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여행)의성김씨학봉종택. 의성김씨학봉종택과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운장각에서 보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봉정사를 보려고 찾았던 안동여행에서 먼저 만나는 안동 의성김씨 학봉종택입니다. 

봉정사와 함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학봉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후에 1679년(숙종5년) 문충 시호를 받았습니다.




의성김씨학봉종택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5

의성김씨학봉종택 전화:054-672-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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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하면 황윤길과 함께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조선침략의도를 정탐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분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학봉선생을 경상도 관찰사 초유사로 임명하여 전란을 막도록 했습니다. 

먼저 학봉김성일선생 종택을 보기 앞서 학봉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학봉김성일선생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황윤길과 조선통신사로 참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의도를 파악하려고 동행합니다. 

조선통신사의 업무가 끝나고 김성일과 황윤길은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황윤길은 조만간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며 전쟁설을 보고하지만, 김학봉은 그와 반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꿈도 꾸지 않는다며 전쟁불가 설을 서로 상반 댄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황윤길의 보고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고 조정은 김성일에게 파직과 함께 참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류성룡은 김성일에게 왜 그런 보고를 하였느냐고 묻자 김성일은 그때야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왜란의 가능성을 부정한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 나기도 전에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게 더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여 그런 보고서를 올리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나아가 지금 전쟁으로 시국이 혼란한데 김성일만이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며 다시 등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선조는 경상도관찰사초유사로 임명하였고 학봉선생은 경상도로 내려와 의병장 김성일과 정인홍 등을 도와 왜군을 막는데 힘썼습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장군이 죽자 학봉선생은 진주성을 수성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왜적은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곡창지역인 호남평야로 진격하려고 진주성을 침공한다는 계획을 미리 알고는 의병과 힘을 모아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왜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승리로 호남평야는 지켜낼 수 있었고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학봉선생은 1593년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습니다. 

의성김씨학봉종택은 들어서는 삼문 입구에 ‘학봉선생구택’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앞면 5칸에 옆면 1칸인 대문채를 지나면 진초록의 잔디가 깔린 마당에 들어섭니다.

 


넓은 정원에는 유실수와 소나무와 다양한 문양석이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마당을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했다면 본격적인 학봉구택을 둘러보겠습니다. 

학봉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으며 류성룡과 함께 성리학의 학통인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추앙 받는 분입니다



학봉종택은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저지대로 조금만 비가와도 물이 들이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1762년(영주38년)에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옮겼습니다. 

1964년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안채만 옮겼으며 사랑채는 그곳에 남겨두고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학봉종택의 사랑채는 한일자 건물이며 안채로 들어서는 출입문은 열려 있고 왼쪽의 닫힌 문은 부엌문입니다.



안채에는 현재에도 김성일 후손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사생활을 침해할까 싶어 출입을 삼가는 게 좋을 듯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안채는 오른쪽에 3칸의 대청을 두었고 왼쪽에 2칸의 안방으로 꾸몄습니다. 그 끝에 부엌이 붙은 전형적인 경상북도 양반가옥의 ‘ㅁ’자형 구조입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으로 2칸은 온돌방이며 2칸은 마루입니다. 

4칸의 사랑채 앞면에 길게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돌렸습니다. 

1963년 옮겨오면서 새로 지었으며 칸마다 각각의 현판이 달렸습니다. 

사랑채 옆에는 운장각(雲章閣) 건물이 있습니다. 운장각 안에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가 문화재인 보물이 수두룩해서 그런지 출입문이 잠겨 있습니다. 

‘운장’은 "탁피운한(倬彼雲漢) 위장우천(爲章于天)”에서 한자씩 따왔는데 “저 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맑게 빛난다”라는 뜻입니다. 

이 앞에도 안동여행을 하면서 학봉종택을 방문했으며 이번에도 학봉종택을 찾았으나 운장각은 개방되지 않고 굳게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오늘은 안동에 관계되는 분인지 단체관광객이 찾아 왔으며 그분들과 인사를 하려고 학봉김성일선생 종손되시는 분이 하얀 계량한복을 입고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체 관람객은 가시고 잠시 있다가 우리보고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으시기에 부산서 왔습니다. 하고서 "저기 운장각은 평소 개방을 하지 않는가 봅니다" 하며 여쭈었습니다.

 



종손분이 "예" 하시면서 "큰 카메라를 들어 신 거 보니까 어디 사진 찍으러 다니시는 분입니까" 하시며 운장각을 한번 보여 주겠다고 흔쾌히 가자고 했습니다.

 내심 많이 기뻤습니다. 

기쁜 마음에 운장각으로 따라갔습니다. 

번호 키가 달려 있으며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수많은 책과 병풍이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금고도 열어주시면서 내부를 공개했습니다. 

그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학봉김성일 선생의 경연일기, 해사록과 선생의 친필 유고와 사기, 고려사절요 등 조선 초기에 간행된 전적 56종 261점과 교지, 편지 등 고문서 17종 242점 등 총 73종 50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봉선생의 유물인 안경, 벼루, 말안장, 신발 등 400여 년이 넘었다는 선생의 유품을 보면서 후손들의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휴대전화로 사진 몇 장을 담았습니다. 

이번 안동 학봉김성일 선생 종택여행을 하면서 저에게는 큰 수확이라면 운장각에 보관된 선생의 유품과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만났던 거였습니다.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그 옆에 또 다른 건물은 풍뇌헌입니다.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앞면 4칸에 좌우 각 1칸은 온돌방을 깔고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 

앞에는 툇마루에 난간을 둘렀습니다. 

처마는 겹처마를 넣어 건물의 품위를 한껏 높혔습니다.

 



학봉 김성일선생 기념관



(전남여행/진도여행)진도대교 진도타워와 울돌목해양에너지공원  명량대첩 전승지. 진도타워와 명량대첩 전승지 울돌목 여행


진도 여행의 관문인 진도대교를 건너면 먼저 만나는 게 이순신 장군의 3대첩 중 한곳인 명량대첩의 울돌목입니다. 

진도여행에서 가장 먼저 보고 만나야 할 곳이 울돌목입니다. 

울돌목에는 진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진도타워와 명량대첩 전승지입니다.




진도타워, 진도타워 전망대 주소: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산 2-80

진도타워, 진도타워 전망대 전화:061-542-0990


2018/04/28 - [여행] - (전남여행/진도여행)진도 신비의 바닷길축제, 진도 모세의 기적이 열리는 진도 회동리




먼저 진도타워가 있는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진도대교가 가장 잘 보였습니다. 

또한, 진도대교의 야경을 가장 아름답게 본다는 곳이며, 진도대교 전망대라 부릅니다. 

진도타워에서 보면 똑 갊은 진도대교가 두 개 있습니다.

 


지금은 진도대교가 쌍둥이지만 1984년 10월 길이가 484m에 폭 11.7m의 외톨이 대교로 건설했습니다. 

교통량의 증가로 2005년 12월에 제2 진도대교를 건설했으며 진도대교가 가설된 이곳이 울돌목입니다.

 


물살이 워낙 빠르게 빠져나가 이를 보고 바다가 운다고 합니다. 

그 소리가 워낙 거친데 마치 와랑와랑 내 뱉는거 같습니다. 

이 물소리 때문에 바다가 우는 목이라 하여 울돌목이라 부릅니다.

 




불멸의 이순신 장군은 이 울돌목의 지세와 지형, 바다를 이용해서 세계 해전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했던 곳 울돌목. 

울돌목을 보면서 지난번 여행에서보다 더 많은 감동을 하였습니다. 

명량대첩 전망대 울돌목의 망금산 진도타워에는 이순신의 전승지를 보여주듯 모든 조형물이 명량대첩과 관계 있습니다.









판옥선 모형이라는 진도타워에는 7층의 전망대부터 명량대첩 승전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이 진도타워전망대에는 입장료가 있습니다. 

천원이며 관람 시간은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이며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입장해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무패 전승은 가히 하늘이 내린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진도타워전망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강강술래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보름날 서로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며 강강술래를 부르는 전통 민속놀이도 이곳 진도대교가 세워진 망진산 정상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 수군이 수적으로 열세임을 알고 왜적에게 우리 수군의 수가 많은 것을 보이려고 밝은 날 마을의 처녀와 아주머니가 손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왜적의 눈을 속였습니다. 

이 강강술래도 이순신 장군의 전략에서 기인했습니다.

 그 시작이 진도타워의 망진산입니다.

 












그리고 울돌목해양에너지공원 내 명량대첩 전승지로 향했습니다. 

울돌목을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서입니다. 

정유재란 때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당당히 맞서 싸워 세계 해전사에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승리했던 울돌목. 울돌목은 오늘도 변함없이 거칠게 그때를 이야기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장군 동상과 전망 덱에서 그때를 생각하며 회상에 잠겼습니다.




 울돌목명량대첩전승지인 울돌목해양에너지공원 주소: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1

울돌목명량대첩전승지인 울돌목해양에너지공원 전화:061-542-0881


















그 다음 날 새벽 진도읍에서 울돌목으로 향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전승지의 해돋이를 담기 위해서입니다. 

다행히 날은 흐리지 않아 진도대교와 동상이 잘 보이는 인근 작은 포구에다 삼각대를 설치했습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호령하는 듯한 장엄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두 주탑인 진도대교를 미숙한 사진 실력이지만 담아 보았습니다.



 진도 진도대교와 이순신장군 해돋이 포인트: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전리 52-1 앞



 

 

(부산동래여행/부산동래가볼만한곳)동래읍성. 송상현부사와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아픔이 남아 있는 동래읍성 여행


부산의 옛 지명은 동래였습니다. 조선 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는 읍성이 있었는데 그게 오늘날 복원하여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호가 되었습니다. 동래읍성의 범위는 아주 넓어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복천동·안락동·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원까지 걸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 마안산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지와 남문 터 등의 평탄지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의 석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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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8 - [여행]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내주축성비


북문



동래읍성은 마안산의 산성과 평지성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형태의 읍성입니다. 동래읍성의 축성을 보면 삼한시대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 동래에는 독로국으로 불렸던 성읍국가가 존재했습니다. 그때 이미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래읍성에 관한 기록은 1021년 현종 12년에 동래성을 수리했다며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바다 건너 일본의 약탈이 심했고 또한 동래부는 대일외교 창구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어 동래는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은 정3품의 부사가 담당하였습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발장군이 지켰던 부산진성이 무너졌습니다.


 



왜적 방어의 1차 관문인 동래성까지 왜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습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을 지키는 송상현 부사에게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고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내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으로 군·관·민은 최후의 일인까지 동래성을 사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장영실과학관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 마침내 동래성은 무너졌고 송상현 부사는 순절하였으며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전란은 끝이 났고 동래성은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731년인 영조 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언섭에 의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너진 성을 다시 더욱 크게 수축하였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지금 북문 안에 세워져 있는 내주축성비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약 3.8km이며 오늘날에 복원된 동래읍성도 그때의 흔적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동래읍성에는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라 부르면서 익성을 두었습니다.











동서남북 사대문에 문루가 있었으며, 은일루인 암문과 인생문, 남문의 앞쪽에 세병문이, 뒤쪽은 주조문의 이중구조였고 그 외 북문·서문·동문은 옹성을 쌓아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다시 한 번 헐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서장대








일제는 시가지 정비계획을 세우면서 평지의 동래읍성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지금 복천동과 안락동 등 평지에는 읍성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그 터만 알리는 작은 빗돌만 세워져 당시의 가슴 아픈 흔적을 말해줍니다. 복원된 동래성은 북문·인생문·서장대·북장대·치성과 여장 등이 현재 있습니다.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송공단.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산화한 송상현을 모신 제단 송공단 참배


필자는 동래읍성 역사 축제를 앞두고 송공단을 찾았습니다. 송공단이 어떤곳이냐고요??? 송공단은 1592년 일본이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5월 23일(음력 4월 14일)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우리의 치욕사 중 하나인 임진왜란입니다. 부산은 일본에게는 조선을 치기 위한 하나의 교두보였습니다. 왜군은 5월 24일 정발장군이 막았던 부산진성을 먼저 치고 동래읍성으로 진격했습니다. 






☞2016/10/06 - [부산 축제] - (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제22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려요. 동래읍성역사축제









당시 동래읍성은 동래부사 송상현께서 성문을 지켰습니다. 동래읍의 백성과 송상현은 죽음을 각오하며 한 뜻으로 끝까지 싸웠으나 종과부족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송상현은 갑옷에다 관복을 걸치고 북쪽의 선조에게 예를 올린 뒤 부채에다 부모님께 올리는 한시를 적었습니다.







송공단 주소: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229-78

송공단 문의 전화:051-550-4161







“孤城月暈(고성월운: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지만)

列鎭高枕(열진고침:여러 다른 진영에서는 도와줄 기척이 없습니다)

君臣義重(군신의중: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父子恩輕(부자은경:부모와 자식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

송상현부사는 포로가 되었으며 항복할 것을 강요받지만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자 정원루에서 그를 처참하게 살해했으며 그의 첩인 금섬 또한 그를 따라 자결하였습니다.





부산 동래구 복천동에는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1호인 송공단이 있습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하신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휘하 장졸을 모신 제단으로 1742년인 영조 18년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단을 만들기 전에는 순절한 정원루터에 있었는데, 동래성의 남문 밖인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인 농주산입니다.







 농주산에다 임진왜란으로 순절하신 분을 모신 제단을 쌓고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과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신 모든 분을 모셨습니다. 1742년 제단은 지금 모습과 달리 동서남북 4단인 열십자 형태였습니다.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 등,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등,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 등, 남단에는 향리 송백 등을 모셨고 매년 음력 4월 15일 관에서 그들을 기리는 제사를 올렸습니다.





1760년에 와서는 부산진 첨사 정발과 이정헌을, 1766년에는 다대첨사 휸흥신을 함께 송공단에서 배향했습니다. 그러다 동래성에서 순절하신 분만 따로 모시게 되었고 다대포에서 순절한 윤흥신은 윤공단에, 부산진에서 순절하신 정발장군은 정공단으로 옮겨 각각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송공단은 2005년 11월에 1767년 ‘충렬사지(忠烈祠志) 기록에 나온 대로 복원한 상태이며 7단 16기로 구성했습니다. 중앙에다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 동단에는 조영규와 노개방을, 서단에는 문덕겸 등을 모셨으며 따로 송상현의 첩 금섬 등을 모셨습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본관은 여산이며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또는 한천이며 시호는 충렬입니다. 송공단은 동래시장 뒤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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