 만들었습니다.












물이 흐르는 개천에 새운 홍예의 넓이는 11m에 높이가 5m이고 홍예의 장대석 석축의 교량 폭은 4.5m입니다. 만년교에는 전설도 있습니다. 현재에도 만년교를 알리는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의 만년교 필체는 기운이 넘치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필체로 문외한이 제가 보아도 명필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필체의 주인공이 13세 어린 소년이라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어린이가 여기에 글을 남기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만년교가 거의 완공될 무렵입니다. 어느 날 밤 소년의 꿈에 산신이라며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소년에게 말하기를 “네가 신필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내가 다닐 다리에 만년교란 이름을 네가 글로 써주면 좋겠다”고 하며 사라졌다 합니다.









소년은 꿈에서 깨어나 밤을 새워 ‘만년교(萬年橋)’ 글을 완성했으며 현재 만년교의 거무틱틱한 비석입니다. 그 비석 끝에는 ’十三歲書(십삼세서)란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창녕 영산의 만년교는 부산 근교에서 잘 볼 수 없는 무지개 돌다리입니다. 아마 언뜻 생각해도 유일한 무지개 돌다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귀한만큼 영산의 만년교는 주위의 산세와 정말 잘 어울리며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만년교를 가면 꼭 한번은 돌다리를 건너갔다 옵니다. 다리의 안전함도 확인하기 위해서지만 남산 산신이 건너다니는 돌다리라 했는데 이를 보면 신령스러운 다리 아닙니까. 그래서 그 기운도 받을 겸 해서 돌다리를 건넙니다.








창녕 영산 만년교 주위에는 영산 석빙고도 있고 1,300년이 넘는 신라시대 약수터인 함박약수터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명수로 통할 만큼 신령스러운 함박산 약수도 마시고 신령스러운 영산 만년교도 건너면 이제 남은 나의 운세는 활짝 펴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습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창고 창녕석빙고


창녕 우포늪을 여행하고 나서 점심을 창녕전통시장에 있는 수구레국밥을 먹었습니다. 수구레국밥을 맛있게 먹고는 소화도 시킬 겸 조금 걸으면서 창녕 석빙고를 보기로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조선 시대 얼음창고입니다. 요즘은 냉장고가 집집이 없는 집이 없어 냉동실에서 쉽게 물을 얼려 얼음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래서 얼음의 귀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냉장고는 귀하고 아주 값이 비싼 물건이라 서민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서민의 여름나기는 지금 생각하면 애처롭습니다. 



한여름에는 우물에다 수박을 담근 다음 차게 해서 먹는다든지, 아니면 얼음집에서 큰 얼음을 블록만 하게 톱으로 자른 팔았습니다. 작은 얼음에다 바늘을 꽂아 망치로 살살 치면 신기하게도 얼음이 산산 조각났고 그 얼음으로 차디찬 얼음 수박 화채를 만들어 먹든 기억이 있습니다.




창녕석빙고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창녕석빙고 연락처:055-481-4650






호랑이 담배 피우든 시절도 아닌 4~50년 전에도 이러했는데 조선 시대의 여름 나기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시원하게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삼복더위에는 요즘 같이 냉장고도 없는데 어디서 얼음을 구해와 냉 화채를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신기합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겨울에 계곡의 꽁꽁 언 얼음을 잘라 석빙고에 보관했으며 그 얼음을 가지고 삼복더위에 얼음 화채를 만들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얼음은 아무나 끄집어 내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아주 귀한 것이니까? 조금씩 나누어 먹어야 해”하면서 하사품으로 내려줬다고 합니다.







지금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빙수, 아이스크림, 얼음과자 등 먹고 싶으면 손쉽게 먹을 수 있어 좋은 시대에 사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창녕 석빙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러 곳에서 석빙고가 남아 있지만 그중 창녕 석빙고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현재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려고 입구에 쇠창살로 막아 놓아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석빙고의 내부를 완벽하게 본 곳이 청도 석빙고였습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청도석빙고를 내려가 보면서 여름철 얼음을 보관했던 원리와 석빙고 구조도 함께 보았습니다. 

창녕석빙고는 봉분은 흙으로 덮였으며 문은 닫혔지만, 창녕석빙고도 이와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석빙고는 옛 무덤인 고분을 닮았습니다. 고분과 크기도 비슷하고 출입구가 없다면 그냥 고분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석빙고의 구조를 보면 네모나게 땅을 깊이 파내었고 천장은 돌을 무지개(홍예) 인 둥글게 돌다리 형태로 짜맞추었습니다. 바닥은 평평하게 돌을 깔았으며 한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했습니다. 이곳이 얼음을 보관하는 방이며 빙실입니다. 

바닥의 북쪽에는 녹은 얼음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으며 벽체는 바닥에서부터 다듬어진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천장 부근에서는 다듬은 돌을 어긋나게 끼워 맞추어 무지개식 돌다리로 골조를 만들었으며 총 4개입니다. 

그리고 무지개형태의 돌다리 위에다 긴 돌을 걸치고 다시 보온을 위해 흙으로 두껍게 덮었습니다. 

천장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바깥의 공기가 적당히 드나들게끔 하는 굴뚝입니다. 이게 얼음이 잘 녹지 않게 하면서 오랫동안 보관하게끔 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1742년인 조선 영조 때에 창녕 현감인 신서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계곡의 얼음을 석빙고에 쉽게 옮기도록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자하골과 직각이 되게 하였으며 남북으로 긴 모양에 출입구는 남쪽에 두었습니다. 보물 제310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