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여행하기. 경주 감은사지삼층석탑


경주 감은사지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감은사지는 동해구인 대종천을 거슬러 오르는 곳에 있습니다. 

감은사지는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께서 바다 건너 왜구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경주 감은사지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경주 감은사지삼층석탑 문의 전화:054-772-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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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무대왕이 승하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죽으며 동해안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라고 말입니다. 

죽어서라도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면서 말입니다. 



당시 남해안과 동해안에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 정말 골치가 아주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를 부처님의 원력으로 물리치려고 문무왕은 생전에 감은사를 짓게 했습니다.

 




문무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유업을 이어받아 절을 완공하였습니다. 

절은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인 감은사로 명명하였습니다.





현재 감은사지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세운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금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 터는 경주에 많이 남아 있는 신라 금당 터와 아주 다르게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기









금당의 바닥이 뜬 마루 식으로 밑에 공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는 문무왕이 화한 동해의 호국용이 대종천을 따라 올라와 이곳 감은사 금당 밑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한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1959년 감은사지 금당 터 발굴조사를 시작하면서 금당의 바닥구조가 바위를 깎아 마루로 깐 뜻한 구조임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문무왕의 전설이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국보 112호에 지정됐습니다. 

이 삼층석탑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석탑으로 창건연대가 확인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탑의 높이는 13.4m이며 이중기단에다 몸돌을 올렸습니다.



하나의 큰 돌로 만든 석탑이 아니라 초창기 석탑의 특징인 여러 개의 돌로 조립하여 만들었습니다. 

지붕돌의 처마 밑은 5단의 층급받침에 지붕돌 위의 곡면에서 우리나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0년까지 금당 터와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1996년에는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도 해체복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해체복원하는 동·서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사리가 들었던 수정 사리병이 함께 나왔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문무왕의 만파식적을 신문왕이 받았다는 이견대 여행. 경주 이견대 여행


경주 감포읍 대본리 이견대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여행은 벌써 하고 왔는데 갑자기 손과 발목 골절로 포스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기록 차원에서 하였습니다. 

이견대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한눈에 바라보는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있는 정자입니다.





경주 이견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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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이견대를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낸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을 받았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견대’를 중국의 주역인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에서 차음해왔다는 기록과 “큰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이견대 정자는 1970년에 발굴하여 옛 이견대 터로 확인하였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생각하며 완공한 이견대는 사라졌지만 1979년에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현재의 정자로 복원했습니다.


저기 암초인 대왕암 보입니다. 



이견대 주위에는 신문왕이 용이 된 부왕의 휴식처로 감은사를 지었습니다. 

감은사지에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금당 터는 기존의 형태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금당 아래가 비어 있는 뜬 모습을 보여주며 석재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 신문왕과 신라의 국운만을 생각한 문무왕을 만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장항리사지와 장항리 서 오층석탑 여행. 경주 장항리 서 5층석탑


경주 토함산 골짜기에 자리한 장항리사지 장항리 5층 석탑을 보고 왔습니다. 

장항리 5층 석탑은 지난해 한번 보고 왔으나 이번에 또다시 석탑의 몸돌에 조각된 정교한 인왕상이 보고 싶어 다시 찾았습니다.





경주 장항리사지, 경주 장항리서오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

국보제2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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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장항리 5층 석탑을 여행하면서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정교한 석탑의 인왕상은 그때의 감동을 다시금 느끼게 했습니다. 

경주 장항리 5층 석탑은 경주 한수원과 토함산 터널 인근에 있습니다.



깊은 골짜기에 자리해서 그런지 석굴암을 찾아 토함산을 오르는 관광객이거나 아니면 장항리사지의 소문을 듣고 찾는 사람이 전부일 정도로 한적합니다. 

경주 소문난 여러 관광지에 비해서는 한적하여 꼼꼼하게 구경하기에 참 좋습니다.

 


국보에 지정되어서 그런지 장항리사지 건너편에는 주차할 곳도 있어 정말 편리합니다. 

눈에 장항리 5층 석탑이 빤히 보이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협곡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는 장항리사지까지 곧추선 덱 계단이 놓였는데 이게 여간 아니게 힘들었습니다. 

장항리사지에 올라섰더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나 국보를 본다는 생각에 감수해야했습니다. 

이제 한숨 돌렸다면 본격적인 장항리사지 동·서 오층석탑과 좌대를 보도록 합니다.



 


장항리사지에는 온전한 모습인 장항리 서 5층 석탑과 완전히 파괴된 장항리 동 5층 석탑 그리고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가고 좌대만 현재 장항리사지에 남아 있습니다. 

 


장항리사지는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탑과 불상이 안치된 좌대가 온전한 모습으로 토함산을 지키며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늘도 너무나 완벽한 예술품을 시샘했는지 일제강점기인 1923년 도굴범에 의해 장항리 두탑과 불상을 안치한 좌대는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도굴범은 주위 광산에서 사용하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했다니 두 탑과 불상에 진귀한 보물이라도 들었나 싶어서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진귀한 보물은 정작 두 석탑과 불상인데 인간의 헛된 욕심으로 천년 역사가 한 번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장항리사지 좌대 사자상



경주 장항리사지는 절의 명칭은 아직 알려지지 않아 지역의 장항리를 따와 경주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안치된 불상은 조각난 부재 이외에 찾지 못한 부재는 경주 남산에서 재질이 같은 석재를 찾아내어 돌을 깎아 접착하여 전시 중입니다.







이 석조불상을 안치한 좌대가 장항리사지에 남아 있습니다. 

좌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익살스러운 사자상입니다. 

장항리 서 5층 석탑은 1932년 주위에 흩어졌던 부재를 모아 복원되었지만, 장항리 동 5층 석탑은 1층의 몸돌과 5개의 지붕돌을 포개어 놓았습니다.







아쉽지만 그래도 장항리 서 5층 석탑만이라도 온전하게 남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항리 서 5층 석탑은 금당 터에 복원되었으며 2단의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려 한눈에 봐도 시원스러웠습니다.



기단부를 넓게 해서 그런지 전체적인 느낌은 안정감이 들었습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 몸돌에는 사면에다 문 형상을 만들고 문을 지키는 한 쌍의 인왕상도 조각해 놓았습니다. 

우락부락하며 근육질의 인왕상은 살아있는 듯 정교했습니다.







그러나 마모된 부분도 있어 많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지붕돌인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에 두께가 얇으며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서 날렵하며 경쾌합니다. 

 지붕돌의 아랫면은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으며 상륜부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습니다.

 






장항리서 오층석탑은 1층 몸돌의 인왕상에서 통일신라 8세기의 특징이 보입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에 있는 경주 보문사지 석조 여행


경주 보문동 마지막 여행지는 경주 보문사지 석조입니다. 

석조는 사찰에서 물을 담는 그릇을 말하는데 요즘으로 보면 물을 담아두는 물탱크라 하겠습니다. 

지금이야 물탱크는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등의 재료로 만드는데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방수입니다.





경주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사지 석조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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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래전에는 물을 담아두는 큰 수조의 재료를 보면 나무나 돌을 사용했습니다. 

나무는 물과 만나면 쉽게 썩는 단점이 있지만, 돌은 내구성과 방수가 완벽하여 사용하였다고 보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보문사의 창건과 함께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문’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현재 보문사의 옛터에 당시에 사용하던 수조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경주 보문사지 석조라 부르며 보물 제64호에 지정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화강암이 재료입니다. 

길이가 273㎝·너비 90㎝·깊이 61㎝ 크기입니다. 

가로가 긴 직육면체의 모양을 가졌으며 그 안쪽을 조금 작게 정육면체 모양으로 넓고 깊게 파내었습니다.

 



보문사지 석조는 내·외부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인 느낌은 밋밋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물을 담아만 두는 장식으로 사용한 게 아니고 물을 담는 석조로 실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7㎝ 배출구멍이 있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를 여행하면서 만난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경주보문사지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보고 왔습니다. 

당간은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사찰의 의식이나 행사가 열릴 때 절 입구에 당인 깃발을 깃대에 달았으며 이를 고정하는 받침대를 당간지주라 합니다.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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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의 높이는 380㎝입니다. 

통일신라 시대 사찰이며 보문사지로 알려지게 된 사유는 보문의 명문이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사유로 경주보문리사지의 경주보문리당간지주로 불리다가 경주 보문사 지당 간지 주라는 바른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보문사지 금당 터에서 서남쪽에 제법 많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와 조금 혼동되기 쉽지만, 완전 다른 당간지주입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의 두 기둥의 간격은 62㎝이며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두 돌기둥 중에서 왼쪽 기둥은 윗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이며 오른쪽 돌기둥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의 두 기둥 안쪽에 마주 보고 당간을 고정하는 3개의 네모난 구멍이 세로로 배열해 뚫렸습니다.




보물 제123호



특이 하게도 왼쪽 기둥은 구멍이 반쯤 뚫렸으며 오른쪽은 구멍이 완전히 뚫려 있습니다. 

기둥 사이에 받침돌은 분실상태이며 가늘고 긴 모습에 안정감이 있는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보문들에 남아 있는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동사지  경주 보문사지 여행


경주에서 가장 큰 위락시설이 있는 곳을 보문호가 있어 보문단지라 합니다. 

보문단지는 보문리에서 그 이름이 나왔는데 그 보문리의 유래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는 경주의 진산인 낭산과 명활산성이 있는 명활산 사이에 있는 너른 들을 보문들이라하며 그 보문들 가운데에 보문사로 보이는 옛터가 있습니다.





경주 보문리사지. 경주 보문동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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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리의 명칭이 아마 이곳 보문사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문리에 있는 절터라서 보문리사지로도 불립니다. 

보문사지는 사방이 개간한 논으로 둘러싸여 현재 훼손이 엄청나게 심한 모습입니다.

 


그 보문들 사이의 훼손된 보문사지 사이에서 그래도 용케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의 주춧돌만은 그당시 흔적을 유지하며 남아 있어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보문사지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등을 고려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아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보문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장이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보문사지는 금당 터와 목탑지가 주위의 논보다는 1~1.5m 정도 높습니다. 

이게 원래의 위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위에 논이 들어서다 보니 흙을 깎아내면서 보문사지 금당터보다 현저하게 낮아진 게 아닌지 싶었습니다. 

이를 고려해 보면 보문사가 있었을 당시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명활산의 낮은 능선이 흘러내린 구릉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ㅎㅎ

 


금당지에는 건물을 바쳤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앞인 동·서에는 목탑지가 남아 있습니다. 

동탑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초석 중앙에 목탑을 지탱했던 구멍이 뚫린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보문사지 동서목탑지. 연화문이 새겨진 초석은 서탑지





우리나라에서는 목탑은 사실 아주 귀한 문화재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목탑건물로는 유일하다면 유일합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최근에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과 근래 소실되었다 복원된 쌍봉사 대웅전 등이 목탑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문사지 목탑도 이들 석탑과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는 작았겠지만 비슷한 형태였을 것 같습니다. 

목탑은 나무로 만들다 보니 화재에 가장 취약합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목탑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웃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시대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다고 합니다. 

가까이 있다보니 보문사지 목탑도 그때 함께 불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금당지와 마주 보고는 보문사를 훤하게 밝혔을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이 그대로 나뒹굴며 방치되어 있습니다.

 





보문사지 금당지 앞 석등 초석




이외에도 많은 석불과 석등을 바쳤을 좌대와 초석 등이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어 하루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보문사지에는 그래도 이름값을 하는 보물 두 점이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가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 제123호)이며 둘이 경주 보문사지 석조(보물 제64호)입니다. 

따로 포스팅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절을 알리는 깃발을 깃대에 달아 세웠던 두 개의 돌기둥을 말합니다. 

안쪽 면은 평면처리를 했고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했으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가늘게 처리했습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려 있으며 북쪽의 돌기둥에는 구멍이 반만 나 있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절에서 물을 담았던 돌그릇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석조의 내외부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랫부분에 물을 빼내었던 배출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을 담아두었던 용기로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보문사지는 사적 제390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 경주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 여행


이번 경주 보문동 구황동 5번째 여행지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경주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라 안내하지만, 입구 이정표에는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로 나와 있어 조금은 헷갈립니다. 




경주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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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정확하게 당간지주를 세운 절명칭이 확인되지 않았을 때 그 지역 이름을 앞에다 붙여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라 합니다. 

안내판에는 경주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정확하게 절 이름이 확인되었을 때 그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보면 바로 이웃에 보문사지가 있습니다. 

현재 여러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도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보물로 지정해 있습니다. 

그래서 보문사지연화문당간지주로는 약간 의구심이 들며 이정표의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가 정식 명칭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보문들 가운데 세워져 있어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정표가 없다면 찾기 힘들 듯합니다. 당간지주는 보통 사찰 입구에다 세워두는데 이는 절에서 행사나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부처님이나 보살의 공덕을 기린다거나 악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깃발을 당이라 하며 깃발을 단 깃대가 당간입니다. 



당간지주는 깃대를 고정하는 돌기둥을 말합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의 많은 당간지주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대부분 당간지주는 밋밋한 형태에다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습니다.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한 연꽃무늬를 장식한 게 특징입니다. 

저도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에서 이런 아름다운 당간지주를 처음 만났습니다. 

꼭 떡틀에 섬세하게 새겨진 문양 같습니다.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높이는 146㎝인데 이는 아랫부분은 땅속에 파묻혀있어 작아 보이지만 실제는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키 큰 모양입니다.

 


일전에도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를 보았습니다. 

그때는 추수가 한창인 가을이었습니다. 

누런 들판에 솟은 당간지주의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습니다. 

무채색의 겨울에 찾아본 당간지주도 참 괜찮은 듯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연화문양에 이끼가 끼어 돌이 시커먼 색이었는데 현재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당간지주 기둥을 청소했는지 깔끔했습니다. 

두 기둥의 간격은 62㎝이며 당간지주 안쪽 윗부분에 너비 13㎝의 구멍이 있으며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보입니다.





그리고 바깥쪽의 윗부분에는 지름이 47㎝인 동근 원안에 팔엽연화문을 조각했으며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냈습니다. 

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는 보문사에서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보문들에 있는제26대 신라 진평왕릉 여행. 진평왕릉


이번 경주 보문동 4번째 여행지는 진평 왕릉입니다. 

진평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부왕이었습니다. 

현재 진평 왕릉은 남산과 명활산 사이에 만들어진 보문들 가운데에 있습니다. 

낭산에는 그의 큰딸인 선덕여왕릉이 있어 서로 부녀의 정을 나누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 진평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2019/03/11 - [여행] - (경북여행/경주여행)전홍유후설총묘 여행.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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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릉은 이번 겨울 방문까지 합해 세 번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진평왕릉은 고목에 새싹이 터지는 늦봄부터 찾는 게 좋을듯합니다. 

특히 여름이면 진평왕을 호위하듯 두른 짙은 수림의 노거수로 그야말로 환상의 경관을 연출합니다.



26대 진평왕은 신라의 초대 왕인 박혁거세를 이어 두 번째로 장기집권한 왕입니다. 

579년에 집권하여 632년까지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가 27대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동륜 태자입니다.





24대 진흥왕의 장자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일찍 죽자 그의 동생 금륜이 왕위를 계승하여 25대 진지왕이 되었으며 후에 동륜 태자의 장자인 진평왕에게 다시 왕위를 물려줍니다.



신라에는 불교가 국교로 공인된 게 법흥왕으로 진평왕은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전 가족을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모니 왕실의 이름을 따와 사용했습니다. 

진평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이라 했으며 왕비는 석가모니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따와 '마야부인 김씨'라 불렀습니다.



동생도 백반, 국반이라 하였는데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입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초반에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왕권을 잡으면서 먼저 관제 정비를 서두릅니다.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국정과 군권을 장악해 왕권 강화에 힘써섭니다. 

581년에는 위화부를 설치하여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했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설치하였습니다.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직접 군사를 일으켜 출격하는 등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분쟁이 심해 잦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타계하려고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608년에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유도하였습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진평왕은 더욱 외교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신라를 수많은 위기로부터 지켜내었으며, 남산산성을 축성과 명활산성 개축 등 서라벌 방어에 전력하였습니다.



진평왕은 632년 죽자 한지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진평왕은 의지가 굳고 현명하고 식견이 있는 군주였나 봅니다. 

당나라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습니다.

 


진평왕릉을 보면 봉분의 지름은 약 40m이며 높이는 8m로 흙을 쌓아 올린 둥근 형태의 봉분입니다. 

봉분 아래쪽에는 자연석의 호석을 돌렸으며 그중 몇 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적 제180호


(경북여행/경주여행)전홍유후설총묘 여행.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과 구황동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설총묘를 포스팅하겠습니다. 

이 묘의 주인은 전 홍유후 설총묘로 알려졌습니다. 설총은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중 한 분입니다. 

설총은 독특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분입니다. 요즘 말로 보면 아주 드라마틱한 출생의 비밀이라 할까요?. 부친은 신라 시대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원효대사이고 모친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친딸인 요석공주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깃거리는 왕족과 평민의 혼인이라고 치부하면 그저 평범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스님입니다. 스님은 결혼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사실인데 공주와 결혼했으니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ㅎㅎ




경주여행 전홍유후설총묘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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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길을 오릅니다. 

서라벌에서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찾아가는 길도 만만찮았습니다. 험난한 산과 깊은 계곡을 타고 넘으면서 몸은 파김치가 되었고 기진맥진하여 이들은 어느 동굴을 찾아들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곯아떨어졌고 원효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더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이 손에 잡혔습니다. 

목이 말라 급한 김에 벌꺽벌꺽 순식간에 다 비워버렸고 다시금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에 꿀맛이었던 물그릇을 찾았다가 그게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밤새 달콤하게 잠을 잤던 동굴은 무덤 속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게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 사상을 깨달았습니다. 

원효는 당나라에 가보았자 별 통수가 없다고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만 보내고 자신은 신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민중 속을 파고들며 노래로서 불법을 전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노래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 김춘추만이 “자신에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아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라는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김춘추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요석궁에 머물러 있던 딸이 있어 이 둘을 맺어줄 계책을 세우고는 신하를 불러 원효를 궁궐로 모셔오라고 합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는 궁궐로 향하다가 요석궁 앞의 개울에 발을 헛디뎌 빠지면서 넘어져 그만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오늘 밤은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고 내일 만나자는 어명을 내렸고 원효는 옷을 말리려고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김춘추는 원효에게 옷만 말리라 했는데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석공주는 10개월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분이 신라 10현 중 한 분인 설총입니다. 이로써 원효대사는 파계승을 자처하며 자신을 소성거사라 불렀습니다. 

설총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경북 경산시 원효대사의 고향마을과 가까운 곳에 설총과 요석공주의 전설이 있는 반룡사가 현재 남아있습니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고향에서 설총을 낳았고 설총과 함께 반룡사에 머물면서 설총을 키웠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을 때는 왕비와 함께 항상 구룡산에 걸린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고 지금도 그 고개를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라고 부릅니다. 

설총은 성장하면서 총명했나 봅니다. 아버지 원효대사의 노랫말처럼 현자를 낳아 나라를 받치는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말입니다.




설총은 이두법을 집대성했는데 이는 한자인 음과 훈인 소리를 새겨 우리말식으로 적어 사용했던 문자로서 유교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해서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습니다. 이두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국사기의 설총 열전 편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에게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해줄 것을 우화로 엮어서 이야기해줍니다. 이게 한국 최초의 창작 설화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후대에 와서 화왕계로 불렸습니다. 

신문왕은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 글로 써서 왕 된 이들의 경계로 삼기 바란다“며 후세의 임금에게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문왕은 설총을 관직에 발탁시켰습니다. 

설총의 묘는 지름이 15m, 높이가 7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아랫부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022년(고려 현종 13년) 홍유후의 시호를 추증받았고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1623년(조선 선조 1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황복사지 발굴 현장도 보고 황복사지삼층석탑을 만나다. 경주구황동삼층석탑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여러 번 찾았던 곳입니다. 

이번에 또다시 황복사지를 둘러보았습니다. 

경주황복사지삼층석탑은(국보 제37호) 이곳 구황동의 이름을 따와서 경주구황동삼층석탑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이번 황복사지 여행은 어수선한 여행이 되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그 주변에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내가 찾게 된 이유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주 황복사지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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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황복사지 여행은 사실 삼층석탑도 삼층석탑이지만 주위에 황복사지 아래에 십이지신상과 귀부인 석재가 남아 있다고 해서 찾았습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이때 발굴이 진행되면서 황량하게 바뀌었고 출입 할 수 없도록 줄도 쳐 놓아 삼층석탑 주위에서 맴돌다 먼발치로 그냥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기를 황복사는 의상대사께서 진덕여왕 8년인 654년 출가했다는 곳입니다. 

그게 오늘날 황복사지이며 삼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눈으로 처음 만나면 첫인상이 늠름한 기상을 가진 장군을 닮은 듯 듬직해 보입니다.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한데 보는 내내 정말 잘생긴 석탑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692년 7월 2일에 세워졌으며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웠습니다.

 


황복사지삼층석탑은 1300년이 넘은 장구한 세월을 견디어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석탑의 상륜부 대부분은 분실되었습니다. 

석탑은 2단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전체 높이가 7.3m입니다.

 


같은 시기에 세워졌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하면 2m 정도 작은 크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석탑의 규모가 간소하게 바뀌었는데 그 출발점이 황복사지삼층석탑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의 발표로는 이번 황복사지 발굴조사에서 대석단 기단과 십이지신상 기단의 건물지, 지붕이 있는 긴복도인 회랑지도 발견되었으며 연못에서는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7점이 나오고 기타 유물 1,000여점이 출토되었다 합니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효성왕의 미완성 왕릉과 건물지 등도 확인되는 등 신라 왕실사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대단위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42년 황복사지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함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 명문이 확인되었습니다.





국보제 79호 금동여래입상과 국보 제80호에 지정된 금제여래좌상이 당시 해체수리과정에서 함께 나왔습니다.

이는 효소왕의 뒤를 이은 아우 성덕왕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황복사지 다음스카이뷰 캡쳐


아래 황복사지 발굴및 출토된 유물사진은 문화재청 보도자료 사진을 캡쳐했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구황동모전석탑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도림사 절터 구황동모전석탑지


경주 구황동의 폐사지를 보고 왔습니다. 

지난 번 여행에서도 구황동모전석탑지를 보고 왔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구황동모전석탑지는 경주나들목에서 포항 가는 외곽도로에 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장소를 언급하면 9층 모전석탑이 있는 분황사와 경주 최대의 왕궁사찰인 황룡사지 맞은편 사거리에 보문단지로 꺾는 도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경주 구황동모전석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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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동모전석탑지는 남아 있는 부재를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지라고 합니다. 

분황사 전탑보다는 규모 면에서 작지만 비슷한 형태의 전탑지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북 감실에 사용된 돌기둥 2쌍이 옛 절터의 영화를 이야기하듯 나뒹굴고 있습니다.





분황사의 아름다운 전탑을 보면서 구황동모전석탑도 잘만 보존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구황동 모전석탑의 돌기둥 배치형태를 보면 탑은 정사각형이며 한변의 길이가 약 4.5m의 크기로 분황사 전탑이 한 변이 13m인 큰 규모인데 그에 비하면 구황동모전석탑은아주 작은 전탑이라 생각됩니다.





1층의 동서남북 사면에다 사방불을 넣은 감실을 둔 형태로 돌기둥에 사천왕상인 인왕상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세웠습니다. 

그 섬세함이 얼마나 빼어났던지 금강역사상 한 쌍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져가 고분관 입구에다 안치해 놓았을 정도입니다.

 




구황동모전석탑지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전설이 전해져옵니다. 

그 전설이란 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야기입니다. 

학창시절 모두 배웠던 이야기로 경문왕이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문왕은 큰일 났다며 이를 왕비나 신하에게는 비밀에 부쳤지만, 왕관을 만드는 복두장에게는 어쩌지 못하고 내 귀가 당나귀 귀임을 발설하면 너의 목숨은 죽음이라며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두장은 마음의 병이 생기면서 시름시름 아파갔고 급기야 죽기 일보 직전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복두장은 마음을 깨끗하게 털고 가자는 심정으로 도림사의 대나무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고함을 크게 질렀고 얼마 뒤 복두장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람만 불면 도림사의 대나무 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귀 귀....”하며 복두장이의 억울한 죽음을 항변하는 양 온 서라벌에 퍼졌고 모두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임을 알게 되었다 합니다.







이에 경문왕은 대나무를 모조리 잘라내고는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게 했는데 이제는 “임금님 귀는 길다”는 황당한 소리가 들렸다 합니다. 

구황동 모전석탑지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 일본인이 ‘도림’이란 기와 파편을 발견했으며. 삼국유사에도 서라벌 입구에 도림사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가 전해지는 도림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배동 삼릉 경애왕릉. 경주 남산 배동 비운의 왕 경애왕릉 여행


경주 배동에는 여러 왕릉이 있습니다. 

6대 지마왕릉, 8대 아달라왕·53대 신덕왕·54대 경명왕릉이 나란히 있는 삼릉과 55대 경애왕릉입니다. 

배동하면 대표하는 게 삼릉이지만 삼릉 옆에 신라 비운의 왕인 경애왕을 모신 경애왕릉을 보고 왔습니다. 

경주 서남산을 대표하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 삼릉 오른쪽 구릉지인 기린천 옆에 있습니다.




경주 신라 55대 경애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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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은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927년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백제의 견훤에게 죽은 비운의 왕입니다.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위응, 어머니는 자성왕후이며 경명왕의 동생입니다. 

경명왕이 승하하자 아들의 나이가 어려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습니다.





이 당시 통일신라는 고려와 후백제의 잦은 침입에다 국운이 쇠퇴할 때로 쇠퇴하여 완전 망할 징조였나 봅니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때 견훤의 강요로 자결한 것은 맞겠지만 나라가 적의 공격으로 망하기 직전인데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는 정신나간 군주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또 그때가 음력으로 11월이라 합니다. 

이를 양력으로 하면 12월이나 1월에 가까운데 생태도 얼려버린다는 매우 추운 한겨울입니다. 

요즘보다 더 추웠을 엄동설한에 바깥에서 연회를 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습니다.





포석정은 연회장소가 아니라 원래 화랑이었던 문노의 화상이 모셔진 사당인 포석사가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8세 풍월주 문노의 화랑도는 호국선이라 불렀는데 이를 보면 경애왕은 견훤이 서라벌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나머지 대신들과 이곳에 나와 신라를 지켜줄 것을 문노의 화랑도에 빌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사람 심정이라데 경애왕도 마지막까지 군주로서 신라를 구해보고자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긴 견훤은 전쟁의 승자로서 경애왕이 연회를 열다 칼에 맞아 죽었다는 나약하고 얼빠진 군주로 묘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승하하자 해목령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 학자는 해목령에서 너무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하며 일성왕릉이 경애왕릉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 왕릉은 대부분 비정된 상태라 능의 주인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경애왕릉은 능의 밑 둘레가 43m, 지름 12m, 높이는 4.2m이며 일반 무덤 보다 큰 평범한 평태이며 흙으로 둥글게 쌓은 봉분입니다.

대한민국 사적 제222호






(경주여행)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온화한 미소가 아름다운 경주 배동삼존불을 만나다.


경주 배동삼존석불입상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배리삼존불의 정식 명칭은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이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현재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에 좌우로 협시보살인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며 1923년에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자리에 맞추어 세웠다 합니다.





경주배리석불입상,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65-1

경주배리석불입상,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삼불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65-2

경주배리석불입상,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삼불사 전화:054-74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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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배동석불입상 본존불 아미타여래

그리고 비바람을 맞으며 풍찬노숙으로 있었는데 1980년대에 전각을 세워 배동 삼존불은 비는 피했지만 그 대신 자연 채광은 가려져 세 불상의 혼화한 미소는 사라졌다는 평가입니다.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는 곳은 경주 배동의 남산 선방골이며 신라시대 선방사가 존재했던 곳이라 전합니다.


경주배동석불입상 관음보살


이곳 삼불사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도 선방사에 모셔졌던 석불 입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배동삼존석불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불상의 근엄함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세분의 얼굴에서 모두 천진함이라 할까요 아니면 개구쟁이 같은 그런 순진무구한 미소가 그대로 느껴져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서민들이 좋아할 그런 불상이었습니다.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은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불로 크기가 2.8m이며 머리에는 도톰한 상투모양의 육계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향해 막은 시무외인 자세이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편 자세인 여원인을 하고 있습니다.

 

경주배동석불입상 대세지보살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에 화사한 느낌이 드는 본존불은 얼굴이 네모나고 풍만합니다. 

눈썹은 둥글고 입은 다물었으며 뺨은 통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와 사부대중을 어루만져줄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협시보살은오른쪽이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입니다. 

머리에 쓴 보관에 불상을 조각했으며 얼굴은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모습임을 느꼈습니다. 

잘록한 허리에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으로 가도록 해서 손가락은 약간 구부렸으며 왼손은 보병을 쥐고 있습니다.





왼쪽은 대세지보살입니다. 

구슬과 꽃송이로 엮은 두툼하며 긴 목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고 세 불상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을 했습니다. 

연꽃무늬가 앙련과 복련으로 대칭되게 새겨진 2단의 좌대 위에 서 있습니다. 

오른손은 목걸이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무엇인가 쥔 듯한 자세입니다.

 


머리 광배인 두광에는 5구의 작은 불상과 큰 꽃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인지 저 또한 왼쪽 대세지보살에 더욱 눈길이 갔습니다.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의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보면 제작 시기는 삼국 말기인 7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보물 제6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탑골마애불상군. 34점의 불교 문화재가 빼곡한 남산탑골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습니다. 

흔히 신라 천 년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주에서 남산을 가지 않고 경주 여행을 다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꼭 경주 남산을 가볼 것을 권합니다. 

그만큼 경주 남산은 다양한 많은 석조 문화재가 눈길을 끕니다. 

그중 유독 눈길이 가는 곳이 경주 남산 탑골마애불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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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남쪽 면의 삼층석탑으로 배반동 탑곡이라 불리며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인 문화재로 불립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불상 조각이 빈틈없이 네 면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일명 부처바위라 부릅니다. 

하나의 바위에 이리 많은 불상이 새겨진 것은 이곳 말고는 아직 만나보질 못했으며 무려 34점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합니다.



바위의 크기가 높이 약 9m에 넓이가 30m인 화강암으로 정말 빈틈없이 새겨놓은 마애불상을 친견하면서 그 예술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 아래에는 현재 옥룡암이란 절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신인사란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이는 이곳에서 신인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를 보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흔적이 이곳 바위에 새겨진 남산탑곡마애불상군입니다.

먼저 덱 계단을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북쪽 면입니다. 

좌우로 9층 탑과 7층 탑을 새겼는데 서로 마주 보고서 있습니다.

 








두 탑의 가운데에는 부처님이 연꽃 위에 앉아 있으며 두 탑 위에는 2명의 천인이 날고 아래에는 사자 두 마리를 새겨 놓았습니다. 

탑의 지붕 끝에 풍탁과 층마다 창문이 새겨져 목탑의 세부적인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로 볼 때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이 이 모습과 비슷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신라시대 목탑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동쪽면에는 가운데에다 여래상을 새겼고 좌우로 협시보살을, 그 주위로 6구의 비천상과 승려상, 금강역사상, 나무 등 모두 11구의 불상과 보살상을 배치했습니다.

 여래상과 보살상을 배치한 삼존불상은 연화 문양 대좌에다 머리에서 빛이 뿜어나오는 듯 형상한 광배까지 모두 갖춘 모습입니다.

또한,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서쪽 면은 남산탑곡마애불상군에서 가장 좁은 면적입니다. 

서쪽 면은 두 그루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결가부좌 하며 도를 깨우쳤음을 보여주는 여래조상과 비천상 2구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를 돌아 올라가면 이 바위의 가장 높은 남쪽 면에 닿습니다.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추측해보면 감실에 새겨진 삼존불상이 신인사의 주존불로 모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오른 쪽에는 수양 버드나무와 세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으며 왼쪽에는 2m 정도 높이의 석불이 서 있습니다. 

불두는 분실되었으며 잘록한 허리와 봉긋 솟은 가슴을 보면 여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배를 써 담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삼존불과 마주하며 암반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석등이 있었던 자리 등과 편편하게 다듬어진 평지를 보면 보호 건물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의 조각솜씨가 정교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보호각이 없이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자연마모가 상당히 심한 상태라 많은 아쉬움이 드는 문화재입니다. 

8세기의 불상 특징은 입가에만 옅은 미소가 나타나는 데 반해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눈가에까지 옅은 미소가 표현되는 것을 보면 7세기 후반의 통일신라마애불상군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인사 또한 7세기 중엽에 명랑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신인종의 종파였다 합니다. 보물 제201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 남사리 북삼층석탑


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을 소개하겠습니다. 

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은 인근에 남사리삼층석탑이 있는 것을 보면 한 쌍의 석탑이 아니었나 추정을 해봅니다. 

이 남사리북삼층석탑은 작은아버님이 계신 영천의 호국원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 1년에 두 번은 꼭 보는 탑이라 고적답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나칠 때마다 항상 어떤 탑인지 궁금했습니다.




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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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 [여행] - (경북여행/경주여행)고운 최치원의 상서장 여행. 상서장에서 최치원의 상소문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둘러보았습니다. 

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은 주택가에 자리했으며 기구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원래 남사마을에 있던 것을 1973년 경주경찰서 신청사를 완공하면서 기단부를 제외하고 지붕돌 3개를 경찰서에 가져가 정원에 보관했다 합니다.

 




아마 정원에 조경으로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남사리 주민이 계속 반환하여 달라고 요청해 1995년 원래의 자리에 가져와 복원하면서 경주 남사리북삼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단층의 기단은 4개의 돌로 짜맞추어 원래 있던 돌과 같은 크기이며 새로 만들었습니다. 

네 모퉁이에 모서리 기둥인 운주를 세웠으며 가운데에는 탱주를 새겼습니다.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으며 지붕돌의 밑면은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습니다.







지금은 원래 탑의 이미지를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탑은 훼손이 심했으나 탑을 복원하면서 부재를 교체하고 남은 돌은 한쪽에 전시 중이며 통일신라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보물로 지정된 남사리 삼층석탑을 찾아가야 겠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호




(경북여행/경주여행)함월산 기림사. 왕의 길, 경주 함월산 기림사 여행


지난 가을여행에 경주에서 가장 골짜기라 해도 괜찮을 도통골에 자리한 기림사를 다녀왔습니다. 

기림사는 신문왕의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곳입니다. 

신라 수도 서라벌에서 부왕인 문무대왕을 만나려면 이곳 기림사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토함산 옆인 추령으로 도로가 뚫렸지만, 

당시에는 기림사를 거쳐 넘어다녔습니다.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7

경주 왕의 길 함월산 기림사 전화:054-744-2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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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 천왕봉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문무왕의 무덤을 감포 앞바다 암초인 대왕암에 장사를 지낼 때도 이 길을 넘어다녔으며 이견대에서 신통한 피리인 만파식적을 구할 때도 이길로 다녔습니다.  

지금은 옛길을 새롭게 발굴하여 왕의 길이라 부르며 봄 여름 가을 많은 관광객이 이 길을 걸으려고 찾습니다.



왕의 길 중심에 자리한 기림사는 오래된 절의 내력에서 보듯이 기림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재미있습니다. 

기림사의 창건은 인도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이 임정사를 세웠다 합니다. 옛날 인도 범머라국에는 임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광유성인이 오백제자를 모아 놓고 설법을 하며 중생을 제도했습니다.

 


서천국에는 400여 개의 소국을 다스리는 사라수대왕이 있었는데 무상도에 관심이 많아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광유성인은 사라수대왕을 임정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사라수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먼 길도 마다치 않고 출발했습니다.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비는 다리가 아프다 했고 사라수대왕은 왕비를 장자의 집에 비녀로 팔고 대왕은 광유성인을 찾아 계속 나아갔습니다.

 


대왕은 광유성인을 만났고 임정사에서 왕생계를 외우며 수행정진 했습니다. 

사라수왕의 왕비는 장자의 집에서 사내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는 ‘극락’을 뜻하는 ‘안락국’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아기였던 안락국은 7년 만에 부왕인 사라수대왕을 만났으며 부왕의 가르침을 받아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림사 진남루

광유성인은 해동의 남쪽 땅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전하라며 안락국에게 떠나라 합니다. 

스승의 명을 받은 안락국은 계림국의 명당에 절을 짓고 임정사라 했습니다. 

그 뒤에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신라 최초 절이라는 뜻으로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기림사라 했습니다.



이게 기림사의 출발이며 기림사의 현판에는 함월산 기림사라 되어 있습니다. 

절을 감싸고 않은 산이 경주 함월산이기 때문입니다. 

기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보통 사찰 영역의 출입문을 뜻하는 천왕문은 제법 걸어가야 합니다. 

천왕문은 우락부락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악귀로부터 불법을 수호하고 절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곳을 지나야만 비로써 기림사 경내에 들어섭니다. 

기림사는 창건 당시부터 대적광전이 있었다 합니다. 

법당에는 삼신 여래를 모셨으며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불과 석조 오백나한 상을 모신 응진전. 삼층목탑, 정광여래사리각, 진남루, 무량수전 건물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정광여래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기림사의 문화재를 보면 정면 가장 큰 규모가 대적광전입니다. 

단층이 벗겨졌는지 알 수 없지만, 무채색의 건물은 묵직한 느낌이었습니다. 

보물 제833호. 금자사경은 보물 제959호이며 유물전시관에는 종이로 만든 보물 제415호 건칠보살상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과 진남루 등은 기림사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문화재입니다. 

기림사는 ’한국 33 관음성지‘이며 전통사찰 제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기림사 대적광전

기림사에서 눈길이 가는 목재 건축물은 진남루입니다. 

새롭게 복원을 했지만 한눈에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이며 건물의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진남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림사는 승병과 수군의 훈련장소 였으며 그때 불린 이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림사 응진전·삼층석탑

앞면 7칸에 옆면 2칸,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 자를 한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우물마루에다 판벽은 창호가 있었으나 사용용도가 바뀌면서 지금의 진남루는 원형이 바뀌어 알 수 없습니다.


기림사 약사전



응진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이며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어졌습니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건물입니다. 

기림사 약사전은 1600년대에 처음 지어져 1654년(효종5년)에 중창되었고 1678년(숙종 4년)에 약사 법당을 중수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면 3칸에 옆면 1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대적광전은 기림사를 대표하는 본전건물입니다. 

지혜의 빛을 세상에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거쳐 1629년인 조선 인조 7년과 1793년 정조 17년에 고쳐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1862년(철종 13년) 기림사에서 일어난 대화재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건물입니다.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축양식입니다. 

이 밖에도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유물전시관, 매월당 등 건물이 있지는 근래에 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의 변모가 갖추어져 기림사의 옛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기림사 관음전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전혀 다른 모습인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경주 여행 포스팅에서 이번에는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서출지 가운데 있는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큼 많은 보물과 국보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 떡을 주무르듯이 빚어낸 석불과 석탑이 남산을 가득 채웠고 그것도 모자라 남산 언저리에 무수한 문화재가 널려 있습니다.




경주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3

보물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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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한곳이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폐사지로 추정되지만 염불사지 같은 절터 명칭을 찾지 못하고 지역의 이름을 따와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그런데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이 자리한 이곳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남산사로『삼국유사』에는 ‘남산 동쪽의 양피사’를 근거로 폐사지를 추정하고 있을 뿐 아직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합니다. 

아마 인근에 양피 저수지가 있는 것을 저수지 명칭이 양피사에서 근거한 게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은 나란히 섰다 하여 보통 남산리 쌍탑이라 합니다. 

그런데 쌍탑이라면 쌍둥이처럼 똑 닮지는 않아도 조금은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산리 쌍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완전 180도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이란성 쌍둥이인 특이한 모습이라 더욱 눈길이 갑니다.




남산리 서 삼층석탑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쪽 탑은 모전 석탑의 형식으로 세웠다 생각됩니다. 

기단부는 바위를 벽돌식으로 다듬어 쌓았으며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 8개를 어긋나게 놓아 서로 물리게끔 했습니다. 

층마다 몸돌과 옥개석인 지붕돌을 한 개씩 다듬어 올렸고 전탑 형식인 죽장리 오층석탑과 같은 지붕돌의 경사면에 5개의 층단을 두었습니다. 

또한, 처마 밑에도 층급받침을 5개 두었습니다.





남산리 서탑은 동탑에 비해 많은 정성을 들였다 하겠습니다. 

동탑의 기단부는 돌을 그냥 다듬은 형태로 쌓았다면 서탑은 2중 기단에 위층은 사방 널돌에 팔부중상을 돋을새김한게 돋보입니다. 

진짜 예술성이 장난 아닙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이 꿀떡 같았지만, 문화재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둘려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이는 곳만 렌즈를 당겨 담았습니다. 

팔부중상 하나하나 개성이 넘쳐나며 한 분 한 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세세하게 조각했습니다. 

한 면마다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팔부신장을 조각했는데 동쪽에는 야차와 용, 남쪽은 아수라와 건달바, 북쪽은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쪽은 천과 가루라 신장입니다.



팔부중상은 신라 중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탑은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을 나타내는 신앙의 한 표현입니다. 

원래 석탑은 열반에 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듯이 아주 신성시 하며 불법을 보호하는 팔부신장을 새겨 악귀들의 범접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산리 동·서 삼층석탑의 높이는 동탑은 7.04m, 서탑은 5.85m이며 동탑이 서탑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서찰을 받아 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서출지 여행


경주 남산 동쪽에는 특별난 이력의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라 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연못보다는 조금 큰 못이라 생각됩니다. 

이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세상 시름을 잊으며 지냈을 분을 생각하니 정말로 부러웠습니다. 

뒤로는 경주를 대표하는 남산이 드리우고 앞에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품은 토함산을 정원 삼아 그 가운데 연못에 정자을 세운 이요당은 사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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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돌을 쌓아 정자의 턱을 받쳤으며 나머지는 연못에 몸을 맡기며 즐거움을 노래했을 이요당은 1664년 조선 현종 5년에 임적(1612~1672)이 지었던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3칸 규모였다고 하나 5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치며 앞면 4칸에 옆면 2칸으로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팔작기와지붕에 건물은 ‘ㄱ’자 형태입니다.

 


임적은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 마을에서 덕망이 높았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농작물이 바싹 말라 농민이 애를 태웠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생은 직접 땅밑에 흐르는 물줄기를 찾아내어 마을은 물론이고 이웃마을에까지 물을 공급하여 사용하게 했습니다. 

서출지 정자의 편액은 물과 산을 즐긴다는 ‘요산요수’의 뜻을 취해 ‘이요당’이 되었습니다.





이요당을 품은 서출지는 신라 시대 때부터 있었으며 전설이 있습니다.

488년 신라 21대 소지왕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소지왕은 궁궐을 나왔다가 남산 아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습니다. 

쥐는 소지왕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쪽을 가르키며 따라가라고 일렀습니다.


 


소지왕은 신하를 보내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신하가 서출지 부근에 이르자 멧돼지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정신이 팔려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면서 소지왕에게 전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신하는 괴이하게 생각하여 소지왕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는 봉투를 건네주었습니다.





봉투 겉면에는 “봉투를 보면 두 명이 죽을 것이요. 만약에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이 있어 고민하다가 두 명이 죽는 거보다는 한명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봉투를 뜯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보고는 “두 명은 백성을 말하며 한 명은 임금을 뜻한다며 봉투를 뜯을 것을 아뢰었습니다.


경주 남산리 서출지와 이요당





소지왕이 봉투를 뜯었더니 안에는 ‘사금갑(射射匣)’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라는 뜻이며 소지왕은 궁궐로 돌아와 활을 당겨 화살을 거문고 통에 쏘았습니다. 

그때 거문고 통 안에서 비명이 났습니다. 

통 안을 보니 궁녀와 승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잡아 참형시키고 그일이 있은 후 서찰을 받아 임금의 목숨을 구했다는 뜻인 서출지(書出池)라 불렀습니다. 

서출지 사적 제138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경주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주 남산은 문화재의 보고입니다. 

흔히 아흔아홉 골(실제는 60여 개)에 아흔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암자가 부지기수로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절터로 보는 곳이 아주 많은데 그중 한곳이 경주 동남산 칠불사로 오르는 남산마을 맨 안쪽에 자리한 염불사지입니다.






경주 동남산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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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지에는 현재 동·서 쌍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염불사지의 쌍탑은 2007년 6월에 복원을 시작해서 2009년 1월에 완료하여 현재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으로 맵시를 뽐내며 전시중입니다. 

복원 되기 전 염불사터의 두 삼층석탑은 훼손 상태가 상당히 심했다 합니다.



1963년 나뒹굴던 염불사지 석탑 부재와 도지동의 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옥개석을 조합해서 불국동 구정광장에다 삼층석탑을 세웠전시했는데 저도 그곳을 지나면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을 시작하면서 2008년 1월 해체되었고 옛 염불사지에 동·서 삼층석탑으로 거듭났습니다.



경주 남산동 염불사지는 사찰 이름치고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염불이란 “부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며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중생이 생각하는 염불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의 수행법 중 가장 기초적인 게 염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염불사에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와 있으며 내용을 보면 경주 남산 동쪽인 피리(避李)마을에 어떤 스님이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염불을 외웠다 합니다. 

목탁을 두드리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아했던지 서라벌의 백성이 모두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염불을 들은 모든 사람이 스님을 공경하였으며 염불(念佛)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목탁을 치며 머물렀던 피리사(避里寺)는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 합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늠름한 외모와는 다르게 아무런 문화재 감투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주 시내에 신라시대 문화재가 많아서 그런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근에 남산사지 동·서삼층석탑만해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문화재에 관심은 많지만,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석탑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염불사지는 사적 제311호에만 지정되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염불사지를 발굴 조사하고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를 내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염불사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고서에는 남리사지로 나오며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이라 합니다. 

2003년과 2008년에 각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와 금당터가 확인되었다합니다.







또한, 발굴보고서에서 석탑의 기초는 연약한 지반을 뚫은 후 안에 천석과 사질점토를 섞어서 교차로 다졌고 동탑지의 규모는 사방 6.5m, 깊이 1.2m 정도이며 내부에서 인화문 토기가 나왔는데 석탑의 건축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외에도 동회랑과 남동회랑, 중문지가 조사되었으며 출토유물을 분석했더니 사천왕사 등 시내사찰과 같은 시기의 기와가 창건기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서탑에서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함이 2개가 나왔으며 3층 탑신의 방형 사리공은 투공되고 탑재 등에서 염불사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와 같은 종류의 기와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의 ‘낭산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던 그 예언인 도리천이 사천왕사라 생각됩니다. 

그게 맞다면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30년이 지난 679년에 사천왕사가 창건되었던 것을 참작하면 염불사지의 창건 연대가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될 것 같습니다.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보고 나서 남산리 버스정류장으로 돌아나오면서 해 떨어진 남산마을의 양피저수지입니다. 

안내판에는 3월에 벚꽃, 7월~10월에는 연꽃과 베롱나무가 장관이라합니다.

(참고: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경주남산 남리사지 동·서삼층석탑 발굴보고서')




(경북여행/경주여행)고운 최치원의 상서장 여행. 상서장에서 최치원의 상소문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다.


우리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분은 너무나 잘알고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입니다. 

많은 분은 고운 최치원 선생을 시대의 풍운아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을 가보았습니다. 

상서장은 경주 최씨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나랏일을 걱정하는 ‘시무십여조’를 써서 상소를 올렸던 곳입니다.





고운 최치원의 경주 상서장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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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68년 약관 12세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엄청나게 빨리 조기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정에서는 그의 어떤 뜻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최치원이 ‘시무십여조’로 더욱 미운털이 박히자 40세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산천을 주유하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여생을 보내며 ‘계원필경’ 등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상서장 뒤로 최지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으며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상서장은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되었다 합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향교, 경주 교동의 교육기관 경주향교 여행


경주향교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향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이란 지명도 경주향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그럼 경주향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향교가 있는 자리는 아주 오래전인 신라 시대부터 교육기관인 국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경주여행 경주향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경주여행 경주향교 전화:054-772-3624



2018/01/23 - [여행]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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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국학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세워졌습니다. 국학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대학입니다. 그게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향교가 시대를 뛰어넘으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경주향교는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492년인 조선 성종 23년에 경주부윤인 최응현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경주향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주향교는 불타고 말았습니다. 대성전에 모셨던 성현의 위패는 경주 안강의 도덕산 정상아래 두덕암으로 옮겼으며, 두덕암은 현재 도덕암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인 선조 33년에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정을 먼저 중건하고 두덕암에 모신 성현의 위패를 다시 옮겨와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4년에는 윤성이 대성전을 들어서는 동문과 서문을 세웠으며 1614년 광해군 4년에 이안눌이 강학공간은 명륜당과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동·서재를 중건함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경주향교의 면모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1668년과 1979년에 보수가 있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인 5,000여 평입니다. 경주향교의 건물배치는 전묘후학의 형태입니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 즉 강당영역을 앞에다 두고 문묘영역은 강당 뒤쪽에다 배치했다면, 경주향교는 이와 반대인 문묘를 앞에다 놓고 강당을 그 뒤쪽에다 배치한 형식입니다.









전묘후학이 조선시대 향교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양식은 생각보다 주위 향교에서는 만나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경주향교의 양식을 전묘후학을 따른 것은 옛 도읍지에 있는 향교의 공통점이라 합니다. 왕과 그 가족인 왕족이 먼저 공자와 성현의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는 전묘후학의 양식이 이해가 갔습니다.





경주향교에서 대성전은 보물 제1727호 입니다.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건축적으로 우수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인 대성전은 맞배지붕인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새 날개처럼 생긴 공포양식을 말하며 대성전의 내력이 현재 정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은 건물의 공포와 창호, 내부의 가구 등 옛날 방식의 기법이 남아 있으며 용마루 받침대인종도리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건물의 중건연대와 참여했던 장인 등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확인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은 공자의 시호인 ‘대성지성문성왕’에서 나왔으며 공자의 위패와 연국복성공인 안자, 성국종성공 증자, 기국술성공 자사, 주국아성공 맹자 등 중국의 5성과 경주 출신인 홍유후 설총과 문창후 최치원, 문원공 이언적 선생 등 3현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김굉필, 조광조, 김집, 송시열 등 우리나라의 18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음력 2월8일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경주향교 여행에서는 문묘 공간을 바깥에서 까치 발로 들어 먼발치에서 구경했습니다. 어느 향교든지 모든 문묘공간은 문을 닫아두는데 이번 경주향교 대성전은 그날 행사가 있어 문을 열어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관리자분께 양해를 구하자 원래 대성전 출입은 할 수 없지만 들어가세요 하여 대성전을 가까이서 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성전을 보고 나오면서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돌우물은 경주향교를 들어서는 쪽문 앞에 있어 가장 먼저 보지만 향교를 만나고 나오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국학이 건립될 당시부터 있었던 우물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돌우물은 땅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낮은 형태이며 테두리를 다듬은 널따란 돌 2개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주향교에서 가장 오래된 돌우물과 경주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경주 교동 최씨 고택도 함께 만나보세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경주 교동 사마소 여행


경주 최부잣집으로 통하는 최씨 고택과 경주향교, 월정교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보았던 곳이 경주 교동 마을 입구에 있는 경주 사마소(慶州 司馬所)입니다. 사마소하면 텔레비전 사극드라마에 한 번쯤 등장하는 양념입니다. 사마소는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토론을 벌이던 장소를 말합니다.



경주 교동 사마소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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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과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수령에게 자문하던 유향소가 당시 권력인 훈구파가 장악했는데 이와 맞서서 사마소는 젊은 유생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훈구파의 행태를 보면서 팔팔한 젊은 기상으로 뭉쳐져 아주 좋은 뜻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연구와 정치토론을 하면서 고향마을 교화에 힘써기도 하고 관청의 행정도 도와주는 등 처음에는 아주 좋은 뜻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권력이 따라붙고 세력화가 되니까, 초창기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관청의 업무를 도와 주던 게 권력으로 개입하고 수령에게 태클까지 거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변질하여 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등 그 행동이 도를 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폐단이 자꾸만 일어나자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은 사마소 폐지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시국의 시류에 휩쓸리는 정치꾼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경주 사마소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741년 영조 17년에 복원해서 풍영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사마소를 찾았을 때는 풍영정과 병촉헌 사마소 현판이 없었는데 이번에 세 현판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때는 아마 수리 중이었나 봅니다. 사마소 현판은 1762년 부윤 홍양한이 글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촉헌은 1832년 생원 최기영이 썼다고 하는데 사마소, 풍영정, 병촉헌의 현판 글씨의 필체가 묵직하고 모두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사마소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출입문이 꽉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까치발로 담장 너머에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사마소는 경주향교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월정교 인근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에 옮겨 왔다고 합니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



그리고 사마소 바깥의 담장 아래에는 영광대가 새겨진 사각 돌기둥과 안내판이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안내판을 보니 사마소에 세워져 있었던거라 합니다. 1860년에 선비들이 남천에 흩어져 있는 월정교의 석재를 모아 대를 쌓고 영광대(影光臺)라 했다고 합니다.



영광대의 뜻풀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으며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잘못하지 않게 타일러 주의를 시키는 글귀가 담겨 있다”는 의미라 합니다. 영광대를 보면서 성현의 책을 읽고 마음을 닦는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상을 보는 듯했습니다.





(경주여행)경주 월정교와 춘양교지. 반월성에 걸린 경주 월정교 


경주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현재 10여 년 가까이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며 2018년 봄이면 월정교를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월정교의 다리와 건물은 모두 완공되었지만, 월정교 주변의 유적지 부대시설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공사 중이지만 멀리서 외부를 보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어 엄청난 규모의 월정교를 마음껏 보고 왔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2016/11/15 - [여행] - (경주여행)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월정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인 760년(경덕왕 19년)에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아 경덕왕 때 건설된 다리임을 알 수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250년 전입니다. 오랜 세월을 겪다 보니 지금은 다리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리를 지탱했던 배 모양의 교각만 남천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고 월정교의 길이가 60.57m였으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가 나왔다 합니다. 그 유물로 추정하기를 교각 위에 누각과 지붕이 연결된 누교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경주 월정교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복원된 월정교




월정교 복원공사는 2008년 4월 시작하여 내년에 봄에 모든 공사가 끝나는 10년의 장기 복원공사입니다. 복원되는 월정교의 규모를 보면 길이가 66.15m에 너비가 9m, 높이는 8.25m입니다. 다리는 돌기둥이며 그 위의 다리 상판은 나무를 깔고 두리기둥에다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다리 양쪽 끝에는 문루를 세웠습니다.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건물의 최고 높이는 15.67m인 중층 건물에다 주심포 양식의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를 하면서 원효가 태종무열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향하던 중 남천에 놓인 유교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데 요석공주와 로맨스를 만들게 했던 다리의 유적을 발굴했다 합니다. 당시의 다리가 맞는다면 삼국시대 유적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월성 걸린 월정교






반월성






월정교와 700m 위쪽에 남아있는 춘양교지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 있는 누각 다리의 유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제 원효가 건넜던 유교가 가장 오래된 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춘양교는 조선 시대에 월정교와 짝을 이루어 일정교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며 효불효교와 칠성교 등 민간신앙과 결합해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월정교와 함께 두 다리는 왕궁으로 드나들던 다리입니다. 춘양교도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그 규모가 밝혀졌습니다. 길이는 월정교보다 조금 짧은 55m이며 다리 상판은 최소한 13m, 교각높이는 5m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교각은 월청교와 같은 방식인 남천의 유속을 고려하여 배 모양으로 쌓았으며 다리의 규모와 석재의 재질, 색깔까지도 월정교와 거의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합니다. 이 두 다리 터는 고대 신라의 교량 축조방법과 토목기술, 신라 왕경의 규모와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 합니다. 춘양교지는 경주 박물관 뒷쪽에 있습니다. 경주 월정교지와 춘양교지는 사적 제457호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최부자집 경주최씨고택 여행. 경주에서 가장 뜨는 여행지 경주최씨고택.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아주 돈 많은 부자를 이야기할 때는 경주 최부잣집이란 말을 종종 듣고 자랐습니다. 제 고향이 경주이기도 하지만 400년 12대 동안 만석군 집안에 9진사를 배출해서 그 명성이 더욱 유명했나 봅니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경주 최부자집을 이제 5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찾아보았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 주소:경상북도경주시 교동 69

 

경주 최 부자는 경주시 교동에 있습니다. 교동의 지명은 주변에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 신문왕 2년인 68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 조선 시대에는 향교로 그 시대는 달라도 교육기관으로서 계속 명맥이 이어와 현재에도 경주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경주 최씨 고택의 건립연대는 1700년쯤이며 처음 집을 지을 당시에 인근 향교인 유림의 반대에 부딪혀 향교의 뜻을 적극 수용해 향교보다 두 단 낮게 건물의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졸하며 아담한게 단아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원래 경주최씨는 최진립 장군의 사당이 있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조선 중기 무렵 이곳 교동에 옮겨와 정착했습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은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원형을 잘 보여주며 초창기에는 99칸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 발생한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불타 주춧돌만 남았는데 2006년에 큰 사랑채를 복원했으며 작은 사랑채는 아직 복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에는 항상 문객들로 들끓었으며 흉년에는 굶주린 백성에게 곳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과 함께 더욱 유명한 게 경주 교동법주입니다. 교동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에 지정되었으며 경주 최부자 집에만 내려오는 가양주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했던 최국선이 낙향하여 최초로 빚었던 술로 교동법주는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라 합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최적기는 9월에서 그다음 해 4월까지이며 밑술에는 밀 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을 넣어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야 교동법주가 된다고 합니다. 완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하며 미황색에 교동 술만의 그윽한 향기와 맛을 가진 우리 전통주입니다. 현재 최국선의 10세손인 최경이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동법주 건물 옆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며 경주최씨 종가로 월성의 남천 변에 자리한 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큰사랑채는 다시 복원했으며 ‘一’의 대문채와 안채는 ‘ㅁ’자 모양입니다.

 

2006년 복원한 큰사랑채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수수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높이 또한 낮아 그저 평범한 모습입니다. 현재에는 복원한 큰 사랑채이지만 화재이전의 구한말에는 의병장이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선생, 스웨덴의 구스타프 당시 왕세자와 의친왕 이강 공 등이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주춧돌만 남은 작은사랑채 터

 

 

 

 

작은 사랑채는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집을 지을 당시 반월성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받침돌 옮겨와 지었다 합니다. 또 한 곳은 곳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재 곳간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창고로 700~800석의 쌀을 보관했던 경주최씨 고택의 부를 상징했던 곳입니다.

 

 

 

 

여성들이 거주했던 안채는 8채였다지만 현재는 3채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최씨 고택의 12대 만석꾼이자 독립유공자 최준선생을 아시는지요?? 영남대학교 하면 가장 많이 회자하는 분으로 독립운동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문화교육사업에 만석의 전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최준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담당하며 항일투쟁을 벌리다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백산 안희재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는 경주에 흩어져 있는 신라문화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고 영남대학교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해 나라를 이끌 동량을 키워내는데 일조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과 그 공적을 인정해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는 코스로 경주 최부집인 경주 최씨고택입니다. 주위로 경주향교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께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요석궁 전설 등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굴불사지 사면석불. 경덕왕이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했다는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해는 527년인 법흥왕 때입니다. 신라는 당시 귀족세력의 권력이 강해 왕이라 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였으며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였고 박이차돈은 그런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제안을 합니다. ‘신라에 불교가 융성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제한 목숨 바치겠다’는 박이차돈은 끝내 순교로서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4



2016/10/29 - [여행] - (경주여행)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백률사



 

 

 

그리고 통일신라 경덕왕(742~765)이 재위하면서 불교문화는 최고 절정을 이루며 많은 불교 건축물이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이때 창건되었습니다. 어느 날 경덕왕은 박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창건된 백률사를 찾았습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향하던 중 소금강산 기슭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파보게 했습니다. 땅속에는 정사면체의 큰 돌이 있었으며 돌의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경덕왕은 절을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속에서 부처를 파냈다’하여 굴불사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면 석불은 현재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제가 여행하면서 본 사면 석불은 공덕산 사불암과 남산의 칠불암, 그리고 굴불사 사면 석불로 그만큼 존재 자체로도 귀한 문화재입니다. 사면 석불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부처님이 자리해 있습니다. 굴불사 사면 석불의 전면인 서쪽은 아미타 불상과 좌우로 협시보살이, 북쪽은 마애 미륵보살상과 십일면육비 관음보살상이, 남쪽은 석가삼존불이, 동쪽은 약사여래불을 모셨습니다.


 

 

 

먼저 서쪽면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전면부이며 그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사면 석불의 바위 자체에다 몸통을 삼았으며 따로 돌을 올려 불두를 만들었습니다. 협시보살을 보면 왼쪽은 관음보살입니다.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는 듯 그 모습이 수려하며 오른손은 잘려나간 상태입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머리 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신체와 함께 파손 상태가 심한 모습입니다. 대세지보살의 머리는 훼손되어 알 수 없지만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협시 보살인 관음보살은 신체보다 머리 부분이 더 큰 게 비율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이는 멀리서 기도하는 사람의 시각에 맞춘 것으로 이목구비가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면 더욱 친근감과 부처님을 숭배하는 마음이 크게 생긴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는 경주 남산의 여러 석불에서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북쪽면은 한쪽에 마애 미륵보살을 조각했는데 그 모습은 꼭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는 듯 천진난만해 보입니다. 이 보살도 하체보다는 상체가 크며 기도자의 원근을 감안한 것은 아닌지,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바위면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선각으로 남아 있는 관음보살상입니다.


 

 

 

 

 

 

특이한 것은 얼굴이 11개이며 팔은 6개로 십일면육비 관음보살로 우리나라에 십일면관음보살은 있지만 팔이 6개인 불상은 굴불사 사면 석불이 유일하다 합니다.


 

 

 

 

 

 

 

 

 

동쪽면의 약사불은 서쪽의 아미타불과 대비되며 오른손은 훼손되었고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사부대중의 질병을 약으로 치유한다는 부처님입니다. 선각으로 표현된 광배하며 신체보다는 얼굴의 윤각이 더욱 뚜렷합니다. 가부좌를 튼 부처님의 모습이 근엄하며 '모든 질병은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는 듯 보입니다.


 

 

 

 

 

 

 

 

 

남쪽면은 석가 삼존불로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이 있었다지만 일제강점기 때 왜인이 바위를 통째로 뜯어가 지금은 빈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보면서 짐작해보면 왜인의 마음을 뺏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보살상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왼쪽의 문수보살도 대체적으로 원형이 남아 잘록한 허리 하며 신체의 볼륨이 살아 있는 듯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은 머리 부분이 뜯겨 나간 상태지만 신체를 표현한 조각가의 솜씨가 다른 불상에 비해 더욱 돋보이며 섬세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쪽면의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라면 남쪽면의 석가 삼존불은 현세 부처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굴불사 사면 석불을 조각한 분도 현세의 부처님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물 제121호


 

 

 

 

 

 

 

 

 

 

 

 

제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경주에 계시는 페친 강정근님의 댓글입니다. 삼국유사 탑상편의 사불산 굴불산 굴불사 만불산조에 나온 내용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조각기법이 7~8세기 때 조성된 것으로보이며   경덕왕 때인 8세기 중반과는 석불의 조각기법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홍수등 일연의 자연재해에 묻혔던것이 경덕왕때에  다시 발견된 것으로 추측된다하여 말미에 첨부합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이차돈과 백률사. 신라 불교의 최초 순교자 이차돈의 전설이 있는 백률사 여행을 하다. 


경주하면 신라 시대 때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여 현재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어 불교의 성지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이 백률사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는 북방전래를 따르고 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에 중국의 승려인 순도가 전진에서 불경과 불상을 들여오면서부터입니다. 백제는 384년인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리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백률사 주소: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1

백률사 전화:054-772-8634



2016/10/26 - [여행] - (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중생사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그러나 신라는 당시 국경이 산악지대로 험준한 백두대간이 막고 있어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라 유민들 사이에는 불교가 조금씩 전래하였으며 신라에다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한 분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스님 묵호자(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서라벌로 들어와 불교 포교를 힘썼지만 실패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백률사 송죽당



이곳이 신라불교의 초전지라면 신라불교의 최초 발상지는 구미시 해평면의 태조산 도리사입니다. 아도화상은 냉산(태조산)에다 처음 토굴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으며 이는 416년으로 신라불교가 공인받는 527년으로 보면 100년이 넘는 터울이 있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이미 신라에도 일반백성은 조금씩 불교가 성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신라가 불교에 공인을 받게 된 계기는 물론 527년 이차돈의 순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6세기 초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력이 강한 귀족에 의해 번번이 대립하였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이차돈이 법흥왕의 고심을 알고 은밀하게 찾아와 “신라에 불교가 융숭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면 기꺼이 제 한 목숨을 받치겠습니다”. 라며 제안을 합니다.





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호





법흥왕이 은밀하게 이차돈의 순교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그길로 천경림에다 절을 지으려고 합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는 곳은 신라 귀족으로서는 매우 신성시하며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다 이차돈이 절을 짓겠다 하니 귀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차돈이 이것을 노렸을 것 같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세력인 귀족은 법흥왕에게 이 일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차돈을 잡아들이게 하고 그의 목을 쳐라했습니다.


 




이차돈은 잡혀 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불교를 위해 죽으니 만약 부처님께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하고 당당히 순교하였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흰 젓이 한길이 넘게 치솟았고 갑자기 천지가 진동했으며 하늘이 캄캄하고 꽃 비가 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귀족세력들도 어쩔 수 없이 법흥왕이 바라던 데로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였고 “왕이 곧 부처다”며 부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불국토로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백률사 마애삼층석탑


백률사는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던 자리에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에 절을 세웠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자초사라하였습니다. 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세운 순교비가 1914년 백률사 인근 숲속에서 발견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이차돈 순교비의 조성 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신라 헌덕왕 9년인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 공양당이라하며 화강암의 육각형 기둥입니다. 복련의 연꽃을 새긴 좌대 위에 세워졌으며 육각기둥 끝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면에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석당의 비문은 당시 최고의 신필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김생의 글씨라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유추하면 백률사가 자초사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률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경주 부윤 윤승순에 의해 중수되었습니다. 대웅전은 단층의 목조 기와 건물로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집으로 좌우 협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건물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건물의 기단부인 축대는 일부지만 신라 시대 양식이 남아 있습니다. 백률사는 예전에 없던 송죽당이 최근에 들어섰으며 신라불교의 성지답지 않은 어찌 보면 아주 초라한 작은 암자 규모입니다.








그러나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백률사가 딱 그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작은 터에 여러 전각을 세우지 못해서 그런지 중심법당인 대웅전에는 모두 3개의 문이 있습니다. 가운데는 대웅전, 오른쪽은 응진전입니다. 대웅전과 응진전을 한 건물에 둔 경우는 아주 드문 일로 보입니다. 물론 법당 중앙에는 본존불과 좌우로 협시보살인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시며 대웅전의 사격을 갖추었고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로 16나한상을 함께 모셨습니다. 






왼쪽에는 신라에 불교를 공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순교를 자처한 이차돈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 앞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3.2m 높이에 상륜부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삼층석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사찰과 다르게 석탑을 세울 장소가 없어 자연석 바위에다 탑 모양을 새겼던 것으로 보이며 소금강산 정상 30m 북사면에는 마애삼존좌상이 식별이 불가할 정도로 마멸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 대웅전에서 이차돈 순교비와 함께 경주국립박물관에 옮겨 전시 중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 백률사의 금동약사여래불(국보 제28호)과 이차돈 순교비를 따로 만나고 싶습니다.


이차돈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제공)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인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재. 


신라 시대에는 가장 신성시했던 산이 경주 낭산입니다.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다 장사를 지내라며 유언을 남깁니다. 도리천은 불국토에서 28개의 하늘나라 중에서 첫 번째가 사천왕이 지키는 나라로 사왕천이라 합니다. 두 번째가 사왕천 위쪽에 있는 나라인데 이를 도리천이라 합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낭산이 곧 도리천이라 합니다.






중생사 주소:경북 경주시 배반동 640-1

중생사 전화:054-772-4836



2016/10/22 - [여행]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이 때문인지 신라인들은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지상의 극락세계인 낭산을 신성시하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10여 년 뒤에 선덕여왕릉 밑에 절이하나 들어섰는데 그게 사천왕사였습니다. 그리고 낭산 기슭에는 황복사와 중생사터가 남아 있으며 도리천으로 불렸던 낭산이라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사찰의 규모를 부재로 짐작 할 수 있지만 현재 모두 폐사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경주여행에서 다시 찾았던 중생사의 옛 영화는 부재로 남았으며 초라한 절집은 강아지 두 마리만 왕왕 짓으며 우리를 반겼습니다. 한쪽으로 길게 늘어선 중생사에서 출토된 연꽃 대좌와 석탑의 부재 등 석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욱 깊게 남습니다.





그러나 중생사는 도리천이라 일컫는 낭산 기슭의 사찰답게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이 보물 제665호에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뒹굴던 거대한 관음보살 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옮겨 전시 중이라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위면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흔적만남아 있는 마애보살삼존좌상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보면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아주 높은 것 같습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은 매우 드문 사례로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운데 모신 본존불은 머리에다 두건을 썼으며, 양어깨를 감싼 듯한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한, 몸과 머리에서 빛을 내는 모습을 한 광배를 돌렸으며 손 모양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본존불 왼쪽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쪽에 칼을 집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위로 올린 유희좌를 취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신장상은 양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악귀를 내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게 꼭 절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과 닮았습니다.

 





 


현재 중생사 모습. 왼쪽 전각에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능지탑지. 문무왕의 화장터 경주 능지탑지 여행.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경주여행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들에는 오곡백과가 누렇게 변해 그야말로 황금들판을 이루었습니다. 여행객들의 입으로 경주는 봄과 가을 여행이 최고라는 말이 허투가 아님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느꼈습니다. 이번 경주여행은 능지탑지입니다.






경주 능지탑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


경주 능지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21-1






능지탑지하면 벌써 여행을 하신분도 있지만, 저도 이곳을 두 번째 여행합니다. 한번은 이른 초봄에 찾았는데 그때는 삭막했던 겨울의 잔해가 남아 있어서 지금과는 느낌이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경주 능지탑지는 옛 신라인이 매우 신성시한 산으로 여겼던 낭산의 구릉지에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건축물로 2층으로 복원한 게 탑 같기도 하고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능지탑을 능시탑, 연화문을 새긴 바위를 테두리에 돌려 연화탑으로도 불립니다. 현재 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었던 문무대왕의 죽음을 이곳에서 화장하고 동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다 해중릉을 모셨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입니다.




 

 


능지탑지의 발굴조사에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소조 불상 조각과 내부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누군가의 화장터임을 보여주는데 주위에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 유적을 보면서 문무왕의 화장터로 보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열흘 후 창고 문밖 뜰에서 인도불교의식에 따라 검소하게 화장하라”며 유조를 남겼다는 대목이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 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고 문밖 뜰’이란 지점이 현재 능지탑지가 세워진 곳이라 합니다.


 










 

 


한때 문무왕의 화장터를 원성왕릉인 괘릉으로 주장했던 적도 있었지만 새로운 조사과정에서 능지탑이 문무왕의 화장터임을 밝혀내었습니다. 복원된 능지탑지를 보면 2층입니다. 현재 주위에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서 원래 능지탑은 5층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마 복원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능지탑은 사각 형태이며 연화문을 새긴 석재가 기단과 탑신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사방의 기단에다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는데 그중 뱀과 용 호랑이상은 분실되어 빈 곳의 바위를 설치했습니다.

 





문무대왕하면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성왕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당나라와 손잡고 먼저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그다음에 고구려도 멸망시켰습니다. 당나라는 애초에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했던 약조를 깨고 신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려하자 문무왕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괴멸시키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물리고 이 땅에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667년 드디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문무왕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을 염원하며 삼국통일과 당나라와의 전쟁에 사용했던 모든 무기를 땅에다 묻고 무장사를 지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문무왕은 항상 긴장의 연속에서 살았다 갑자기 풀려났기 때문인지 그다음 해에 56세로 붕어했습니다. 죽으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신라를 왜구로부터 지키고자 서라벌의 입구인 동해구에 감은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공하여 문무왕의 유조를 받들었습니다. 이견대와 만파식적 등 문무왕의 전설은 능지탑과 함께 신비함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경주 여행을 하면서 이런 역사와 전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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