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함월산 기림사. 왕의 길, 경주 함월산 기림사 여행


지난 가을여행에 경주에서 가장 골짜기라 해도 괜찮을 도통골에 자리한 기림사를 다녀왔습니다. 

기림사는 신문왕의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곳입니다. 

신라 수도 서라벌에서 부왕인 문무대왕을 만나려면 이곳 기림사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토함산 옆인 추령으로 도로가 뚫렸지만, 

당시에는 기림사를 거쳐 넘어다녔습니다.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7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전화:054-744-2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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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 천왕봉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문무왕의 무덤을 감포 앞바다 암초인 대왕암에 장사를 지낼 때도 이 길을 넘어다녔으며 이견대에서 신통한 피리인 만파식적을 구할 때도 이길로 다녔습니다.  

지금은 옛길을 새롭게 발굴하여 왕의 길이라 부르며 봄 여름 가을 많은 관광객이 이 길을 걸으려고 찾습니다.



왕의 길 중심에 자리한 기림사는 오래된 절의 내력에서 보듯이 기림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재미있습니다. 

기림사의 창건은 인도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이 임정사를 세웠다 합니다. 옛날 인도 범머라국에는 임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광유성인이 오백제자를 모아 놓고 설법을 하며 중생을 제도했습니다.

 


서천국에는 400여 개의 소국을 다스리는 사라수대왕이 있었는데 무상도에 관심이 많아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광유성인은 사라수대왕을 임정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사라수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먼 길도 마다치 않고 출발했습니다.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비는 다리가 아프다 했고 사라수대왕은 왕비를 장자의 집에 비녀로 팔고 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계속 나아갔습니다.

 


대왕은 광유성인을 만났고 임정사에서 왕생계를 외우며 수행정진 했습니다. 

사라수왕의 왕비는 장자의 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는 ‘극락’을 뜻하는 ‘안락국’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아기였던 안락국은 7년 만에 부왕인 사라수대왕을 만났으며 부왕의 가르침을 받아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림사 진남루

광유성인은 해동의 남쪽 땅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전하라며 안락국에게 떠나라 합니다. 

스승의 명을 받은 안락국은 계림국의 명당에 절을 짓고 임정사라 했습니다. 

그 뒤에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신라 최초 절이라는 뜻으로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기림사라 했습니다.



이게 기림사의 출발이며 기림사의 현판에는 함월산 기림사라 되어 있습니다. 

절을 감싸고 않은 산이 경주 함월산이기 때문입니다. 

기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보통 사찰 영역의 출입문을 뜻하는 천왕문은 제법 걸어가야 합니다. 

천왕문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악귀로부터 불법을 수호하고 절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곳을 지나야만 비로써 기림사 경내에 들어섭니다. 

기림사는 창건 당시부터 대적광전이 있었다 합니다. 

법당에는 삼신 여래를 모셨으며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불과 석조 오백나한 상을 모신 응진전. 삼층목탑, 정광여래사리각, 진남루, 무량수전 건물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정광여래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기림사의 문화재를 보면 정면 가장 큰 규모가 대적광전입니다. 

단층이 벗겨졌는지 알 수 없지만, 무채색의 건물은 묵직한 느낌이었습니다. 

보물 제833호. 금자사경은 보물 제959호이며 유물전시관에는 종이로 만든 보물 제415호 건칠보살상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과 진남루 등은 기림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문화재입니다. 

기림사는 ’한국 33 관음성지‘이며 전통사찰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기림사 대적광전

기림사에서 눈길이 가는 목재 건축물은 진남루입니다. 

새롭게 복원을 했지만 한눈에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이며 건물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진남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림사는 승병과 수군의 훈련장소 였으며 그때 불린 이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림사 응진전·삼층석탑

앞면 7칸에 옆면 2칸,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 자를 한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우물마루에다 판벽은 창호가 있었으나 사용용도가 바뀌면서 지금의 진남루는 원형이 바뀌어 알 수 없습니다.


기림사 약사전



응진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며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습니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건물입니다. 

기림사 약사전은 1600년대에 처음 지어져 1654년(효종5년)에 중창되었고 1678년(숙종 4년)에 약사 법당을 중수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면 3칸에 옆면 1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를 대표하는 본전건물입니다. 

지혜의 빛을 세상에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629년인 조선 인조 7년과 1793년 정조 17년에 고쳐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1862년(철종 13년) 기림사에서 일어난 대화재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건물입니다.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축양식입니다. 

이 밖에도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유물전시관, 매월당 등 건물이 있지는 근래에 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의 변모가 갖추어져 기림사의 옛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기림사 관음전










(경북여행/포항여행)포항 선바위 둘레길. 호미반도해안둘레길 포항 동해면 호미곶 선바위 


한반도를 포효하는 호랑이에 비유합니다. 

그 호랑이의 꼬리가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호미곶입니다. 

포항 호미곶에는 호미반도해안들레길을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 핵심적인 곳이 동해면의 입암리와 마산리를 잇는 700m의 포항 선바위길입니다. 

호미곶에는 하늘을 받치듯 한 사람의 손 형상을 세워놓아 새해에는 일출과 함께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입니다. 

그때 겸사겸사 해서 찾으면 정말 좋은 곳입니다.




포항 선바위 둘레길 주소: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입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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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시내에서는 오천읍을 거쳐 동해면으로 가는 그 가운데 해안가에 입암마을이 있습니다. 

이 도로가 영일만을 가던 옛길이며 자동차 드라이브코스로는 최고로 엄지 척입니다. 

선바위는 절벽 밑에 숨어 있어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내판을 잘 보고 가야 합니다.







선바위와 하선대는 바다 위를 걷습니다. 

종아리를 동동 걷어서 바닷속을 뛰어든다고 싶겠지만, 바다에다 덱을 깔아놓아 전혀 바지를 안 걷어 올려도 되는 그저 남녀노소 모두 눈 호강만 하면 됩니다. 

이곳에서 최고의 절경은 선바위입니다. 

높이가 약 6m이며 우뚝 서가 있다고 해서 한자로 입암이라고 합니다.





선바위는 선바위길 입구를 딱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그때문에 더욱 당당해 보이는 게 멋집니다. 

선바위는 자갈과 시멘트를 어개어 놓은 듯합니다. 

이는 화산 활동을 하면서 뜨거운 화산 열로 벤토나이트성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대단한 규모였으며 벼락을 맞아 쪼개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의 크기가 되었다 합니다.





이 일대는 모두 선바위와 똑같은 지질이며 독특한 모양입니다. 

아마 일부 사람은 대만의 예류지질공원과 많이 비슷하다 할 것 같습니다. 

예류지질공원의 여왕바위를 닮아가는 바위도 보였습니다. 

어마 무시한 세월을 보내면 여왕바위가 될 것 같습니다.

 










선바위를 지나면 남근석이 나옵니다. 

꼭 도깨비 방망이를 닮았으며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진짜로 금은보화가 막 쏟아질 것 같습니다. 

파도가 때려 바위 조각이 떨어져 나가 사람도 되었다가 미륵도 닮았다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선바위길은 걷는 내내 보는 재미에 상상을 더해 느끼게 했습니다.



 

폭포바위





선바위길에는 폭포 바위도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위틈의 골짜기를 따라 물이 떨어지나 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저 멋진 바위골입니다. 예류지질공원에는 여왕 머리 바위가 있다면 포항 선바위길은 왕관을 쓴 여왕바위가 있습니다. 

자연의 묘미가 그저 신비할 뿐입니다.



여왕바위




킹콩

영화 킹콩에서 빌딩을 오르는 화난 킹콩이 포항의 동해바다 절경에 취해 그만 넋을 빼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킹콩도 혼을 빼놓는 선바위 절경 정말 킹콩이라고 참 이름 잘 지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힌디기라는 백색 바위가 나옵니다. 천길 낭떠러지에 큰 구멍도 뚫려 있습니다.




힌디기



노씨 성을 가진 분이 정착하여 흥하기를 바라며 흥덕이라 불렀다는데 그게 음이 변해 힌덕, 힌디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위가 흰색이라 흰 언덕이라 불렸다가 흰덕, 힌디기로 바뀌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힌디기는 화산 활동을 하면서 화산성분이 백토로 형성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








하선대

힌디기를 지나면 자갈마당도 나옵니다. 

자각자각 밟으며 걷는 재미도 있고 들이치는 파도가 자갈을 애무하며 내는 소리에 귀가 다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눈을 바다 한가운데로 돌리면 수면에 많은 갈매기가 앉아 있습니다. 

그곳이 하선대입니다.

파도가 좀 들이치면 하선대는 물에 잠겨 보이며 이 일대를 황옥포 또는 한미끼라 부릅니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놀고 갔다는 하선대에는 전설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옛날 칠월칠석날이면 동해 용왕이 하늘의 선녀를 하선대에 초청해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신명 나게 놀았습니다. 

그중에서 용왕의 마음을 움직인 참한 선녀가 있어 용왕은 왕비로 삼고 싶었습니다. 

선녀는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아야 혼인할 수 있다며 거절을 하자 용왕은 옥황상제의 환심을 사려고 태풍을 없애고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면서 옥황상제의 근심 걱정을 덜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에 옥황상제는 마음을 움직여 용왕과 선녀의 결혼을 허락하였고이 둘은 이곳에 자주 내려와 밀월을 즐겼다 하며 이 바위가 하선대입니다. 


 


멀리 바위 두 개가 솟은 게 자세히 보면 돌배를 닮았습니다. 

마을에서는 먹바위, 검둥바위라 부릅니다. 

여기에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입혀 봅니다.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편에 있습니다. 옛날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연오랑은 해안가에서 바위에 붙은 해초 채취를 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더니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먹바위

일본에서는 돌배에 사람이 탄 것을 보고 비범한 사람이라 생각해 그들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세오녀는 저녁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바닷가에 나가 남편을 찾았고 바위에 벗어 놓은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 바위에 올랐습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바위는 쏜살같이 달려 일본으로 향했고 연오랑과 세오녀는 서로 만났습니다. 그러자 신라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해와 달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관은 왕에게 해와 달의 기운이 모두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며 아뢰었습니다. 

왕은 큰일이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를 어서 빨리 고국으로 모셔오라 했습니다. 

연오랑 부부는 이게 하늘의 뜻이라면 신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 한 필을 주면서 이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보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왕에게 고하였고 왕이 비단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다시 환하게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왕은 비단을 나라의 보물로 삼고 창고에 잘 보관하게 하고 귀비고라 불렀으며 비단을 놓고 하늘에 재사 지냈던 곳은 영일현 도는 도기야라 했습니다. 

현실로 돌아와 이 먹바위가 연오랑과 새오녀를 일본에 실어 날랐다는 그 돌배가 아닌가 하며 다시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펴 봅니다.

 



선바위

이제 살을 애이던 추위도 지나고 여행하기 좋은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날 포항 선바위둘레길과 기기묘묘한 해안가 바위 여행을 떠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전혀 다른 모습인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경주 여행 포스팅에서 이번에는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서출지 가운데 있는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큼 많은 보물과 국보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 떡을 주무르듯이 빚어낸 석불과 석탑이 남산을 가득 채웠고 그것도 모자라 남산 언저리에 무수한 문화재가 널려 있습니다.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3

보물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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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한곳이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폐사지로 추정되지만 염불사지 같은 절터 명칭을 찾지 못하고 지역의 이름을 따와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그런데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 자리한 이곳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남산사로『삼국유사』에는 ‘남산 동쪽의 양피사’를 근거로 폐사지를 추정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합니다. 

아마 인근에 양피 저수지가 있는 것을 저수지 명칭이 양피사에서 근거한 게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나란히 섰다 하여 보통 남산리 쌍탑이라 합니다. 

그런데 쌍탑이라면 쌍둥이처럼 똑 닮지는 않아도 조금은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산리 쌍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완전 180도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이란성 쌍둥이인 특이한 모습이라 더욱 눈길이 갑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쪽 탑은 모전 석탑의 형식으로 세웠다 생각됩니다. 

기단부는 바위를 벽돌식으로 다듬어 쌓았으며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 8개를 어긋나게 놓아 서로 물리게끔 했습니다. 

층마다 몸돌과 옥개석인 지붕돌을 한 개씩 다듬어 올렸고 전탑 형식인 죽장리 오층석탑과 같은 지붕돌의 경사면에 5개의 층단을 두었습니다. 

또한, 처마 밑에도 층급받침을 5개 두었습니다.





남산리 서탑은 동탑에 비해 많은 정성을 들였다 하겠습니다. 

동탑의 기단부는 돌을 그냥 다듬은 형태로 쌓았다면 서탑은 2중 기단에 위층은 사방 널돌에 팔부중상을 돋을새김한게 돋보입니다. 

진짜 예술성이 장난 아닙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이 꿀떡 같았지만, 문화재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둘려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이는 곳만 렌즈를 당겨 담았습니다. 

팔부중상 하나하나 개성이 넘쳐나며 한 분 한 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세세하게 조각했습니다. 

한 면마다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팔부신장을 조각했는데 동쪽에는 야차와 용, 남쪽은 아수라와 건달바, 북쪽은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쪽은 천과 가루라 신장입니다.



팔부중상은 신라 중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탑은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을 나타내는 신앙의 한 표현입니다. 

원래 석탑은 열반에 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듯이 아주 신성시 하며 불법을 보호하는 팔부신장을 새겨 악귀들의 범접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의 높이는 동탑은 7.04m, 서탑은 5.85m이며 동탑이 서탑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서찰을 받아 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서출지 여행


경주 남산 동쪽에는 특별난 이력의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라 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연못보다는 조금 큰 못이라 생각됩니다. 

이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세상 시름을 잊으며 지냈을 분을 생각하니 정말로 부러웠습니다. 

뒤로는 경주를 대표하는 남산이 드리우고 앞에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품은 토함산을 정원 삼아 그 가운데 연못에 정자을 세운 이요당은 사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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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돌을 쌓아 정자의 턱을 받쳤으며 나머지는 연못에 몸을 맡기며 즐거움을 노래했을 이요당은 1664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1612~1672)이 지었던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3칸 규모였다고 하나 5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치며 앞면 4칸에 옆면 2칸으로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팔작기와지붕에 건물은 ‘ㄱ’자 형태입니다.

 


임적은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 마을에서 덕망이 높았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농작물이 바싹 말라 농민이 애를 태웠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생은 직접 땅밑에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내어 마을은 물론이고 이웃마을에까지 물을 공급하여 사용하게 했습니다. 

서출지 정자의 편액은 물과 산을 즐긴다는 ‘요산요수’의 뜻을 취해 ‘이요당’이 되었습니다.





이요당을 품은 서출지는 신라 시대 때부터 있었으며 전설이 있습니다.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소지왕은 궁궐을 나왔다가 남산 아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습니다. 

쥐는 소지왕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쪽을 가르키며 따라가라고 일렀습니다.


 


소지왕은 신하를 보내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신하가 서출지 부근에 이르자 멧돼지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정신이 팔려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면서 소지왕에게 전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신하는 괴이하게 생각하여 소지왕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봉투를 건네주었습니다.





봉투 겉면에는 “봉투를 보면 두 명이 죽을 것이요. 만약에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이 있어 고민하다가 두 명이 죽는 거보다는 한명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봉투를 뜯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보고는 “두 명은 백성을 말하며 한 명은 임금을 뜻한다며 봉투를 뜯을 것을 아뢰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소지왕이 봉투를 뜯었더니 안에는 ‘사금갑(射射匣)’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라는 뜻이며 소지왕은 궁궐로 돌아와 활을 당겨 화살을 거문고 통에 쏘았습니다. 

그때 거문고 통 안에서 비명이 났습니다. 

통 안을 보니 궁녀와 승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잡아 참형시키고 그일이 있은 후 서찰을 받아 임금의 목숨을 구했다는 뜻인 서출지(書出池)라 불렀습니다. 

서출지 사적 제138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경주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입니다. 

흔히 아흔아홉 골(실제는 60여 개)에 아흔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암자가 부지기수로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절터로 보는 곳이 아주 많은데 그중 한곳이 경주 동남산 칠불사로 오르는 남산마을 맨 안쪽에 자리한 염불사지입니다.






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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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에는 현재 동·서 쌍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염불사지의 쌍탑은 2007년 6월에 복원을 시작해서 2009년 1월에 완료하여 현재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으로 맵시를 뽐내며 전시중입니다. 

복원 되기 전 염불사터의 두 삼층석탑은 훼손 상태가 상당히 심했다 합니다.



1963년 나뒹굴던 염불사지 석탑 부재와 도지동의 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옥개석을 조합해서 불국동 구정광장에다 삼층석탑을 세웠전시했는데 저도 그곳을 지나면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을 시작하면서 2008년 1월 해체되었고 옛 염불사지에 동·서 삼층석탑으로 거듭났습니다.



경주 남산동 염불사지는 사찰 이름치고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염불이란 “부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며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중생이 생각하는 염불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의 수행법 중 가장 기초적인 게 염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염불사에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와 있으며 내용을 보면 경주 남산 동쪽인 피리(避李)마을에 어떤 스님이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염불을 외웠다 합니다. 

목탁을 두드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아했던지 서라벌의 백성이 모두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염불을 들은 모든 사람이 스님을 공경하였으며 염불(念佛)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목탁을 치며 머물렀던 피리사(避里寺)는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 합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늠름한 외모와는 다르게 아무런 문화재 감투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주 시내에 신라시대 문화재가 많아서 그런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근에 남산사지 동·서삼층석탑만해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문화재에 관심은 많지만,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석탑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염불사지는 사적 제311호에만 지정되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염불사지를 발굴 조사하고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를 내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염불사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고서에는 남리사지로 나오며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이라 합니다. 

2003년과 2008년에 각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와 금당터가 확인되었다합니다.







또한, 발굴보고서에서 석탑의 기초는 연약한 지반을 뚫은 후 안에 천석과 사질점토를 섞어서 교차로 다졌고 동탑지의 규모는 사방 6.5m, 깊이 1.2m 정도이며 내부에서 인화문 토기가 나왔는데 석탑의 건축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외에도 동회랑과 남동회랑, 중문지가 조사되었으며 출토유물을 분석했더니 사천왕사 등 시내사찰과 같은 시기의 기와가 창건기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서탑에서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함이 2개가 나왔으며 3층 탑신의 방형 사리공은 투공되고 탑재 등에서 염불사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와 같은 종류의 기와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의 ‘낭산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던 그 예언인 도리천이 사천왕사라 생각됩니다. 

그게 맞다면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30년이 지난 679년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던 것을 참작하면 염불사지의 창건 연대가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될 것 같습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보고 나서 남산리 버스정류장으로 돌아나오면서 해 떨어진 남산마을의 양피저수지입니다. 

안내판에는 3월에 벚꽃, 7월~10월에는 연꽃과 베롱나무가 장관이라합니다.

(참고: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




(경북여행/경주여행)고운 최치원의 상서장 여행. 상서장에서 최치원의 상소문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다.


우리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분은 너무나 잘알고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많은 분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대의 풍운아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을 가보았습니다. 

상서장은 경주 최씨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나랏일을 걱정하는 ‘시무십여조’를 써서 상소를 올렸던 곳입니다.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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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68년 약관 12세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엄청나게 빨리 조기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정에서는 그의 어떤 뜻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로 더욱 미운털이 박히자 40세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산천을 주유하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여생을 보내며 ‘계원필경’ 등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상서장 뒤로 최지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으며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상서장은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되었다 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향교, 경주 교동의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향교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도 경주향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그럼 경주향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향교가 있는 자리는 아주 오래전인 신라 시대부터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경주여행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여행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2018/01/23 - [여행]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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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국학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세워졌습니다. 국학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입니다. 그게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향교가 시대를 뛰어넘으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경주향교는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인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인 최응현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경주향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주향교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대성전에 모셨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정상아래 두덕암으로 옮겼으며, 두덕암은 현재 도덕암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인 선조 33년에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정을 먼저 중건하고 두덕암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4년에는 윤성이 대성전을 들어서는 동문과 서문을 세웠으며 1614년 광해군 4년에 이안눌이 강학공간은 명륜당과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를 중건함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1668년과 1979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평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의 형태입니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즉 강당영역을 앞에다 두고 문묘영역은 강당 뒤쪽에다 배치했다면, 경주향교는 이와 반대인 문묘를 앞에다 놓고 강당을 그 뒤쪽에다 배치한 형식입니다.









전묘후학이 조선시대 향교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양식은 생각보다 주위 향교에서는 만나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경주향교의 양식을 전묘후학을 따른 것은 옛 도읍지에 있는 향교의 공통점이라 합니다. 왕과 그 가족인 왕족이 먼저 공자와 성현의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전묘후학의 양식이 이해가 갔습니다.





경주향교에서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 입니다.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대성전은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양식을 말하며 대성전의 내력이 현재 정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물의 공포와 창호, 내부의 가구 등 옛날 방식의 기법이 남아 있으며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확인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나왔으며 공자의 위패와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주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 출신인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음력 2월8일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경주향교 여행에서는 문묘 공간을 바깥에서 까치 발로 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습니다. 어느 향교든지 모든 문묘공간은 문을 닫아두는데 이번 경주향교 대성전은 그날 행사가 있어 문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분께 양해를 구하자 원래 대성전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들어가세요 하여 대성전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성전을 보고 나오면서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돌우물은 경주향교를 들어서는 쪽문 앞에 있어 가장 먼저 보지만 향교를 만나고 나오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국학이 건립될 당시부터 있었던 우물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돌우물은 땅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낮은 형태이며 테두리를 다듬은 널따란 돌 2개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과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경주 교동 최씨 고택도 함께 만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경주 최부잣집으로 통하는 최씨 고택과 경주향교, 월정교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보았던 곳이 경주 교동 마을 입구에 있는 경주 사마소(慶州 司馬所)입니다. 사마소하면 텔레비전 사극드라마에 한 번쯤 등장하는 양념입니다. 사마소는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토론을 벌이던 장소를 말합니다.



경주 교동 사마소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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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수령에게 자문하던 유향소가 당시 권력인 훈구파가 장악했는데 이와 맞서서 사마소는 젊은 유생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훈구파의 행태를 보면서 팔팔한 젊은 기상으로 뭉쳐져 아주 좋은 뜻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연구와 정치토론을 하면서 고향마을 교화에 힘써기도 하고 관청의 행정도 도와주는 등 처음에는 아주 좋은 뜻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권력이 따라붙고 세력화가 되니까, 초창기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관청의 업무를 도와 주던 게 권력으로 개입하고 수령에게 태클까지 거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변질하여 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등 그 행동이 도를 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폐단이 자꾸만 일어나자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은 사마소 폐지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시국의 시류에 휩쓸리는 정치꾼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경주 사마소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741년 영조 17년에 복원해서 풍영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사마소를 찾았을 때는 풍영정과 병촉헌 사마소 현판이 없었는데 이번에 세 현판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때는 아마 수리 중이었나 봅니다. 사마소 현판은 1762년 부윤 홍양한이 글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촉헌은 1832년 생원 최기영이 썼다고 하는데 사마소, 풍영정, 병촉헌의 현판 글씨의 필체가 묵직하고 모두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사마소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출입문이 꽉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까치발로 담장 너머에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사마소는 경주향교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월정교 인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에 옮겨 왔다고 합니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



그리고 사마소 바깥의 담장 아래에는 영광대가 새겨진 사각 돌기둥과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안내판을 보니 사마소에 세워져 있었던거라 합니다. 1860년에 선비들이 남천에 흩어져 있는 월정교의 석재를 모아 대를 쌓고 영광대(影光臺)라 했다고 합니다.



영광대의 뜻풀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으며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잘못하지 않게 타일러 주의를 시키는 글귀가 담겨 있다”는 의미라 합니다. 영광대를 보면서 성현의 책을 읽고 마음을 닦는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포항여행)포항 운제산 오어사와 오어지, 가을빛이 내려 앉은 오어사와 오어지 갤럭시 노트5로 담다.   


포항에서 가을에 쉽게 가볼 만한 곳이 오어지가 있는 오어사입니다. 보통 사찰이 큰 저수지를 끼고 있는 곳이 드문 일인데 그래도 오어사는 가을철 단풍그림과 잘어울리는 오어지로 인해 한층 더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가을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찾았던 포항 오천읍 오어지와 오어사. 시기를 딱 맞추어 찾아서 그런지 절 주위 단풍은 좋았지만, 가을을 즐기려는 관광객 때문에 오어지와 오어사는 완전 북새통 이었습니다.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합니다. 창건하면서 많은 큰스님이 이곳에서 주석하며 수도 정진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신라 4대 성인이라는 자장율사는 물론이고 원효대사와 혜공선사. 의상대사가 머물렀으며, 삼국유사를 집필하시면서 일연스님도 이곳에서 계셨다 합니다.





오어사는 창건 당시 항사사라 불렸지만, 원효와 혜공의 일화 때문에 사찰 이름이 바뀌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왜 오어사라 불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원효와 혜공은 이곳에서 수도 정진을 했습니다. 혜공은 항사사에 머물렀고 원효는 오어사 앞 계곡을 건너 골짜기 안의 운제산 자락의 토굴에서 수도에 전념했습니다. 하루는 원효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먼저 중국에 유학을 갔다 온 선배로서 원효를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혜공은 원효를 찾아가 내기를 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원효 또한 흔쾌히 승낙하여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기란 게 오어사 계곡에 사는 물고기를 삼켜서 죽지 않고 살아서 대변으로 나오는 사람이 이긴다였습니다. 두 스님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서 각자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서 삼켰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한 마리는 죽어서 나왔지만 한 마리는 살아서 오어사 계곡을 거슬러 힘차게 가는 것을 보고 서로 물고기가 자신의 것이라 했습니다. ㅋㅋ


 



원래 이런 내기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두 스님은 아마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나 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내 물고기다’하여 내吾자와 고기魚자를 합해 오어사(吾魚寺)가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오어사를 품은 운제산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혜공과 자장은 서로 운제산 자락의 바위절벽에서 참선하며 수도할 때에 하늘의 구름을 잡아 사다리를 만들어 서로 내왕했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운제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합니다.


 







각설하고 가을 오어사의 제1경은 바위 벼랑 끝에 지어진 자장암이 비친 오어지 반영입니다. 많은 사진작가분이 단골로 찍는 사진인데 요즘 가뭄이 심해서 그런지 오어지의 수량이 만수위가 아니고 계곡도 완전히 말라있어 오어지에 비친 자장암의 반영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저는 오어지에 건설된 구름다리를 건너서 오어사를 붉게 물든인 단풍 반영은 볼 수 있었습니다.



 





















가을의 오어지와 오어사는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어사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 오어사 동종과 원효대사가 사용했다는 삿갓입니다. 모두 오어사 경내의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동종은 오어지 공사를 하면서 진흙을 긁어내다 발견해 보존처리를 하고 전시중이며, 삿갓은 1,300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누더기와 같이 헤어져 심하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종이와 실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솜을 넣고 바깥에는 풀뿌리로 만들었다 합니다. 단풍이 좋은 날 오어사의 빛바랜 대웅전을 둘러보고 파란 가을하늘의 오어지 반영을 보면서 내년의 오어사와 오어지 여행이 기다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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